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가장 사랑하는 조선에 가장 귀한 성서를!
_교회 너머, 더 나은 기독교를 향한 성성(惺惺)한 외침
_교회 너머, 더 나은 기독교를 향한 성성(惺惺)한 외침
“혹자는 음악을 조선에 주며, 혹자는 문학을 주며, 혹자는 예술을 주어 조선에 꽃을 피우며, 옷을 입히며, 관을 씌울 것이나, 오직 우리는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골근(骨筋)을 세우며, 그 혈액을 만들고자 한다. 같은 기독교로서도 혹자는 기도생활의 법열의 경지를 주창하며, 혹자는 영적 체험의 신비 세계를 역설하며, 혹자는 신학 지식의 조직적 체계를 애지중지하나, 우리는 오직 성서를 배워 성서를 조선에 주고자 한다. 더 좋은 것을 조선에 주려는 이는 주라. 우리는 다만 성서를 주고자 미력을 다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조선에.” (김교신, 〈성서조선〉 1935. 4.)
기독교가 조선 땅에 들어온 지 불과 40년이 지난 즈음, 성서를 삶으로 살아내고자 했던 한 식민지 청년의 외침이, 백 년의 세월을 지나 오늘의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다시 울려 퍼진다.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
김교신의 삶을 ‘문학적 전기’로 되살리다
《김교신, 백 년의 외침》은 근현대소설 연구자이자 경북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인 저자가, ‘한국의 기독교인 인문학자로 산다는 것’에 대한 고민과 정체성 속에서 맺은 첫 열매이다. 김교신의 삶을 시간순으로 기록하는 것을 넘어, 그가 남긴 텍스트-《성서조선》, 일기, 산문과 각종 기록들-를 문학적 시선으로 읽어 내어 김교신의 내면과 삶의 궤적을 입체화했다.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김교신을 ‘무교회자’로 불러왔다. 하지만 그가 거부한 것은 교회 자체가 아니라 ‘교회주의’였다. 제도와 형식에 갇힌 이들을 향해 성서의 자리, 예수 정신으로 살아내라고 했던 그의 외침은 이제 다시 한국 교회와 신앙인 안에서 공명한다. 저자는 이러한 김교신의 문제의식을 신앙적 차원에서 단선적으로 보지 않고, 교회 너머 인문주의자의 시선으로 읽어 낸다. 예를 들어, 김교신이 〈성서조선〉 「창간사」에서 밝힌 것처럼 관부연락선 위에서 “나는 아무리 해 봤자 조선인이로구나!”라고 두 번이나 탄식한 대목에서 저자는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과 임화의 시 〈현해탄〉을 겹쳐 읽으며 식민지 조선인이 겪어야 했던 소외감과 내면의 균열을 세밀하게 포착해 낸다.
김교신, 그는 누구인가?
김교신은 1901년 함흥에서 태어나 철들 무렵부터 식민지인으로 살았다. 1919년 함흥농업학교 재학 중 만세운동에 가담했고, 이듬해 도쿄로 건너가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21년부터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에게서 성서를 배웠다. 조선으로 돌아온 김교신은 1927년 7월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1942년 3월까지 15년간 간행하는 한편, 1927년부터 1940년까지 함흥 영생여학교와 양정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2년 3월 ‘〈성서조선〉 사건’으로 검거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고, 1944년 10월 흥남 일본질소비료공장에 들어가 조선인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하다 1945년 4월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지금, 다시 만나는 김교신
팔 남매의 아버지이자 교사로서 생업을 이어 가며 200명 내외의 구독자를 위해 매달 〈성서조선〉을 펴내는 일은 얼마나 수고로웠을까. 그는 한 달에 몇 번씩 밤을 새우고, 잡지를 발간하며 생기는 결손을 자신의 월급으로 메꾸어야 했다. 총독부와 인쇄소, 서점을 오가며 엄청난 굴욕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자전거로 집-학교-인쇄소를 활력 있게 내달리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식민지의 검열과 압박 속에서도 고독하게, 그러나 치열하게 시대를 마주한 언론인 김교신, 교사 김교신, 신앙인 김교신, 그리고 가장(家長) 김교신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이 모든 역할 가운데 “자신의 구원과 조선의 운명을 일치시키는 길”을 찾고자 했고, 그 길에서 “가장 사랑하는 조선에 가장 귀한 성서를 주는 일”을 사명으로 삼았다.
저자의 시선에 따라 책을 읽어 가다 보면 마침내 한 질문 앞에 맞닥뜨리게 된다. “평생을 식민지인으로 살면서 단 하루도 검열 없는 세상을 살아보지 못한 그가,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말은 무엇일까?”
