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컵의 휴식 (양장본 Hardcover)

흰 컵의 휴식 (양장본 Hardcover)

$18.00
Description
이수명 날짜 없는 일기 세번째 권 출간!

이 죽음을 시로 이동시킬 수 있을까
시가 얼음을 녹여, 죽음에서 지푸라기를 꺼낼 수 있을까
이수명 시인의 날짜 없는 일기 세번째 권 『흰 컵의 휴식』을 출판사 난다에서 펴낸다. 『내가 없는 쓰기』 『정적과 소음』에 이어지는 이번 책은 시인 이수명이 2024년 1월부터 12월까지 한 해 동안 쓴 일기로 2~3일에 한 번씩 쓴 짧은 메모이자 자생적 생기를 띤 계절 일기이다. 사물과 상황의 사생을 위주로 구도나 배치 없이, 신경써서 구성하지 않는 편안함에 기대어 있는 이 조각들은 방향 없이 이어지며 그날의 기분에 따라 태도에 따라 말의 색과 톤, 높이와 위치, 명암도 다 다르다. 마치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시인은 말한다. 글을 쓰는 1년 동안 불충분하게나마 다른 사람이었을지 모른다고. 날짜 없는 일기의 세번째 권을 묶으며 이수명 시인은 짧은 날것의 언어 호흡이 글쓰기 한쪽에 어느덧 자리를 잡게 된 느낌을 받는다. 이 일기는 일종의 사생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나 마주치는 장면을 특별한 압력을 빌리지 않고 사생하듯 스케치해보려는 시도였다. 보는 자가 있기에 있는 것이 그대로 그려지기는 쉽지 않아 사생 지향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러한 방식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사생이 가능하게 된다. 입구와 출구가 딱히 필요 없는 글. 어쩌면 시인은 일기니까, 시처럼 쓰지 않는다고 하면서 잠깐씩 또다른 시를 흉내 내는 건 아닐까 스스로 묻는다. 그리고 다시 빠져나오는 반복. 그 어디로 들어가기보다 사생성에 힘입어 나오려는 쪽으로 움직인 글들. 시인은 낯선 어조를 찾는다. 아직 닿아보지 못한 어조, 더 낮고 흔들리는. 다시 내려서는, 다시 밝아오는, 분리된 어조. 불쑥 나타나는 어조를(18쪽). 시는 사물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묘사할 수 있을 때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정확한 것이다. 정확해야 신비롭다(35쪽). 시인은 아무래도 1월의 일기를 쓸 때의 내가 아니다. 그 어느 날의 내가 아니다. 아침의 단호하던 내가 아니며, 방금 전에 거리를 쏘다니던 사람이 아니다. 이상하고 명랑한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150쪽). 어느 메타포에도 휘감기지 않는 단일한 흰색의 컵, 어떤 숨겨진 패턴이나 층위가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컵을 들어올리려는 손가락들이 컵의 표면에 이지러져 비쳐도 컵의 휴식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흰 컵의 휴식, 엔트로피로부터의 휴식, 지상에 처한, 지상을 입고 있는 존재의 지상으로부터의 휴식. 아무도 방해하지 못한다(82쪽).
납작해진 치약을 눌러 짠다. 아직은 더 납작해질 수 있다(15쪽). 시인은 추운 날씨 버스 정류장 아무도 앉지 않은 벤치 아래에서 바싹 마른 갈색의 낙엽을 발견한다. 잎자루도 있고 잎맥이 남아 있는. 눈과 추위에 쓸려가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고 가장 늦게까지 남은 선과 무늬를(16쪽). 강추위에 모든 게 숨죽인 거리, 지속되는 한파에 물은 흐름을 멈추고 두껍게 얼어 있다. 아주 가벼운, 물위에 떠 있는 지푸라기도 꼼짝없이 얼음 속에 박혀 그와 하나가 되어 있다. 얼어붙은 죽음으로 실재하는 지푸라기. 얼음을 깨뜨리지 않는 한 이것에 이를 수 없다. 이 죽음을 시로 이동시킬 수 있을까. 시가 얼음을 녹여, 죽음에서 지푸라기를 꺼낼 수 있을까(30쪽). 책상 위에 투명 플라스틱 물병이 두 개 놓여 있다. 생각 없이 번갈아 마셔서 두 병 다 비슷하게 약간만 남아 있다. 물의 양에 상응하는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언어의 옆길에 있는 물을 마신다. 언어가 알지 못하는 물을 마신다. 꾸밀 수 없는 물을 시인은 그냥 바라본다(64~65쪽). 시인은 가벼운 남방을 걸치고 외출했다가 다가오는 햇빛을 본다. 인도 옆 땅에서 올라온 아주 작은 키의 흰 풀꽃들을 감싸고 있는 빛을. 꽃잎들은 작고 흩어져 있어서 마치 부서져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잘 보이지도 않는 부서진 풀꽃들이 지천으로 빛을 나르고 있었다. 누구도 받아들지 못하는 빛을(92쪽).
저자

