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12·3계엄이 일어난 지 똑 1년이 지났다. 국민 다수가 불법 계엄의 현장을 TV로 지켜본 산증인임에도 내란이 완전 종식되기까지는 아직도 상당한 장애물을 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각계에 내란을 비호하는 세력이 포진해 12·3계엄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조차 막아서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밤잠을 설치게 한 2024년 12월 3일의 뜬금없는 비상계엄은 한 비정상 대통령에 의한 한낱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1987체제가 확립된 이후 세계가 부러워할 만한 민주화를 이룩한 게 사실지만, 민주주의의 뿌리를 흔들며 권위주의독재로 회귀하려는 흐름 역시 강고하다. 그 일탈적 표현이 12·3계엄이다.
11개의 정치 사건과 관련된 해방후의 계엄(실발령 횟수는 수십 회)
‘비상대권’非常大權은 대통령이 마음대로 휘둘러도 되는 전가의 보도인가? 계엄령을 비롯한 비상대권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오해는 제3공화국 시절의 10월유신에서 비롯되고, 5공정권을 거치며 확대재생산되었다. 하지만 우리 헌법과 법률은 국가긴급권의 오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엄격한 통제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 헌정질서의 파괴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헌법재판소는 ‘군경을 동원하여 국회 등 헌법기관의 권한을 훼손하고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침해함으로써 …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대한국민의 신임을 중대하게 배반’하였다며,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고 선고하였던 것이다.
12·3계엄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욱 심층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모든 것에는 역사적 연원이 있기 마련이므로 시간을 거슬러 해방후의 모든 계엄을 살필 필요가 있다. 해방후 이땅에 발령된 계엄은 대략 11개의 정치적 사건과 관련한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세부로 들어가 발령된 횟수를 세자면 수십 번으로 늘어난다. 4·19 때만 해도 선포 횟수가 8차례나 되고, 6·25전쟁 동안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 전국계엄과 부분계엄을 넘나들며 20여 회 발령되었다. 따라서 전체 계엄 발령 횟수는 큰 의미가 없다. 같은 6·25전쟁기의 계엄이라 해도 부산정치파동과 관련한 계엄 확대 조치는 계엄을 이용한 친위쿠데타라서 6·25전쟁과 그 정치적 함의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최초 계엄은 미군정 때…굴곡의 시원 부산정치파동…국민의 손발을 묶은 10월유신…
이처럼 모든 계엄은 우리의 굴곡진 현대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책은 이같은 문제의식에서 해방 직후부터 윤석열의 12·3계엄에 이르기까지 이땅에서 발령된 모든 계엄을 정치사회적인 측면에서 해부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해방후 최초의 계엄은 미군정하에서였다. 계엄이나 다름없는 군정 치하에서 이중의 계엄이라 할 수 있는 계엄이 1946년 대구에 발령되었다. 미군정 아래서의 계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복잡다단한 정치현실에 대한 천착이 필요하겠고, 더불어 이후 수없이 되풀이된 계엄의 효시라는 점에서도 그 정치사회적 함의를 살필 필요가 있겠다. 이어서 1948년 여순계엄과 4·3계엄이 발령되었다. 신생 대한민국정부가 발걸음을 뗀 지 겨우 두세 달이 지난 시점에 발령된 계엄이지만, 두 계엄 역시 미군정이 깊숙이 개입한 계엄이라는 특징이 있다. 한편으로는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에 발령되어 당시부터 줄곧 위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는데다, 계엄의 와중에서 수만 명의 국민이 목숨을 잃어 그 여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6·25전쟁 시의 계엄은 국가비상사태하의 총력동원이라는 계엄법의 취지에 유일하게 부합하는 계엄이었다. 그럼에도 뒤늦게 경비계엄이 발령되었다가 비상계엄으로 바뀌는 등 전쟁 기간 내내 비상계엄과 경비계엄, 지역계엄과 전국계엄을 넘나들며 탄력적으로 운영되었는데, 국민의 기본권 제한에 신중을 기한 점이 주목된다. 다만 1952년 부산정치파동시 부산과 지리산 일대에 비상계엄을 확대한 것은 야당 탄압 및 대통령직선제를 밀어붙이기 위한 것으로서 이후 한국현대정치사 굴곡의 시원이었다. 그 중요성을 감안해 이 부분은 별도의 꼭지로 다루었다.
제1공화국을 무너뜨린 4·19 때도 계엄이 선포되었지만 정치적 이용에 거리를 두려 한 군의 미온적 태도 때문에 계엄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군은 태도를 바꾸어 5·16군사정변을 일으키면서 계엄을 반대세력의 손발을 묶는 도구로 활용하였다. 군사쿠데타로 출범한 제3공화국은 한일회담반대시위를 억누르기 위해 1964년 계엄을 발령하고, 1972년에는 영구독재를 노리고 이른바 10월유신과 연계된 비상계엄을 발동하였다. 이후 우리 국민은 대통령을 자신의 손으로 뽑는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이같은 체제는 1987년까지 이어졌다. 박정희정권의 반민주적 성격은 1979년 부마민주항쟁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계엄과 위수령을 잇달아 선포하며 무력진압에 나섰지만 권력 내부의 암투 끝에 박정희는 암살되고 만다. 하지만 민주주주의 봄은 오지 않았다. 박정희 군부독재의 후예인 신군부가 박정희 암살과 동시에 선포된 10·26계엄을 이용해 권력을 찬탈하고, 1980년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통해 총칼로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짓밟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계엄의 역사이다. 윤석열의 계엄은 다시는 반복할 것 같지 않던 계엄의 상처를 45년 만에 들추어냈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 선진국을 자부하던 국민에 대한 배반이자 폭거가 아닐 수 없다. 전쟁과 계엄은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다시는 이땅에서 국민의 소중한 생명과 재산이 내동댕이쳐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그동안 계엄이 어떻게 국민의 삶을 난도질하고 옥죄어왔는지 역사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이 책은 대중의 눈높이에서 바로 그 같은 요구에 답하기 위해 집필되었다.
