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 작가기획시선 35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 작가기획시선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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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싸늘한 눈빛이 어제를 돌아 나올 때
모른 척 낯선 얼굴로 너는 또 문을 민다
가람시조문학상신인상, 오늘의시조시인상, 제20회 고산문학대상 등을 수상하며 왕성한 시조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송희 시인이 새 시집 『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를 작가 기획시선 Sijo Collections 35번으로 출간하였다.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송희 시인은 시집 『환절기의 판화』 『아포리아 숲』 『이름의 고고학』 『이태리 면사무소』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대명사들』이 있으며, 평론집 『아달린의 방』 『길 위의 문장』 『경계의 시학』 『거울과 응시』 『유목의 서사』, 연구서 『현대시와 인지시학』, 그 외 저서로 『눈물로 읽는 사서함』 등이 있다. .
저자

이송희

저자:이송희
2003년조선일보신춘문예로등단하였고,《열린시학》등에평론을쓰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환절기의판화』『아포리아숲』『이름의고고학』『이태리면사무소』『수많은당신들앞에또다른당신이되어』『대명사들』이있으며,평론집『아달린의방』『길위의문장』『경계의시학』『거울과응시』『유목의서사』,연구서『현대시와인지시학』,그외저서로『눈물로읽는사서함』등이있다.가람시조문학상신인상,오늘의시조시인상,제20회고산문학대상등을수상했으며,전남대학교에서학생들을가르치고있다.

목차


시인의말

제1부
거울을표절하다13
배꼽의둘레14
환승의시간16
연관검색어18
더어두워지기전에19
일기속우기20
몽유21
꽃꽂이22
굳어간다는것은23
철길위의시간24
회전문25
어떤종점26
이사27
흘러내리는기억28
해변으로가요30
청소31
풍선32

제2부
보수동책방골목35
염색36
다시,극락강역38
우리는안녕39
생일을축하해40
다시,바다의시간42
왕비이야기43
거리두기44
블랙아웃45
폭설의형태46
비의감정47
미끄럼틀을타다48
겨울비50
어떤가족52
이상기후54
창56

제3부
서랍의시간59
삭제되다60
액자식구성61
블루스크린62
떠도는거울63
테이크아웃해주세요64
백지의이면66
업데이트67
엔딩크레딧68
당신은섬처럼70
금간꽃병71
분리수거72
겨울의환73
모자이크74
AI쇼핑76

제4부
어떤동거79
스토킹80
그림자노동81
프레임82
편집의방식83
일인칭84
서로이웃85
우리사이86
유튜브바로가기87
화이트아웃88
가스라이팅89
커튼콜90
리모델링중입니다91
주말부부클리닉92
겨울의부조93
그녀의옆집94

해설/경쾌한언어로적은주관적인기억_이정현98

출판사 서평

이번에펴낸이송희시집『내말을밀고가면너의말이따라오고』는모두4부로나뉘어져총64편의시조로구성되었다.그는시인의말에서“세상을바꿀수없다면/마음을물들이고싶다”고말한다.“시는내게다리같고,/낡은책같고,/지울수없는염료같다”는고백이야말로시인의삶과시쓰기가결코떼어놓을수없는일체(一體)임을증명한다.

이번신작시집『내말을밀고가면너의말이따라오고』에서도시적화자는어떤대상을응시하며주관적인기억을되살리는작업을반복하며시를쓴다.눈에들어온사물과풍경은모두화자의개인적인기억을자극하는매개체가된다.‘배꼽’은“내울음의뿌리”(「배꼽의둘레」)가되고,내리는비를보면서돌아가신아버지(「일기속우기」)를떠올린다.‘몽유병’은“네이름썼다지운자리”(「몽유」)로명명된다.화자는‘꽃꽂이’를하면서“당신의젖은혀를단숨에자른다/피투성이잘린말이조각조각쌓인”(「꽃꽂이」)다고적는다.화자의주관을통과하면서사물과풍경들이상기하게만드는것은‘나’와끝내함께할수없었던‘당신’과의추억이다.그리고화자는철길위에서읊조린다.마치철길처럼,지금‘나’와당신은일정한간격을유지하고있다.그간격은좁혀지지않는다.

우리는약속처럼간격을유지했다
같은곳을향하여꿈꾸는
은빛창문
적당히바람이불고
그리움도덜컹거려
─「철길위의시간」부분

관념을경유하지않는동물들의언어는명쾌하다.‘나’가자신의감정을파악했을때는이미당신은내곁에없다.세상에같은사람은없다.누구와도같지않으므로,당신은‘나’를오래도록아프게한다.연인들은끊임없이사랑을속삭이지만,그관계와사랑의의미를이별이후에알게된다.언어는유예된시간의무게를감당하지못한다.기억은“낯선방문객”(「스토킹」)처럼느닷없이엄습하고,은밀히편집된다.지리멸렬한생에활력을불어넣다가도짙은무력감을선사한다.시간은속절없이흐르고,그리운사람이내곁에없다는사실만뚜렷해진다.“기억은돌아갈수없는,나를불러세”(「흘러내리는기억」)우고,현실의결락감을채우는동력이된다.

시는돌이킬수없는시간에갇혀“색을잃은감정”(「이사」)들을새롭게채색한다.그러나고통과아쉬움은역설적으로남은생을버티는힘이된다.“시간이저문뒤에야보이는자화상”(「꽃꽂이」)을마주하지않는다면,그건아마도무언의약속조차없는무미건조한삶일것이다.‘이사’는말그대로거주지를옮기는일이지만,시인은이사가는풍경을'기억',혹은'삶'의특징과겹쳐놓는다.지나간시절에는“지나간사랑”이있고,“추웠던계절”이있지만,그것들은분리수거가되지않는다.“자꾸만어긋나서들썩이는세간”처럼‘나’의육신도세월이지날수록낡아갈것이다.세월이지난기억이흐릿해지면서우리는서서히언어를상실한다.

