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무궁 (유계영의 9월)

무궁무궁 (유계영의 9월)

$15.00
Description
2025년 난다의 시의적절, 그 아홉번째 이야기!
시인 유계영이 매일매일 그러모은
9월의, 9월에 의한, 9월을 위한
단 한 권의 읽을거리
시가 가르쳐준 첫번째 마음
이상하지. 내가 작아질수록 삶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9월, 무한히 펼쳐지고 확장되는 일보 직전의 날들. 이렇게도 뜨거워도 되나 싶은 기록적인 폭염의 여름을 보내며 맞이하는 가을이다. 난다 출판사 시의적절 시리즈 스물한번째 책, 2025년 9월의 주인공은 구상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수상 시인 유계영이다. 『무궁무궁』은 4년 만에 펴내는 그의 두번째 산문집으로 열한 편의 시와 함께 산문, 편지, 단상 등을 실었다. 눈을 뜨면 밖이 보이고 눈을 감으면 안이 보이는(「시 안 쓰기 시쓰기」), 산문과 시가 서로 호응하도록 구성한 이번 시의적절은 이 한 권 전체가 유계영의 시론이기도 하다. 0.99999…… 끝없이 이어지는 9는 1과 같다. 소수점 이하로 무한히 번지는 세계. 시인은 말한다. 이런 시시한 생각을 할 줄 몰랐다면 1의 무궁무궁도 몰랐을 거라고(작가의 말). 그에게 시는 틈으로만 이루어진 언어. 틈은 공간과 공간 사이에 난 각지각처로 뻗어나가는 무량한 샛길, 빠져나간 빈자리가 발생시키는 리듬이다. 호주머니에 든 동전들은 필요한 정도보다 모자랄 때 맑은소리를 낸다(198~199쪽). 그가 감동하는 것은 작은 목소리, 있음의 틈을 벌리며 빛나는 것을 발견하게 하는 목소리다(201쪽). “이상하지. 내가 작아질수록 삶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시가 가르쳐준 첫번째 마음이.”(9월 29일 읽기)
울게 되면 더 큰 주목을 받게 된다는 만고불변의 이치를 조기에 알아차린 어린이. 학교 담벼락 생울타리에 심겨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무궁화처럼 운동장의 가장자리로만 운신했던 체육 시간(「무궁무궁」). 태어난 동네에서 단 한 번의 이사 없이 삼십 년을 살았지만 누군가 길을 물으면 죄송해요, 잘 모르는 동네라서요라고 답하는 사람. 인생에 들이닥친 몇 가지 역경에 오른쪽과 왼쪽의 개념을 배웠던 일이 포함되는 사람. 동네 한 바퀴 산책도 약간의 모험심을 요구할 정도(「나무와 나무 사이」)이지만 눈앞에서 흔들리는 개들의 신난 엉덩이를 보며 두 마리 개들과 매일 산책하는 사람(9월 3일 산문). 길에서 데려온 엉망진창 고양이 민지, 떠돌이 개 하이와 함께 살기로 결정한 사람. 여럿 속에 섞여 어울릴 때 어느 때보다 열심히 사물에게 말을 걸게 되는 사람, 그러다 사물들이 슬며시 들켜주는 특별한 모습을 시끄러운 눈빛으로 그는 본다(64쪽).
무엇도 앞지르려 하지 않고 한 폭으로 살아 있는 시. 시는 최소한의 그림. 오래 바라보면 더 보여주는, 이해가 아닌 관계가 되는 순간. 작게 낮게 얇게 비운 자세만이 틈 사이로 들어갈 수 있다(9월 29일 읽기). 마주하기 힘든 것을 마주해야 할 때. 그에게 잡아먹히기, 아주 작은 사람이 되어. 그의 내부로 들어가 불을 켜고, 그를 먹고, 그에 의해 움직이기. 그렇게 그는 어떻게 해도 자신과 연결되지 않는 대상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다(「호랑이 뱃속 구경」). 시에 마음을 담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언어가 비켜준 자리, 행간에 담기지 않을까.(9월 26일 산문) “이상해, 자꾸 음악이 발생하는 거야.”(「늘어놓기, 가로등이 꺼질 때까지 늘어놓기, 완전한 어둠 속에서 늘어놓기……」) “이제 나는 유모차의 텅 비어 있음을 바라볼 수 있다.”(207쪽) “그늘은 드리우는 것, 그림자는 포개지는 것, (…) 서로서로 밟고 가기 좋은 그림자들이 태어납니다. 선생님, 나는 태어납니다.”(9월 6일 편지)

