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기억 연습 (임승유 산문집)

텍스트 기억 연습 (임승유 산문집)

$18.00
Description
정형이라고 믿어온 이야기들을 의심하고 여백을 심어 세계와의 긴장을 독특한 감각으로 열어젖히는 시인 임승유의 산문집 『텍스트 기억 연습』이 아침달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책은 2011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이 펴내는 첫 산문집이다. 그동안 네 권의 시집을 통과하면서 시인이 고민하고 천착해온 ‘여성 발화의 위치’가 구체적인 장면들로 그려져 있다. 생생히 끄집어내기 두려웠던 유년의 조각들을 주워섬기며 파편적 발화들을 기억에 맞추는 과정은 시인이 시를 쓰기 위해 고민했던 문장들이 그의 시 세계에 발아한 씨앗일 수 있었던 시간을 고스란히 증명한다.

총 4부로 구성한 이 책이 우리에게 건네는 키워드는 ‘장면’ ‘사물’ ‘소설’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말하기 위해 기꺼이 비극적인 유년의 한 장면에서 출발한다. 시인은 자기 연민을 거부하고 그저 자신의 삶을 구성해온 장면들을 열거한다. 여기에는 오로지 사실만 있으며 점점 구체적인 형태로 나아가는 이야기들은 시인이 과거를 들여다보는 방식이 아니라 기억 그 자체가 텍스트를 연습하는 방식으로 쓰인다. 명징한 세계로서의 사물은 기억이 연습하는 텍스트에 생생한 이미지로 작용한다. 소설가를 사랑하는 시인이 꾸준히 읽은 소설들은 도리어 그의 시와 삶을 더욱 밝혀준다. 그렇게 시인은 다시 사람에게 돌아온다. 많은 사람을 말하는 일이 단 한 사람을 말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임승유의 산문이 지금 우리에게 귀한 이유다. 이 네 가지 단어는 임승유라는 세계를 간결하게 조합하기에 필수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독보적인 개성을 지닌 문체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임승유의 기억은 지금도 자유롭게 문장을 연습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이 보여주는 꾸밈없는 발화 감각에 매료되어 어느덧 자신의 기억까지 새로운 텍스트를 쓰게 될 것이다.
저자

임승유

2011년《문학과사회》에「계속웃어라」외4편을발표하면서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으로『아이를낳았지나갖고는부족할까봐』『그밖의어떤것』『나는겨울로왔고너는여름에있었다』『생명력전개』가있다.김준성문학상,현대문학상을수상했다.

목차

프롤로그미원

1부장면

열거법1
전미래
빨래
식물들


2부사물

우산걱정
집에서입는옷
좋은기억
연필을주워서
손수건사용
맥주를안마시다
구례,구례
겨울꿈

3부소설

협소한세계
소설문장
잘지내고있어
열거법2
반복이지만괜찮아
빛,그늘
넌이름이뭐야?
뭔가가되어야겠다는생각을하지않아도된다면,아마도그게가장좋을텐데

4부사람

계절기억
물질과잠
살리는반복
마음에드는문장
어느정도거짓
우리에게일어나는일
나만알고지내는사람

에필로그남겨놓은것

출판사 서평

“너는얼마큼변했다가다시제자리로돌아갔을까.”
섬세한언어로이야기의여백을여는
시인임승유의첫산문집


선명하되바로잡히지는않는,불투명한미래를가장뚜렷하고섬세한언어로이야기를열어젖혀세계와의긴장을독특한여백으로구성하는시인임승유의첫산문집『텍스트기억연습』이아침달에서출간되었다.2011년《문학과사회》를통해작품활동을시작한시인이14년만에처음펴내는산문집에는그동안시인이침투했던시세계와삶이더욱생생하고구체적인이야기로담겨있다.오랜시간을머금고비로소태어난이번책은시인이시를통해줄곧반복해왔던여성인물들의이야기를더깊이따라가볼수있도록길을열어주고시인이살았던동네에서있었던일과만난사람들을담담히보여준다.
임승유의산문은그의시와도닮은점이많다.오랜시간동안시인의시를쭉따라읽어온독자라면이번산문집을매우반가운마음으로품을것이다.임승유가쓴시들이어떤경로를통해우리곁에찾아왔는지산문을통해좀더확실한기원을획득할수있기때문이다.하지만시인의산문이독창적인지점은다른데있다.그는보통산문이한개인의삶을보여주고증명할수있는글쓰기라는점을가뿐히벗어난다.이것이가능한이유는나자신이장면을기억하기위해텍스트를쓰는방식이아니라문장이먼저쓰이는순간부터기억이텍스트를연습하는방식으로글이쓰였기때문이다.즉,임승유시인이펼치는산문의세계는개인의삶을담보하지만,엄밀히말해기억이삶을다시쓰는형태로새롭게직조된다.
시인에게현실은무수한빈틈으로가득하다.시인은늘이러한현실에위화감을느끼며쓰는존재로살아왔다.그의시가행과행사이는적절한간격을유지하면서도연과연사이는은근히멀듯,산문에서도마찬가지의태도를취한다.그는자신이한때놓였던장소를호출할때‘추체험’하는방식으로서술하지않는다.대신“얼마전에미원에갔다가내가누굴만났는지아니?”(프롤로그「미원」)처럼엄마가말한적없는말을부러꺼내거나“여자애에대해뭔가를쓰게된다면열거법으로써야지”(「열거법1」)하는생각을해오며장면의세부로접근하지않고이야기가다소붕뜨는문장으로출발한다.임승유는이를‘연습’이라칭하는데,왜냐하면그에게텍스트는언제나“현실을초과해상상해낸것들”(「잘지내고있어」)이기에,시인자신은언제나문장을통해현실을뒤늦게감지할뿐이므로나중에는기억이주체가되어한때잃어버렸던과거의장면들을구출해보는것이다.시인은자신이만드는여백에대해다음과같이말한다.“보폭이큰문장을만들어여백을만들려고했다.그여백에무엇이있을지상상하는건나중의일이되게.”(「빨래」)
임승유는자신의이야기를대체로뭉뚱그려말한다.이덩어리들은이야기의구체성을방해하는것이아니라현실에필연적으로기입되는여백이공간을이루어문장이장면을묘사하는도구임을거부하고기억보다멀리,다른길로나아가는발걸음임을보여준다.