사람은사랑에서비롯된슬픔을통과하면서타인을이해하게된다.“사랑하는자아는사랑의대상에게자신을내어줌으로써확대”(지그문트바우만)된다.세계의곳곳이비장소로채워질수록그런감정들은의미를잃는다.그러면서'관계'의의미도재정립된다.지금-여기의세계에서는‘관계’대신‘네트워크’라는말을선호한다.‘네트워크’란곧연결하는동시에연결을끊을수있는망(matrix)을의미한다.네트워크속에서연결하기와연결끊기는동등하게적법한선택이며,동일한지위를누린다.‘연결’은곧‘가상적관계’다.장기적인헌신은구차한것으로치부된다.시인은「서로이웃」에서이'연결'의허망함을담담한어투로적는다.

문앞의택배상자엔강아지사료뿐
벨을힘껏눌러도반응이없더군요
일면식한번도없는달력이넘어가요
어디선가흘러나온아나운서일기예보
내일의날씨는구름가끔,흐리다네요
여전히모르는얼굴이이웃추가돼있네요
─「서로이웃」부문

층간소음,분리수거,흡연,애완견등으로인한갈등외에는이웃들이서로관심을끊은풍경을담은시다.마지막연에서시인은'서로이웃'이라는네트워크를언급한다.그래도현실의이웃은복도에서,분리수거장에서,엘리베이터에서마주치고,소음으로서로의존재를인식하고살아간다.그러나블로그(blog)의‘서로이웃’은좀다르다.상대를‘이웃’으로설정하면서도서로의실체를모르는경우도많다.‘눈팅’을하다가가볍고무책임한댓글을작성한다.그러다가상대가업로드한내용이불편하거나지겨우면클릭한번으로관계를끊는다.자판을치는횟수를줄이고강렬한느낌전달을위해고안한각종줄임말과신조어,이모티콘등이대화를대체한다.무겁고더디고너저분하고느려터진‘현실의관계’와는달리가상적관계는훨씬말쑥하고깔끔하고‘사용자친화적’이다.

슬픔을예약했어요/다음주토요일로
울고싶은날이죠/취소는안된대요
실연의주인공을따라/한강변으로갈게요
추가된옵션으로웃음을구매하면/자동으로당신도업데이트될거래요
또다른감정들을모아/장바구니에담아둬요
─「AI쇼핑」전문

가상적관계는다른모든관계들을몰아낸다.이관계에서는헌신이무의미해진다.원할때관계를쉽게끊을수있게해주는장치들은우리의불안을덜어주지못한다.네트워크안에서사람들은“모르는당신을향해환하게웃”고,“검색창을뒤적이며/길고짧은댓글에내몸을끼워맞춘”(「유투브바로가기」)다.코로나19팬데믹을계기로단절과‘거리두기’에적응한사람들은더욱쉽게네트워크에길들여진다.“마스크를쓴입들이떠다”(「왕비이야기」)는풍경에서사람들은서로의얼굴을보지않는다.코로나19이후아동들의언어습득능력은현저히저하되었다.사람의입모양을보지못하기때문이다.유년시절부터스마트폰과컴퓨터자판에익숙해진그들은서서히“누구도꺼내지못한거울”에갇힌다.

내게서격리된내가허물을벗고있다
손과발이묶이고입마저가려진채
누구도꺼내지못한거울속에갇힌다
침묵이고인식탁,홀로씹고삼킨말은
소화되지못한채구석에쌓인다
베란다화분속에는불안이자란다
─「거리두기」부분

시인은“흐릿해진문장을손끝으로짚어가며”(「블랙아웃」)주관적인기록을멈추지않는다.그기록은지금의세계와도무지어울리지않는다.비장소와네트워크로구성된세계에서도여전히시를쓰는이유는자명하다.삶의상투성에투항한다면‘나’가당신을기억하는행위는공허한반복에불과하다.고유한고독을포기한다면,‘나’는비장소에갇혀버릴지도모른다.네트워크의세계에안주한다면‘나’는누군가를쉽게판단하고규정하게되리라.자멸적인나르시시즘으로가득한언어를편리하다고느낀다면‘나’의언어도그와닮아갈것이다.시인은“뭉개진나를꺼내”어“기억을두드리”면서쓴다.시집에나열된짧고간결한시들은혐오가만연한세계에서시인이작성한‘댓글’과도같다.

귓속에맴도는말이/모래알로흘러내린다.
뭉크의절규를저벅저벅걸었다
허방에헛디디고늪지에빠진발
경계가지워진곳에/덩그러니몸만남아
하얗게물든밤과캄캄한낮의시간
그속에갇혀서제자리만맴돌던,
뭉개진나를꺼내어/기억을두드린다
─「화이트아웃」전문

이정현문학평론는“발랄한시들을읽으면서희미한슬픔을느끼게되는건생의필연적인‘어긋남’에서비롯된것이다.‘나’의기억은당신을붙들지못하고,이세계의질주를멈추지못한다.그사실을알면서도살아가야만하는자의슬픔.그것이생의비애”라고평한다.
그래서일까.시인은이순간어둠속에서도발랄한영혼의시를쓴다.시인은그것만이남루한생을위로할방법이라는사실을믿고있는것만같다.또한시인이몸과영혼이숨을쉬며시를쓰는이유일것이다.

시인의말

세상을바꿀수없다면
마음을물들이고싶다.

사랑의빛으로세상을품는
사람을기억한다.

시는내게다리같고,
낡은책같고,
지울수없는염료같다.

-2024년10월,이송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