그러므로 의미를 사랑하기 위해
무의미의 우주를 향해 휘발되어버리는 시가 필요한 게 아닐까

언어의 의미가 너무 중요한 나머지 시인은 타인과 주고받는 뜻 없는 인사말에도 골똘해진다. 잘 지내느냐는 물음에 잘 지낸다는 답이 즉각 돌아올 때 공연히 상심하기도 한다. 그는 시 읽기가 어렵다던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던 말을 돌려받는다. 소리를 주고받는다고 생각해. 너와 내가 목소리를 주고받으며 함께 마주친다는 것이 내용만큼 중요한 거야. 서로의 리듬과 소릿값을 마주치게 하여 만드는 합주(66쪽).
투명한 사냥감을 상상하며 숨죽여 움직이는 고양이를 위한, 방울 소리 없는 방울 목걸이를 시인은 찾아 헤맨다. 불이 켜지지 않는 전구나 끝단이 둥근 나사못처럼 이름과 쓸모가 따로 노는 사물을. 시 수업을 하고 돌아오면 입도 뻥긋하고 싶지 않지만 이 와중에도 시인은 이야기를 원한다고 느낀다. 언어를 통하지 않는 이야기는 어떻게 가능할까. 구슬 없는 방울은 정말 까맣게 텅 비어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을까(9월 8일 단상).
그에게 문체는 텍스트의 영혼에 걸친 직물. 직물의 패턴을 들여다봄으로써 텍스트 너머를 바라본다. 정확한 뜻에 닿지 않더라도 뉘앙스만으로 전해지는 풍부한 신비감, 선명하게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희미한 두려움. 시의 활자는 일보 직전의 궤적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는 일보 직후를 이제 독자(청자)에게 넘겨준다(「일보 직전의 말들」). “슬픔은 목구멍 안쪽에서 열점을 기다리는 관악기가 아니라고. 꼭 너에게만 말하려” 한다(「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점의 수학적 정의는 ‘부분이 없는 것’이다. 시인은 과연 ‘부분이 전체인 것’과 어떤 차이가 있을지 한동안 생각한다. 시에서 시를 덜어낼 수 있을까, 풍경에서 풍경만 남길 수 있을까(「동윤에게서 동윤 뺏기」). 그는 쓴다. 점이 아닌 것이 없다고. 나에게서 ‘나’를 덜어낼 수 없는 것처럼, 나의 부분이 속눈썹 한 올이라곤 할 수 없는 것처럼(55쪽). 어떤 나무가 나의 고통과 무관하게 반짝이고 있을 때, 어떤 잎사귀가 나와 무관하게 색을 터뜨릴 때, 그는 연결과 단절이 얽혀 있는 한 점의 깊이를 본다(「Point, Dot, Spot」). 상처를 벌리기도 하지만 벌어진 상처를 꿰매기도 하는 힘을(「사물의 힘으로부터 떨어져나와」).

나는 새로움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서도 새롭기를 원한다. 언어를 버리기로 하면서 언어의 사소한 기척에도 몸서리치길 희망한다. 새로움의 지위를 지워버린 새로움만 꿈꾼다. 오직 나의 현재로만 흐르는 새로움을 그린다. 잠시간 새로웠다가 다시 기절해버리고 마는 것이길 원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다시 새로워지기도 하는, 거의 살아 있는 상태에 가까워진 것이기를 원한다. 불가능하겠지? 그러나 가능하다는 희망으로 씩씩하게.
_9월 19일 산문, 「새로움의 매우 짧은 꼬리」 중에서
저자

유계영

저자:유계영
2010년『현대문학』신인추천으로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온갖것들의낮』『이제는순수를말할수있을것같다』『이런얘기는좀어지러운가』『지금부터는나의입장』,산문집『꼭대기의수줍음』이있다.영남일보구상문학상,현대시작품상,시결작품상을수상했다.

목차

작가의말한걸음만딛고싶게7

9월1일일기Point,Dot,Spot11
9월2일시있다15
9월3일산문사물의힘으로부터떨어져나와19
9월4일시요가원에서27
9월5일산문무궁무궁33
9월6일편지그늘과그림자―나의선생님들에게39
9월7일시그림자놀이45
9월8일단상방울속은텅비어51
9월9일시고양이목에방울달기59
9월10일단상이웃들을괴롭히지않기위하여63
9월11일시한붓그리기69
9월12일산문새와만나는방법75
9월13일시동윤에게서동윤뺏기81
9월14일읽기일보직전의말들―나의첫시집『온갖것들의낮』읽기85
9월15일자전산문호랑이뱃속구경97
9월16일산문새와나사이111
9월17일단상시안쓰기시쓰기119
9월18일짧은산문과시씨앗하나125
9월19일산문새로움의매우짧은꼬리131
9월20일시수염이긴쪽이어른입니다147
9월21일읽기무기력기에접어든사람에게1153
9월22일읽기무기력기에접어든사람에게2159
9월23일읽기암흑속에서―김수영의「사랑의변주곡」읽기165
9월24일시유해조수171
9월25일읽기살아있는것만이살아있는것을알아본다
―신이인,『검은머리짐승사전』읽기175
9월26일산문맹지盲地에서183
9월27일시맹지盲地에서187
9월28일산문나무와나무사이191
9월29일읽기모든것이중요하다―나의사적인고전읽기197
9월30일시늘어놓기,가로등이꺼질때까지늘어놓기,완전한어둠속에서늘어놓기……209

