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전통과 현대적 감각을 새롭게 발명하는 시적 전략
울산문화관광재단 예술창작활동 지원사업에 선정된 김종연 시인이 세 번째 시조집 『시 약방을 아시나요』를 작가 기획시선 42번으로 출간하였다.
저자 김종연 시인은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2010년 《나래시조》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제3회 나래시조 단시조대상(2017), 제9회 울산시조 작품상(2022), 제5회 나래시조 젊은시인상(2023)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분꽃 엄마』 『아프리카 부처님』이 있다.
김종연 시인은 새 시조집 『시 약방을 아시나요』 에서 “천천히 걸어 여기까지 왔다.(시인의 말)”고 고백한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의 소란들에서 무심하지 못하”기에 시인은 “그 소란들을 껴안고” 오늘도 “기꺼이 고요를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고 밝힌다. 모두 4부로 구성되어 72편의 가편을 선보이는 이번 신작 시조집은 시인의 15년 시작 활동이 집약된 아름다운 결과물이다.
오늘날 현대시조는 ‘현대’의 내용적 복잡성과 ‘시조’의 형식적 반복성 사이에서 쉽사리 조화되지 않는 팽팽한 벡터가 변증법적으로 지양하면서 시적 긴장을 빚어낸다. 각각의 시편에서 나타나는 현대시조의 리듬은 현대인의 삶의 양식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 집중하느냐, 있어야 할 진실에 더 가닿으려고 하느냐에 따라 두 개의 계열로 정리해볼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실험적인 시조 작품은 전자에, 정통성에 입각한 시조는 후자에 해당한다.
김종연의 세 번째 시조집 『시 약방을 아시나요』는 이 두 계열을 동시적으로 포착하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시조의 정통성을 지키되 현대성의 감수성 또한 놓치지 않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김종연 시조의 긴장이 배태되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천지사방 꽃 핀 봄날 꽃비 흩날리던 날
꽃숭어리들 어깨 겯고 봄밤 한기 견디던 날
아파트 옥상에서 툭, 열세 살 소녀가 졌다
- 「동백꽃 비보」 전문
계절의 순환은 자연의 섭리다. 시적 배경은 “천지사방 꽃 핀 봄날”, 심지어 “꽃비”마저 “흩날리던 날”이다. 말하자면, 겨울이 지나 봄이 무르익어 가는 자연의 섭리가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봄밤 한기”를 견뎌야 하는 어느 날, 자신의 꿈과 희망을 봄날의 꽃처럼 “흩날리”듯 만발해야 할 한 소녀가 그만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소녀의 죽음은 봄밤의 한기처럼 자연의 섭리로부터 벗어나고만 안타까운 사태다. 조선조 성리학자들의 단시조가 성리학적 질서에 입각한 자연의 섭리를 반복의 형식으로 육화한다면 이 작품 또한 4음보격의 정제된 단시조 형식으로 세계의 순환과 반복된 질서를 외화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가 전통 단시조의 3장 4음보 형식을 따르면서도 각 장을 ‘행’이 아닌 ‘연’의 구조로 배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형식의 변용은 단지 외형적 실험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가 교란된 세계에서 시적 리듬과 호흡마저 단절되고 있는 현실의 미학적 반영이며, 시인이 그 세계로부터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태도의 표현이기도 하다. 행과 행 사이의 간극은 곧 질서의 균열이며, 구조의 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적 구성은 자동화된 일상의 반복 속에서 생산되는 당위적 질서의 형식화된 벡터와, 그 질서의 내부에서 감지되는 균열과 예감의 벡터가 서로 긴장감을 이루는 이중 구조로 형상화된다. 시는 그 긴장의 장場 위에서, 인간이 구축한 세계 질서의 불완전성과, 그로 인해 희생되는 생명의 감각을 비판적으로 조망한다.
이처럼 시인은 당위와 현실 간의 거리를 진단하고 이를 시적 형식으로 외화하여 시조의 시조다움을 구체적으로 구현한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거리 감각이 시조라는 작품 내적 세계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인을 둘러싼 세계 전반의 인식과 그 인식에 따른 시인의 심리적 고통 상황으로 돌올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4부로 구성된 이 시집의 1부와 4부가 ‘내면의 소리1·2’인 점은 예사롭지 않다.
내 안의 선과 악을 분리할 수 있나요?
간단한 수술입니다 몇 분이면 끝나죠
아직도 수술 중인가요
55년이 지났는데…
- 「지킬 앤 하이드」 전문
선과 악은 서로 반대의 벡터를 향하고 있지만 시적 화자의 내면 안에서 하나로 용융되어 있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면서 통합적인 성격을 띤다. 인간은 신도, 악마도 아니기에 완전한 선도, 완전한 악도 한 개인의 내면을 완전히 장악할 순 없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적 본성과 자연스레 타자를 위하는 선의 본심을 구분하여 인식할 수는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인식한다고 해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정동까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여 인식하는 것과 선악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합되어 있되 모순된 한 개인의 내면 상황은 시적 화자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즉 당위와 현실 사이의 이분법적 모순 상황과 상동 관계를 자아낸다.
