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파일럿

오토파일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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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자유로운 언어의 활주를 꿈꾸는 시인, 박술의 첫 시집 『오토파일럿』이 아침달 시집 47번째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이중언어자의 삶을 통해 자기만의 언어를 찾고 갱신하며 오랜 기간 투쟁으로 쌓아온 시 40편을 내놓았다. 이번 첫 시집에서는 국경을 마음대로 건너뛰면서도 무중력 상태를 바라는 여러 나라의 언어가 혼재한다. 활달하게 뛰노는 언어의 변주가 낯선 이미지들을 결합하며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그동안 주로 번역과 철학에 몰입했던 시인은 시를 통해 줄곧 도구적 성질이나 축약된 의미로 제한되곤 했던 언어의 한계를 깨부순다. 세계의 심연을 들추려는 의지, 서로 다른 두 언어가 하나의 축을 이루어 열린 미래로 나아가는 꿈, 현실과 대항하여 관측된 세계 그 이상으로 넓어지면서 일구는 비정형의 토양. 이러한 모든 행위와 표현으로 무한한 가능 세계를 담아내는 시인은 언어를 곧 존재 그 자체로 인식한다. 시 쓰기는 존재론을 펼치는 일이자 존재 양태를 최대치로 늘리는 일이다.

발문을 쓴 김혜순 시인의 말처럼, 이 시집엔 “지정학을 몸으로 앓는 화자”(「불꽃과 망치」)들이 다양한 장소에 머물면서 시인이 감지하는 위태로운 언어적 경계가 있고, “자유 연상의 행로”를 따라 방향 감각을 소실하면서 탄생하는 타자와 공간이 있다. “언어가 살이고 피인 시인, 풍경이고 감각이며, 존재론인 시인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이번 시집은 시인의 첫 발걸음이면서도 그 한 발을 떼기까지 겪었을 길고 지난한 중력의 세월에 저항하는 존재적 해방에 관한 탐구다.
저자

박술

2012년『시와반시』신인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
한국어와독일어로시와산문을쓴다.
횔덜린,노발리스,트라클의시집을한국어로옮겼고,
김혜순『죽음의자서전』을독일어로번역했다.
현재힐데스하임대학교에서철학을가르치고있다.

목차

1부

란스Lans15
쟤네말17
무성19
도움닫기없이날기21
늦은착륙23
페를라흐Perlach24
이프릿트26
귀국28
러브29
나무가모르는것들31
도플갱어떼어놓기32
있기34
Åhus35
강GANG37
총몸39
혈색41
다시일어나는자리42
숄덴143
숄덴245
프로메테우스47
휘어진빛49
백색왜성51
밤52
천일54
언어에관하여55
목성56
흑림258
흑림159
열한번째여름60
마찰62
횔덜린변주곡464
횔덜린변주곡665
비트겐슈타인66
바실리카타여행기71
meday74
생일75
윤회76
팔이야기78
섬79

2부

망치의방83

산문

무중력의글쓰기127

발문

불꽃과망치-김혜순141

출판사 서평

무중력화음을빚는감각으로
언어의경계를깨뜨리는시쓰기

프리드리히횔덜린,노발리스,게오르크트라클등독일작가의시집을번역했을뿐만아니라최근시인김혜순의『죽음의자서전』을독일어로옮기고소개해번역가로서한국문학과독일문학을이어오던박술이시인으로활동한이후13년만에첫시집으로우리곁을찾아왔다.2012년『시와반시』신인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한시인박술은이번첫시집『오토파일럿』에한국어와독일어사이를오가며겪었던이중언어자의삶과혼란을복잡한형상그자체로담아내었다.시집은총2부구성으로,1부는시인이지금까지써온시들과여러국가의언어로혼합된시들이배치되었고2부는밀도높은철학적사유를자동기술법글쓰기로다룬장시「망치의방」한편이그거대한몸짓을드러낸다.또한시인이시를쓰면서느꼈던감각과고민을개인의삶에비추어솔직하게담은산문「무중력의글쓰기」가함께담겼다.
“나는우리나라에서이시집만큼여러언어를몸으로체득해감각화하는시집을본적이없다”는시인김혜순의찬사를받은이번시집에서시인은언어가고정되지않고대기에자유롭게부유하는성질을담아독특한언어적실험을담은시편을전개한다.고등학교를자퇴하고독일로떠난시인은한국어와독일어를오가며이방인으로서겪은삶의감각을시와산문에녹여낸다.한국어는시인의모국어이지만주로생활하고말하는언어가독일어라면그의위치는과연어느자리에확정해야할까.시인은이질문에대한답을거부하려는듯이초반부터여러나라의언어를사용하며시를쓴다.독일어로먼저쓰고한국어로옮긴시「나무가모르는것들」은한국어전문에각주를달아독일어로옮겼고,한국어와독일어를번갈아가며쓴시「무성」과「도움닫기없이날기」는“못움직이기”나“여기말로움직이지못하기”같은표현처럼“경계의언어(Grenzsprache)”를넘나들며위치를확정하지못하고그사이에서마치암석처럼행위가단단히굳어버리는형상에접미사‘기’를붙여언어마저도명사화한다.이같은발화법은혈액이응고되어출혈을방지하고필요한영양소와산소를공급하는것과도같아이중언어자로서느꼈을상처들을부위마다지혈한다.
이처럼어린시절부터독일에서공부한시간이그에게있어단순히이중언어자의삶이라는의미에만그치지않고,모국어와외국어의경계가모호해지는‘성간우주(Interstellar)’속에서무중력의자세로붕떠오를수밖에없는세계의형태를전유한다.고정된속성에서벗어날때들리는‘무중력화음’은시인이간절히원하는“망치의방”에들어서는순간“크레바스”처럼바닥에균열이생기는순간에만발생한다.하지만시인은균열이또다른경계의시작점이라는사실또한잘알고있다.시인의언어를빌려말하자면,“볼품없는언어의화자”(「이프릿트」)인자들이“아무도원하지않는자리”(「다시일어나는자리」)이자“있던것이없어진자리”(「횔덜린변주곡6」)다.


