초록 수첩

초록 수첩

$17.00
Description
‘빛에 대한 분명한 사랑’ 필리프 자코테
초록빛을 머금은 자연에 대한 아득한 시선
20세기 가장 중요한 프랑스 시인 필리프 자코테의 시와 산문을 수록한 『초록 수첩』이 출간되었다. 여러 형식의 글을 담은 이 작품에는 벚나무, 모과나무, 작약, 접시꽃, 비를 흠뻑 맞은 나무와 풀들이 나오는가 하면, 천공을 뚫을 듯 비상하는 종달새와 말벌도 나온다. 세계의 온갖 사물과 현상들 앞에서 자코테는 확정적인 언어를 경계한다. 그것들에 빗대어 자신의 서정을 간편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그냥 거기 있는” 자연을 그린다. 그저 그 자체로 태어나고 사라지는 자연, 동시에 그 모든 것을 “고요히 응축”한 채 머무는 자연을 그린다. ‘수첩’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다양한 모습으로 흩뿌려진 대상을 고스란히 담은 그의 글을 통해 신비로움을 머금은 자연이 드러난다.
저자

필리프자코테

저자:필리프자코
시인이자번역가.1925년스위스에서태어나1950년프랑스로귀화했다.스위스로잔대학교에서문학을공부했으며,화가인아내와함께프랑스남동부드롬지방의그리냥에정착했다.그의시에는이지방의풍경이많이담겨있다.횔덜린,릴케,만델스탐,노발리스,토마스만,웅가레티등의작품을번역했으며프랑시스퐁주,장폴랑,이브본푸아,자크뒤팽등여러작가들과교유했다.1953년첫시집『올빼미L'Effraie』를발표한이후,다수의시와산문,평론을집필했다.생전에그의작품선집이갈리마르출판사의‘플레야드’총서로기획,출간되었다.2021년그리냥자택에서95세의나이에작고했다.

역자:류재
고려대학교불어불문학과를졸업하고파리소르본누벨대학에서파스칼키냐르연구로문학박사학위를받았다.현재고려대학교,한국외국어대학교통번역대학원,철학아카데미,대안연구공동체등에서프랑스문학및프랑스역사와문화,번역학을강의하고있다.옮긴책으로필리프자코테의『부재하는형상들이있는풍경』,파스칼키냐르의『심연들』『세상의모든아침』『성적인밤』,클로드레비스트로스의『달의이면』『오늘날의토테미즘』『레비스트로스의인류학강의』『보다듣다읽다』,오노레드발자크의『공무원생리학』『기자생리학』,모리스블랑쇼의『우정』등이있다.

목차


벚나무─9

초록수첩
장밋빛,추운계절에─25
녹색과흰색문장紋章─29
비가잎사귀위로돌아왔다─45
상승하는단계들에관하여─47
여름아침,역광이비치는산들─55
8월의섬광─57
산들이보라색을띠는이미지근한─63
바람에흩날리는파편들─67
겨울저녁의색들,마치─78
꽃들의출현─83
얼핏보인가는조각달─96

수많은세월이흘러
호수전망─101
작약들─111
소브강물,레즈강물─123
밤의노트─135
화관─145
촌락─159
박물관─171
빈발코니─179
두초안─189
라르슈고개에서─193
수많은세월이흘러─209

옮긴이의말─221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나는가끔생각한다.만일내가아직도글을쓰고있다면,그건무엇보다우선제법뚜렷하고그럴법한기쁨의파편들을모아놓고싶어서라고,아니그럴수밖에없어서라고.이기쁨이,아주오래전어느날,별처럼폭발해그별가루들을우리안에퍼트렸을것만같다.시선속에서빛나는약간의별가루들,우릴뒤흔들어놓고,홀리고,기어코혼란스럽게만드는것은분명이것이다.그런데곰곰이생각해보면,그섬광을,이파편화된반사광을자연속에서불시에포착하는것이더놀라운것일지모른다.적어도,이반사광들이내겐결코빈약하다할수없는수많은몽상들의기원이니까.
_11쪽

이열매들은어두운초록속에붉은것이흐르는,붉고기다란송이같았다.요람속,아니면이파리들로짠바구니속에들어있는열매들.초록속의붉음,만물이서로미끄러져들어가는시간,느리고도조용한변모의시간.거의,전혀다른세계가현현하는시간.어떤것이문돌쩌귀위에서돌아가는시간.
_15쪽

아름다움이라는단어를사용할권한이이젠우리에게없어보인다.사실이단어는닳고닳았다.물론,나로서야아름다움이라는게뭔지잘안다.그렇긴해도,생각을해보면나무들에대한이런판단은이상하다.나로선,그러니까정말이지세상에대해별반아는게없는나로선세상에서‘가장아름다운’것이본능적으로느껴지면,그게바로세계의비밀에가장가까운것이아닐까생각한다.공기를거쳐우리에게까지전달된전언을가장충실히번역한것이아닐까생각한다.
_31~32쪽

그모든색중에서녹색이가장신비롭고,가장위안이될수있을것이다.아마도,그깊은곳에낮과밤이조화롭게있어서일까?초록이라면,곧식물인가.모든풀과모든이파리.우리에겐녹음綠陰,서늘함,잠깐의안식처.
_41쪽

다가가도,3월어느날의현실에서뿐만아니라단지몽상에서조차그녀들은당신보다앞서와있다.잎사귀문을밀어내면서,거의보이지않는방벽도함께밀어낸다.초록아치밑에서그녀들을따라가다몸을돌리면,어쩌면자신이더는그림자를드리우지않는다는걸,흙바닥에발자국하나남기지않는다는걸알아차리게될지도모른다.
_121쪽


이곳,빛은바위들처럼단단하고,딱딱하고,눈부시다.그러나이들위에이벨벳,이닳고닳은포목,이까끌까끌보풀난모직.산전체가가축무리로,목장으로변해있다.다이어져있어,스스로버티고,다함께버틴다,태초의그날처럼.이거대한공간에와있으면우리를가두지않고환대하는집에있는기분이드는것도그래서다.
_125쪽

4월,브라마렐이라불리는여울목,레즈강의물이다.집에돌아가기전잠시그것을바라본다.짧지만,영원한듯한.서쪽으로몸을돌리면강물은넓게벌어지고하늘크기만큼커진다.그빛이눈부시다.
_134쪽

접시꽃은어떻게피나?여름이지나감에따라키큰꽃대의아래부터위로올라가며(한편발치에서는그넓은잎사귀들이녹슬고,찢어지고,때론누더기처럼떨어진다).6월의어느날,점점높이피신하는방식의이런개화에나는깜짝놀랐고,나무들꼭대기에서황금빛으로,산정상에서분홍빛으로물들며역시나점점더높이올라가며피어나는저녁태양이떠올랐다.
_147쪽

이렇게말할수있으면좋겠다.날따라와.내가너에게여기숨겨진문을열어줄게.그런데나자신은거길지날수없다.그래서그게어디로통하지는지도알지못하고.다만그곳에서네팔이그그을린색을더이상잃지않아도되길.일종의빛속의유배지,빛속에억류된곳이길.
_187쪽

격류,불타는것.마치가장신선한것이찰나의순간두세계사이의불꽃이될수있는것처럼.나이든여행자가,고개를넘으면서,까마득한저어린시절을향해잠깐고개를돌리는순간일까.계곡저바닥에몇몇안개조각들이겨우생길까말까한1초의공간.그를아직도기다려주고있는것만같은것과합류하는듯한착각,환각.
_2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