11개의 정치 사건과 관련된 해방후의 계엄(실발령 횟수는 수십 회)
‘비상대권’非常大權은 대통령이 마음대로 휘둘러도 되는 전가의 보도인가? 계엄령을 비롯한 비상대권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오해는 제3공화국 시절의 10월유신에서 비롯되고, 5공정권을 거치며 확대재생산되었다. 하지만 우리 헌법과 법률은 국가긴급권의 오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엄격한 통제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 헌정질서의 파괴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헌법재판소는 ‘군경을 동원하여 국회 등 헌법기관의 권한을 훼손하고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침해함으로써 …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대한국민의 신임을 중대하게 배반’하였다며,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고 선고하였던 것이다.
12·3계엄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욱 심층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모든 것에는 역사적 연원이 있기 마련이므로 시간을 거슬러 해방후의 모든 계엄을 살필 필요가 있다. 해방후 이땅에 발령된 계엄은 대략 11개의 정치적 사건과 관련한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세부로 들어가 발령된 횟수를 세자면 수십 번으로 늘어난다. 4·19 때만 해도 선포 횟수가 8차례나 되고, 6·25전쟁 동안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 전국계엄과 부분계엄을 넘나들며 20여 회 발령되었다. 따라서 전체 계엄 발령 횟수는 큰 의미가 없다. 같은 6·25전쟁기의 계엄이라 해도 부산정치파동과 관련한 계엄 확대 조치는 계엄을 이용한 친위쿠데타라서 6·25전쟁과 그 정치적 함의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최초 계엄은 미군정 때…굴곡의 시원 부산정치파동…국민의 손발을 묶은 10월유신…
이처럼 모든 계엄은 우리의 굴곡진 현대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책은 이같은 문제의식에서 해방 직후부터 윤석열의 12·3계엄에 이르기까지 이땅에서 발령된 모든 계엄을 정치사회적인 측면에서 해부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해방후 최초의 계엄은 미군정하에서였다. 계엄이나 다름없는 군정 치하에서 이중의 계엄이라 할 수 있는 계엄이 1946년 대구에 발령되었다. 미군정 아래서의 계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복잡다단한 정치현실에 대한 천착이 필요하겠고, 더불어 이후 수없이 되풀이된 계엄의 효시라는 점에서도 그 정치사회적 함의를 살필 필요가 있겠다. 이어서 1948년 여순계엄과 4·3계엄이 발령되었다. 신생 대한민국정부가 발걸음을 뗀 지 겨우 두세 달이 지난 시점에 발령된 계엄이지만, 두 계엄 역시 미군정이 깊숙이 개입한 계엄이라는 특징이 있다. 한편으로는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에 발령되어 당시부터 줄곧 위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는데다, 계엄의 와중에서 수만 명의 국민이 목숨을 잃어 그 여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6·25전쟁 시의 계엄은 국가비상사태하의 총력동원이라는 계엄법의 취지에 유일하게 부합하는 계엄이었다. 그럼에도 뒤늦게 경비계엄이 발령되었다가 비상계엄으로 바뀌는 등 전쟁 기간 내내 비상계엄과 경비계엄, 지역계엄과 전국계엄을 넘나들며 탄력적으로 운영되었는데, 국민의 기본권 제한에 신중을 기한 점이 주목된다. 다만 1952년 부산정치파동시 부산과 지리산 일대에 비상계엄을 확대한 것은 야당 탄압 및 대통령직선제를 밀어붙이기 위한 것으로서 이후 한국현대정치사 굴곡의 시원이었다. 그 중요성을 감안해 이 부분은 별도의 꼭지로 다루었다.
제1공화국을 무너뜨린 4·19 때도 계엄이 선포되었지만 정치적 이용에 거리를 두려 한 군의 미온적 태도 때문에 계엄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군은 태도를 바꾸어 5·16군사정변을 일으키면서 계엄을 반대세력의 손발을 묶는 도구로 활용하였다. 군사쿠데타로 출범한 제3공화국은 한일회담반대시위를 억누르기 위해 1964년 계엄을 발령하고, 1972년에는 영구독재를 노리고 이른바 10월유신과 연계된 비상계엄을 발동하였다. 이후 우리 국민은 대통령을 자신의 손으로 뽑는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이같은 체제는 1987년까지 이어졌다. 박정희정권의 반민주적 성격은 1979년 부마민주항쟁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계엄과 위수령을 잇달아 선포하며 무력진압에 나섰지만 권력 내부의 암투 끝에 박정희는 암살되고 만다. 하지만 민주주주의 봄은 오지 않았다. 박정희 군부독재의 후예인 신군부가 박정희 암살과 동시에 선포된 10·26계엄을 이용해 권력을 찬탈하고, 1980년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통해 총칼로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짓밟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계엄의 역사이다. 윤석열의 계엄은 다시는 반복할 것 같지 않던 계엄의 상처를 45년 만에 들추어냈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 선진국을 자부하던 국민에 대한 배반이자 폭거가 아닐 수 없다. 전쟁과 계엄은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다시는 이땅에서 국민의 소중한 생명과 재산이 내동댕이쳐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그동안 계엄이 어떻게 국민의 삶을 난도질하고 옥죄어왔는지 역사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이 책은 대중의 눈높이에서 바로 그 같은 요구에 답하기 위해 집필되었다.
계엄으로 보는 한국현대사(큰글자책)
$3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