절대적타자를향한자율주행
물이다빠진수영장에서펼치는자맥질

1부에수록된39편의시를다통과하고2부로넘어가면남은시는단한편뿐이다.분량이무려원고지100매에해당하는장시「망치의방」은영국에서활동하고있는예술가최자윤이그린두장의어두운삽화가문을여닫는다.음악기호(#,♭)로구분된연은그자체로하나의음악이되어시인의유년을주조음으로삼는다.시인이번역했던철학자중프리드리히니체가소위‘망치를든철학자’라고불리듯,시인이망치를부르는것또한시속에서분절되는이미지감각과혼용되는언어를“구분”하려는태도에균열을내기위함이라고할수있다.“물속에거꾸로떠서수면으로떨어지는빗방울들을바라보”는장면으로한시절을떠올리는시인은어느정원의주택앞에놓인“수영장”을주요공간으로삼아“수영장의물맛”부터시작해서물이다빠지고레미콘이수영장을시멘트로메우는날까지의시간을총체적으로그린다.발문에따르면“장소에붙은언어의지리학”(「불꽃과망치」)을몸의감각으로펼치는것이다.이시는말그대로“모니터앞에서입을반쯤벌리고다가닥,다가닥,말을달리며쓴거품같은텍스트”(「무중력의글쓰기」)다.
물속에있으면물의호위를받아소리가마음대로귓속을침범하는상황에서해방될수있다.물은그어떤언어가들어와도공평하게흘려보낸다.물속에서는모든언어가직위를박탈당하고기포를내뿜으며“눈이떨어진채로진실을웅얼거”(「흑림1」)릴뿐이다.무중력언어를꿈꾸는시인이이주민으로서느끼는현실에침잠할때마다대체하는힘으로부력을택한이유가바로여기에있다.철학자와번역자로살면서계속의미를건져내려는삶에지쳤을시인에게수영장이란맑고아름다웠던유년의한부분을떠올릴수있는공간이었을테고,서두에인용한파울첼란의시「물과불WasserundFeuer」에서말하는“쏟아지는불길”을“숲”과달리피할수있는유일한도피처였을테니말이다.반면수영장은사물과현상의부패를바라볼수있는공간이기도하다.“흐르는것은멈추고,멈추는것은썩는다.지금은멈추지않더라도언젠가는멈춘다.”이는비단물의속성만이아니라언어의속성에도해당한다.언어는문장이라는물결에기대영원히흐르기를바라면서도온점에부딪혀정지하는순간을마주하기도한다.이처럼「망치의방」에서수영장이주요무대일수밖에없는이유는경계가뭉그러지는시공간이기때문이다.‘모국어/외국어’,‘삶/죽음’,‘물/불’,‘나/너’등이항대립적인구분에지친언어가지향하는곳은바로물속처럼형상을일그러뜨리고소리를차단할수있는공간인셈이다.시인은물이다빠진수영장에서도살려달라고자맥질하는존재다.시인의의식에는아직범람하는언어로가득하며세계를견디는몸이있는한모두의구원과화해를이룬세상을위해이우스꽝스러운행동을멈추지않는다.
이번시집에서는두가지의도드라지는특징이있다.하나는‘너’를절대적타자로삼아지향하고도달하고자하는이상향으로삼는다는점이다.여기서말하는‘너’는얼핏단순하게읽으면연인관계처럼보일수있으나시들을천천히음미하면그의미가갈수록확장된다는감각을점진적으로느낄수있다.특히「망치의방」에서‘너’는폭발적인언어와함께다시태어난다.“망치로허공을쳐서”‘너’를깎아새로형상화한다.‘너’는곧사랑하는사람,언어이자세계,또다른나등으로다양하게변주된다.언어를미워했던시간만큼언어를다시믿어보는태도는어떤절대적타자를향해나아간다.그것이“언뜻발견한아늑한공동”(「바실리카타여행기」)일지라도함께했다는과거만큼은다시한번용기내어불러보고싶은영원한위안으로남는다.
나머지하나는둘이상의다른언어를‘동시표기’한다는점이다.「란스Lans」「페를라흐Perlach」「강GANG」과같이제목에서부터한국어와독일어가동시표기되기도하고「도움닫기없이날기」「나무가모르는것들」「Åhus」「다시일어나는자리」에서히브리어,라틴어,안달루시아어등낯선말을함께다루기도한다.시적언어를구사할때이처럼수많은언어가한꺼번에떠오르는것은시인,번역가,철학자로동시존재하는자신을드러내는방식으로작용된다.
이번시집은언어적혼재속에서느꼈을호흡곤란을자기만의숨으로극복한놀라운고투의흔적이다.수시로의도와의미가어긋나는발화를경험해본적있는독자라면시인박술의첫시집이오해가빈번한세상의작은증거가되리라믿는다.그렇게자신의언어를되찾으려는방법중하나로제안되는것이바로언어의‘자율주행’이다.말하자면언어는의미도형태도고정되지않은채그저여러양태로운동한다는점이고,바로그러한언어의유동성이언어에게자유를꿈꾸도록하며,어느순간부터언어에는“오토파일럿”이작동돼인간의조작이나개입없이세계를누빌수있게된다.시집말미에다다르자말한다.“손을키보드에서뗀다.여기부터는오토파일럿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