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환승역 - 한국디카시 대표시선 25

바람의 환승역 - 한국디카시 대표시선 25

$15.00
저자

심미경

저자:신미경
1967년에태어나오랜기간서예가로살아왔으며10여년사진작업을하다2024년계간《디카시》첫신인우수작품상으로등단하였다.대구교육대학을졸업하고교사로재직중이다.

목차

시인의말

제1부꽃의이유
꽃의이유·14
투명한흉터·16
늪·18
화두·20
뮤즈·22
슬픈날개·24
목련종·26
바람의환승역·28
탑·30
구름종(雲磬)·32
한생각·34
눈부신순간·36
길을쓰다·38
종점에서다·40
화족(花足)화가·42

제2부낙화소나타
술요일·46
바람의역할·48
낙화소나타·50
증인·52
봄을쓸다·54
마이족(馬耳族)·56
툭·58
2월의나비·60
천마와노닐다·62
시간의파편·64
골다공증·66
높은음자리·68
세레나데·70
별의내력·72
몸살·74

제3부인연의강
생의노래·78
그리움의얼굴·80
인연의강·82
사랑은처음이라·84
쓸쓸한공전·86
외사랑·88
기억의물결·90
마음의크기·92
씨앗의은유·94
엄마·96
시간의벽·98
여정·100
스케줄·102
추석달·104
풍장·106

제4부천국의계단
박제된시간·110
시간의조각·112
눈물·114
난산(難産)·116
구름을쏘다·118
키포인트·120
사라진길·122
정차·124
천국의계단·126
코리안드림·128
하늘계단·130
여고동창회·132
숯·134
가슴을쓸다·136
엔딩크레딧·138

해설/정동하는몸들의아름다움_오민석·140

출판사 서평

꼭쓸어야한다면
너그리워흘린연분홍눈물을쓸겠네

온전히지워다음봄이새봄이되도록
-「봄을쓸다」

시인은사진속의떨어진꽃잎들을“너그리워흘린연분홍눈물”이라부른다.죽은사물을이렇게몸속에각인된슬픔으로건드릴때사물은정동되고,멈춰있던영사기가다시돌아가듯살아움직이기시작한다.신미경의디카시는이렇게정지된사진(스틸컷)을움직이는영상(동영상)으로바꿔놓는독특한기술을보여준다.“온전히지워다음봄이새봄이되도록”봄을쓸겠다는문장은마치강력한프로펠러처럼꽃잎들을더욱활발한가속운동의공간으로내몬다.

나는출렁이고너는단호해서
슬픔이생겨났다

지우고뭉갠덩어리하나
목구멍을역류한다
-「그리움의얼굴」

출렁이는“나”와단호한“너”는사장된물건이아니라살아있는두개의몸이다.이들이살아있지않다면부딪힌다고정동이발생하지않는다.‘나’는출렁이는정동을,‘너’는단호한정동을가지고있다.이렇게움직이는두개의‘몸’이부딪힐때그접선(tangent)에서정동의새로운“덩어리”가생겨난다.“슬픔”은이렇게생겨난새로운강도의정동이다.정동은단한순간도멈춰있지않고계속움직인다.그것은속도와방향을가진감성이며움직이는몸의신호이다.“지우고뭉갠”덩어리엔내장의깊은고통이고여있다.두개의몸이부딪힐때,그슬픔이“목구멍을역류한다”.제목(「그리움의얼굴」)처럼화자는그렇게지워지고뭉개진“덩어리하나”를뼈아프게그리워하고있다.화자의“그리움”속에,단단한구조물과계속부딪히는파도소리가울려퍼진다.그리움도움직인다.멈춰있는몸은없다.
이처럼신미경시인은죽은표피를건드리지않는다.그녀는마른표피아래에서늘생성하고변화하는몸의움직임을주목한다.그녀의시선은잔잔한수면아래의거대한물살처럼,말라붙은표피밑에서움직이는욕망과감성의덩어리들을놓치지않는다.같은강물에두번몸을담글수없는것처럼,신미경에게새롭지않은정동이란없다.정동은움직이는정서이며끊임없이생성하는욕망의벡터이다.그녀는죽음을가장한세계를휘저어깨운다.엘리엇(T.S.Eliot)의“4월”처럼신미경은“추억과욕망을뒤섞고,잠든뿌리를봄비로깨운다.”그녀에게몸은정동의기억이저장되는장소이고다른정동을만나주름을만드는공간이며계속해서새로운정동으로변화하는공간이다.그러므로신미경에게기억은정지된시간이아니라,확장된,확장하고있는시간이다.