출판사 서평

그러므로의미를사랑하기위해
무의미의우주를향해휘발되어버리는시가필요한게아닐까

언어의의미가너무중요한나머지시인은타인과주고받는뜻없는인사말에도골똘해진다.잘지내느냐는물음에잘지낸다는답이즉각돌아올때공연히상심하기도한다.그는시읽기가어렵다던사람들에게들려주었던말을돌려받는다.소리를주고받는다고생각해.너와내가목소리를주고받으며함께마주친다는것이내용만큼중요한거야.서로의리듬과소릿값을마주치게하여만드는합주(66쪽).
투명한사냥감을상상하며숨죽여움직이는고양이를위한,방울소리없는방울목걸이를시인은찾아헤맨다.불이켜지지않는전구나끝단이둥근나사못처럼이름과쓸모가따로노는사물을.시수업을하고돌아오면입도뻥긋하고싶지않지만이와중에도시인은이야기를원한다고느낀다.언어를통하지않는이야기는어떻게가능할까.구슬없는방울은정말까맣게텅비어아무소리도내지않을까(9월8일단상).

그에게문체는텍스트의영혼에걸친직물.직물의패턴을들여다봄으로써텍스트너머를바라본다.정확한뜻에닿지않더라도뉘앙스만으로전해지는풍부한신비감,선명하게알수없는것에대한희미한두려움.시의활자는일보직전의궤적만을보여줄뿐이다.그는일보직후를이제독자(청자)에게넘겨준다(「일보직전의말들」).“슬픔은목구멍안쪽에서열점을기다리는관악기가아니라고.꼭너에게만말하려”한다(「고양이목에방울달기」).

점의수학적정의는‘부분이없는것’이다.시인은과연‘부분이전체인것’과어떤차이가있을지한동안생각한다.시에서시를덜어낼수있을까,풍경에서풍경만남길수있을까(「동윤에게서동윤뺏기」).그는쓴다.점이아닌것이없다고.나에게서‘나’를덜어낼수없는것처럼,나의부분이속눈썹한올이라곤할수없는것처럼(55쪽).어떤나무가나의고통과무관하게반짝이고있을때,어떤잎사귀가나와무관하게색을터뜨릴때,그는연결과단절이얽혀있는한점의깊이를본다(「Point,Dot,Spot」).상처를벌리기도하지만벌어진상처를꿰매기도하는힘을(「사물의힘으로부터떨어져나와」).

나는새로움을목표로하지않으면서도새롭기를원한다.언어를버리기로하면서언어의사소한기척에도몸서리치길희망한다.새로움의지위를지워버린새로움만꿈꾼다.오직나의현재로만흐르는새로움을그린다.잠시간새로웠다가다시기절해버리고마는것이길원한다.그러나시간이지난어느날다시새로워지기도하는,거의살아있는상태에가까워진것이기를원한다.불가능하겠지?그러나가능하다는희망으로씩씩하게.
_9월19일산문,「새로움의매우짧은꼬리」중에서

책속에서

9월은산책이다.9월엔거의집에붙어있지않는다.강아지두마리와살기때문이다.친구들은나를무척부지런한사람이라알고있지만그건오해다.집밖을나서는이유는개들의조리있는몸짓에설득당해서다.
―「사물의힘으로부터떨어져나와」부분

고양이목에방울달기
예전부터나는우리집고양이에게근사한방울목걸이를달아주고싶었다.문제는방울소리.나는청각이매우예민해서소리에대한스트레스가큰편인데,인간보다청력이뛰어난고양이는오죽할까.투명한사냥감을상상하며숨죽여움직이는고양이가제몸에서딸랑거리는방울소리를용납할리없다.하지만예쁜방울목걸이를달아줄수있다면흐뭇한미소가끊이지않을것같았다.분명나와같은입장의집사도있을것같았다.자본주의시장이이런수요를그냥지나쳤을리없다.나는방울속에구슬이없는방울목걸이를찾아다녔다.당연한일이지만그런것은어디서도팔지않았다.
―「방울속은텅비어」부분

이것이나의시예요.아무것도그리지못하는나의시예요.오늘과내일이달라지는내가바로서있을수있게,언제나공사중인,언제나난장판인시예요.그리고당신의시를듣고있지요.개미가개미의시를들려주고,할머니가할머니의시를들려주고있으니까요.빈털터리가빈털터리의시를들려주고,외톨이가외톨이의시를들려주고있으니까요.우리들은공장에서생산된장난감기차가아니고,그만그만한크기의옥수수나감자가아니니까요.안에서선명히들리는기척이니까요.
―「새로움의매우짧은꼬리」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