교회주의에 갇혀 ‘교회 너머’를 잃어버린 오늘의 한국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김교신은 다시 성서로 돌아가 예수의 정신을 살아내라고, 헛된 삶에서 벗어나 ‘실한 인생’을 살라고 선포한다. 그의 이 외침은 제도와 형식 너머의 신앙, 창조 세계와 소통하며 숨 쉬는 열린 기독교, 곧 ‘전적(全的) 기독교’로 우리를 이끈다.
기독교가 조선 땅에 들어온 지 불과 40년이 지난 즈음, 성서를 삶으로 살아내고자 했던 한 식민지 청년의 외침이, 백 년의 세월을 지나 오늘의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다시 울려 퍼진다.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
김교신의 삶을 ‘문학적 전기’로 되살리다
《김교신, 백 년의 외침》은 근현대소설 연구자이자 경북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인 저자가, ‘한국의 기독교인 인문학자로 산다는 것’에 대한 고민과 정체성 속에서 맺은 첫 열매이다. 김교신의 삶을 시간순으로 기록하는 것을 넘어, 그가 남긴 텍스트-《성서조선》, 일기, 산문과 각종 기록들-를 문학적 시선으로 읽어 내어 김교신의 내면과 삶의 궤적을 입체화했다.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김교신을 ‘무교회자’로 불러왔다. 하지만 그가 거부한 것은 교회 자체가 아니라 ‘교회주의’였다. 제도와 형식에 갇힌 이들을 향해 성서의 자리, 예수 정신으로 살아내라고 했던 그의 외침은 이제 다시 한국 교회와 신앙인 안에서 공명한다. 저자는 이러한 김교신의 문제의식을 신앙적 차원에서 단선적으로 보지 않고, 교회 너머 인문주의자의 시선으로 읽어 낸다. 예를 들어, 김교신이 〈성서조선〉 「창간사」에서 밝힌 것처럼 관부연락선 위에서 “나는 아무리 해 봤자 조선인이로구나!”라고 두 번이나 탄식한 대목에서 저자는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과 임화의 시 〈현해탄〉을 겹쳐 읽으며 식민지 조선인이 겪어야 했던 소외감과 내면의 균열을 세밀하게 포착해 낸다.
김교신, 그는 누구인가?
김교신은 1901년 함흥에서 태어나 철들 무렵부터 식민지인으로 살았다. 1919년 함흥농업학교 재학 중 만세운동에 가담했고, 이듬해 도쿄로 건너가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21년부터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에게서 성서를 배웠다. 조선으로 돌아온 김교신은 1927년 7월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1942년 3월까지 15년간 간행하는 한편, 1927년부터 1940년까지 함흥 영생여학교와 양정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2년 3월 ‘〈성서조선〉 사건’으로 검거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고, 1944년 10월 흥남 일본질소비료공장에 들어가 조선인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하다 1945년 4월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지금, 다시 만나는 김교신
팔 남매의 아버지이자 교사로서 생업을 이어 가며 200명 내외의 구독자를 위해 매달 〈성서조선〉을 펴내는 일은 얼마나 수고로웠을까. 그는 한 달에 몇 번씩 밤을 새우고, 잡지를 발간하며 생기는 결손을 자신의 월급으로 메꾸어야 했다. 총독부와 인쇄소, 서점을 오가며 엄청난 굴욕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자전거로 집-학교-인쇄소를 활력 있게 내달리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식민지의 검열과 압박 속에서도 고독하게, 그러나 치열하게 시대를 마주한 언론인 김교신, 교사 김교신, 신앙인 김교신, 그리고 가장(家長) 김교신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이 모든 역할 가운데 “자신의 구원과 조선의 운명을 일치시키는 길”을 찾고자 했고, 그 길에서 “가장 사랑하는 조선에 가장 귀한 성서를 주는 일”을 사명으로 삼았다.
저자의 시선에 따라 책을 읽어 가다 보면 마침내 한 질문 앞에 맞닥뜨리게 된다. “평생을 식민지인으로 살면서 단 하루도 검열 없는 세상을 살아보지 못한 그가,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말은 무엇일까?”
교회주의에 갇혀 ‘교회 너머’를 잃어버린 오늘의 한국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김교신은 다시 성서로 돌아가 예수의 정신을 살아내라고, 헛된 삶에서 벗어나 ‘실한 인생’을 살라고 선포한다. 그의 이 외침은 제도와 형식 너머의 신앙, 창조 세계와 소통하며 숨 쉬는 열린 기독교, 곧 ‘전적(全的) 기독교’로 우리를 이끈다.
김교신, 백 년의 외침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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