꽃의시절을지나온여자는
맨발의외로움이다

발이뜨거워져도돌아보지않는다
-「기억의물결」

정동에대한신미경의민감한자의식은제목에서도드러난다.그녀에게기억은정지된것이아니라살아움직이는“물결”이다.그녀는정지된사물과정지된인간과정지된세계가존재하지않는다는사실을누구보다도잘안다.그녀는예술이정지된것처럼보이는대상을깨워흔드는일임을안다.‘낯설게하기’란예술의본원적인기능은바로죽은듯잠자고있는세계를흔들어깨워움직이게하는것이다.사진속의여성을“꽃의시절을지나온여자”라고호명하는순간그녀는인형이아니라움직이는사람이되고움직이는기억이된다.그녀는한때누구보다도아름다운‘사랑의시간’을보냈으며지금은“맨발의외로움”이되었다.그녀에게‘꽃의시절’은사라져죽은시간이아니라새로운시간을만드는문턱이다.그녀는비록맨발의외로운신세이지만,이미‘꽃의시절’을경험하였으므로현재그시절을보내는연인들에게관심이없다.어느시간이든영원히정지된시간이란없으며,하나의시절은다른시간의주름을만든다.맨발의외로운시간또한그대로있는것이아니라펼쳐져또다른시간의주름이된다.“발이뜨거워져도”그녀가꽃의시간을뒤돌아보지않는이유가바로이것이다.

신미경은디카시를쓰기이전에이미10여년동안사진작업을해왔다.그래서인지그녀의디카시사진들은그자체만으로도이미탁월한경지에도달해있다.문제는디카시라는장르가사진기호와문자기호의결합으로이루어져있고,이둘의화학반응에그성패가달려있다는사실이다.디카시는사진이든문자든어느한쪽의‘배타적완결성’을거부한다.사진이훌륭해서나쁠것도없지만,사진의배타적완결성이문자기호를압도해서양자사이의화학반응을끌어내지못한다면,그것은훌륭한사진작품이될지언정훌륭한디카시는되지못한다.그역도마찬가지이다.
오민석교수는해설에서“신미경의디카시는탁월한사진실력에못지않은언술실력으로사진의배타적완결성을잠재운다.그녀의문자는사진을흔들어깨우고,자칫화석화될수도있을사진에정동의입김을깊이불어넣으며,그렇게깨어난사진은다시문자기호와어울리면서살아있는감성을생생하게소환한다.그녀의디카시에서사진과문자는이렇게서로를살리며오로지디카시만이도달할수있는독특한미적공간을생산한다.”고평한다.

어둠을더듬던어느구석
가슴을뚫는빛줄기

내가켜지는순간
-「뮤즈」

제목에서드러나다시피이작품은신미경시인의디카시창작현장을그리고있다고보아도된다.쏟아지는빛에노출된붉은색열매들은전등처럼환하게어둠을밝힌다.시인에게문학은“어둠을더듬”는촉수같은것이다.그것은세상이감추고있는어둠을까발리고,어둠과싸우며,끝내어둠을이긴다.그러나그것은그자체로발화할수없다.그것은오로지다른몸과만나는순간에만점화된다.빛줄기가빗줄기처럼시인의“가슴을뚫”을때,시인의몸이점등된다.점등된몸은뮤즈가찾아든공간이며시인과뮤즈사이의활발한대화가생성되는자리이다.달력사진처럼너무말끔해서오히려화석화될수있는이미지를이렇게문자기호가흔들어깨울때,사진속의빛다발은생생하게살아움직이고,환하게점등되는붉은열매들의장면이동영상처럼펼쳐진다.

저속에무엇이들어이리흔드는가

짙고옅음이빽빽하고성김이
서로의몸을갈아타는

치열했기에덧없음을안다
-「바람의환승역」

신미경의디카시들은몸과몸이만나는지점에서탄생한다.“짙고옅음”,“빽빽하고성김”은서로다른강밀도를가진몸들이다.“바람의환승역”에선몸들이서로의강밀도를교환하며“서로의몸을갈아”탄다.몸이다른몸을갈아탈때치열한흔들림(“저속에무엇이들어이리흔드는가”)이발생한다.사진은몸들의깊은교차에서일어난바람이나뭇가지에남긴그림자이다.문자기호가이사진을흔들어깨우지않으면사진은죽은고인돌처럼누워있을뿐아무바람도일어나지않는다.신미경의문자기호는죽은사변(思辨)이아니라살아있는내장의목소리이다.그녀의디카시에서몸의목소리와사진은접점의각도와방향과속도에따라매번다른움직임을생성한다.

신미경의디카시들은오래연마한사진기술과그에버금가는언어의연금술이만나절실하고도행복한미의영역을생산한다.좋은디카시의훌륭한모델이므로디카시를사랑하는많은분들이읽고디카시의새로운출구를발견하는데도움을얻으면좋겠다.

시인의말

바람이불어오면
처마끝풍경처럼
흔들리며소리를내었다.

음의진원지를찾아나선길위에서
자주황폐했고휘청였지만
기를쓰던고백들은조금씩둥글어져갔다.

그오랜걸음을수줍은첫언어로묶는다.

문앞엔까마득히먼길
바람이방향을바꾸어불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