장면에서출발해사람에게도착하는
독특한보폭의열거법

이번산문집에서임승유시인이가장길게공들여말하고있는장면은유년의조각들이다.첫시집『아이를낳았지나갖고는부족할까봐』에수록된첫시「모자의효과」는“친척집에다녀와라”라는첫문장으로시작한다.이말은고스란히시인의유년과맞닿는다.친척집에살면서친척아주머니가빨라고건넨남자형제의운동화를빨러수돗가에가쭈그려앉아비누칠을한경험은여성이라는존재의발화위치가평소어디에있었는지직접적으로알수있게해주는대목이다.임승유에게유년이란‘여자아이’말하기를반복해수행해왔던배경이자근거,문장으로나마간신히닿아볼수있는낯선장소다.시인은두려워들어가보지못한‘집’을말하는것으로이책을시작한다.외면하고싶었던아버지의죽음에서출발해야만기억속“두고온나”(「나만알고지내는사람」)를구해올수있다.
시인은자신의삶을꺼내보기위해네가지키워드를독자앞에내놓는다.총4부구성인이번책은각각‘장면’‘사물’‘소설’‘사람’을말한다.1부‘장면’은주로유년에관한이야기로,아버지의죽음으로시작하는이야기가엄마가집을나간이야기로이어지고,엄마가집을나가기전함께개울가에가서엄마가달빛을받으며빨래하던기억과돌아다녔던수많은집을소환한다.실제로식물을좋아하고키우는시인의삶과닿은「식물들」에서는말없이성장하는식물의결기를통해삶을폭넓게사유한다.2부‘사물’에서는만나기로한사람을만나지않고놓고온우산부터옷,신발,연필,손수건,맥주등일상에서친화적인사물들과함께만든이야기들이소개된다.시인에게사물은“사람에게도달하기위한수단”(「어느정도거짓」)이된다.3부‘소설’은시인이즐겨읽던소설을포함해삶을더나아가게감싸주었던여러텍스트가소개되면서시인이사유해온글쓰기감각이전면적으로나타난다.이부분에서특히시인은‘문장’에대한깊은이해와생각을표출한다.시인에게는무언가를반복한다는감각이매우중요하다.“어떻게든잘해보자고뭔가를반복한다.반복할형식을만들어낸다.”(「반복이지만괜찮아」)일찍이시인이원했듯그의두번째시집『그밖의어떤것』에수록된산문「뼈만남았다」마지막문장으로“장소는무한히반복됐으면좋겠다”고말한바있는데,이를통해그는자신이살았던장소들을계속반복하는형식으로삶을이어나가면서무한한반복의굴레에빠질수밖에없는기억에기꺼이문장을바친다.4부‘사람’에서는사물을거쳐비로소사람에게로돌아온시인자신의내면을비추는글로구성되어있다.한번쯤길게말하고싶었을‘엄마’라는불가사의한존재에대해“어느정도거짓”을섞어기억을옮겨적고,“너”라고호명하면서나자신에게온전히닿으려는노력등이있다.
장면에서출발해사람에게도착하는이번산문집이주로사용하는수사법은‘열거법’이다.시인에의하면열거법은“구멍에빠지지않는방법중하나”다.임승유는자신이처했던장면들에대해세세히적어나가는대신,그저있었던일들을있었던채로나열한다.열거법은문장에속도감을부여하며“정색하지않는기교”(「열거법2」)이기때문에같은위계의대상들이나열되다가도어느순간다른차원의대상이나란히놓이면서극적으로국면을전환한다.이것은임승유가영민한감각으로내딛는보폭이며반복되는삶의장면이“상황에서언어로도망치기에좋은”도주로다.
임승유에게기억이란“그장면으로바로들어갈수는없”는것이다.무언가를기억하려면사후적인문장들이필요하다.그래서시인은문장으로먼저시작한다.“언니너그거갖고가지마라.”“바세린이어디있지?”“그건참좋은기억이네요.”“꽃을꺾었다.”같은문장들은기억보다먼저앞장서서장면에놓였던인물들을찾아간다.시인이떠올리는말들이자주기울여진까닭은얼마쯤위태로운기울기로넘어지기직전인상태를뜻할수도있지만,그말들이조금은쉴수있도록곁을지켜주는기억들이있어야할“제자리”(「나만알고지내는사람」)를드러내기위함일수도있다.그렇기에임승유는기억을의심하는자가아니다.임승유는기억이텍스트를연습할수있도록스스로백지이자여백이되는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