이수명

저자:이수명
1994년『작가세계』를통해등단했다.시집『새로운오독이거리를메웠다』『왜가리는왜가리놀이를한다』『붉은담장의커브』『고양이비디오를보는고양이』『언제나너무많은비들』『마치』『물류창고』『도시가스』,산문집『나는칠성슈퍼를보았다』『내가없는쓰기』『정적과소음』,연구서『김구용과한국현대시』,평론집『공습의시대』,시론집『횡단』『표면의시학』,번역서『낭만주의』『라캉』『데리다』『조이스』등이있다.박인환문학상,현대시작품상,노작문학상,이상시문학상,김춘수시문학상,청마문학상을수상했다.

목차

책머리에005

1월013
2월033
3월053
4월075
5월097
6월119
7월139
8월159
9월181
10월201
11월221
12월245

출판사 서평

이수명의‘날짜없는일기’

날것의반형식,반문학적인쓰기
시를버리고지상에도달하는언어들

시를쓰는사람이맞닥뜨린언어의편린들을주워올린일종의문학일기.1년동안쓴일기를한권에묶고날짜를쓰지않고월별로만장을나누었다.문학화시킬필요가없는평평한순간들에대한기록,문학의반대편으로나아가는날것의글쓰기이자어떠한의미도들어서지않는평이한순간을유지하려는시도이다.시인이수명은시에대한생각옆에무심하게펼쳐진시공간과일상,사물과현상을이리저리스케치해나가며문학과문학아닌것의경계,시어와시어아닌것의차이가흐려지는순간을포착해보려한다.

책속에서

아직도탁상달력을사용한다.사람들을만나서일정을메모할때폰을이용하지만집에서는책상위에놓인작은달력에기입한다.그것도주로연필로적는다.연필과종이의만남을지속하는방법이다.몇자적는짧은순간의정서가마음을다독인다.그날기분에따라서글씨의크기와필체와흘림이모두다르다.나중에잘못알아보는것들도있다.내글씨가아닌것같은글자들이다.
_2025년1월일기「6」

발화되지않은것들,언어에접촉되지않은무한세계의우둔함속에몸을맡기고앉아있다.나는그우둔함속에서우둔해지고,거친힘속에서약화되며,무한의흐름속에상실된다.이는매우간명한과정이다.무한은명령이고속삭임이다.하지만그것이무엇인지알지못한다.알지못한채편안하다.언어의옆길에있는물을마신다.언어가알지못하는물을마신다.꾸밀수없는물이다.나는그냥물을바라본다.발화하지않는것을발화되지않게한다.
_2025년3월일기「8」

녹이스는것에사로잡힌다.녹이슬고멈추어진세계에서어떤말못할불가피함을목도한다.이제는돌이킬수없는방향으로접어든것이다.녹의색은형언하기어렵다.청록이나청회색비슷한,그러면서포괄적으로검은색이다.시간이색으로나타나는것에대해생각해본다.시간이쓰러지는것이다.지금까지의초월과우월을내려놓고시간이색으로흐느끼는중이다.
이런색을어디에선가또본느낌이다.어두워질때의짙푸른색이그렇다.이맘때,가까이도로로엄습해오는어둠뿐아니라멀리산의어두워지는형체가모두청흑색을띤다.녹이슬때,그리고어두워질때,시간은엇갈린참회를하는것일까.너무늦었다고,너무빠르다고.
_2025년6월일기「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