우리는 지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
자기만 살겠다는 배반이 넘치는 세상
눈 닫고,
귀 닫은 채로,
몸의 반을 내어준다
- 「도미노 게임」 전문
자크 데리다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윤리와 정치의 기초이자 원칙으로 환대를 정의하면서 무조건적 환대와 조건적 환대 사이에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아포리아를 내재화하는 ‘시적 환대’를 주장했다. 요컨대 진정한 환대란 당위로서의 무조건적 환대도, 현실적인 조건적 환대도 아닌, 이 둘 사이의 모순을 특정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발명, 재발명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우리는 지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선언하며 이러한 ‘짐’은 “몸의 반을 내어”주는 행위로 구체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온통 “배반이 넘치는 세상”에서 그 상황과 반대되는 ‘내어줌’을 발명함으로써 “배반”의 세계로부터 이탈하고자 하는 의지가 여기에는 담겨 있다. 타자를 향한 순수한 베풂의 언사가 “몸의 반을 내어”주는 것이라면 이는 타자에 대해, 타자를 주인으로 모시는 환대의 아포리즘에 대한 시적 표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온전하고 자연스러운 규칙과 질서가 깨어져버린 상황에서, 타자와 함께 하는 연대와 환대의 상상력이 세계를 적대로 삼아 분쇄하고자 하는 적의의 언사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베풂과 나눔의 가치를 새롭게 규정하고 이를 시적 언사로 실천함으로써 “속도전 경쟁전으로”(「장보기 난민」 부분) 어지러운 세상, 온통 “아닌 척의 달인”(「프리사이즈」 부분)일 뿐인 위선의 가면들로부터 시적 대안을 창안해내려 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쓰기는 단지 개인의 내면을 토로하거나 세상의 한 단면을 진단하는 차원을 넘어 자기 구원의 대안적 언어로까지 승격 가능한 것이 된다.
영국 어느 도시에 시 약방이 있다네요
다시, 겹겹의 상처 번식을 시작해도
여권을 들고 가기에 그곳은 너무 멀어요
과잉 진료 원합니다 비밀은 지킬게요
시 처방 과다 복용해 중독되고 싶어요
온몸에 시움이 돋는 부작용을 원해요
지금은 초연결사회 원격의 메아리를
시 약방 시스템이 읽어낼지도 몰라
기대가 단숨에 자라 설렘이 견고해지네
방전된 몸의 언어 내면의 에코까지
모조리 클릭, 클릭, 전송 버튼 눌러놓고
처방전 당도하기 전 잡념들은 버려야지
- 「시 약방을 아시나요」 전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약국에 들러 처방을 받듯, 세상으로부터 받은 “겹겹의 상처”를 “시 처방”으로 치유하고자 하는 상상력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이러한 시적 발상은 “방전된 몸의 언어”라는 말이 내포하듯 작품 쓰기의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고 같은 맥락에서 순수한 시적 자아를 보존하기 어려운 세상살이의 힘겨움 때문일 수도 있다. 나아가 시심을 회복하고 시의 시각으로 세계를 새롭게 보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이기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국에서 한국까지의 거리가 먼만큼, 그 원거리의 공간 모두가 시로 가득 차는 “원격의 메아리”로 수신된다면 세계는 시와 동의어가 될 것이기에 “시국(時局)이 시국(詩國) 되는 일”(「계엄 정국」 부분)은 상상적으로나마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시쓰는 일을 “천형을 천행이라 읽네”(「詩묘살이」 부분)라 말놀이(pun)한 동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온통 시로 들어차는 세계로서의 시는 시인이 꿈꾸는 당위적 세계에 대한 수사이자 질서와 규칙을 망각한 세계에 대한 비판이며, 표피적 세계 인식으로부터 실존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하는 계기를 안겨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이제 자기 구원은 그 자체로 세계 구원과 동의어가 된다. 세계의 절대적인 규칙과 법칙인 자연에 시인의 내면이 기울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김종연의 시조는 삶의 당위와 현실 사이의 불화에 감응하며, 그로 인한 심리적·육체적 고통을 시적 상상력으로 전환해 나간다. 그의 시적 기획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붕괴된 질서 위에 새로운 세계의 윤리를 상상하려는 치열한 문학적 응전이며, 파편화된 현대문명 속에서 소외된 자연과의 합일, 조화를 회복하려는 잠재적 사유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회귀의 욕망을 넘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한 미학적 저항의 형식으로 작동한다.
그러한 시적 태도를 함축하는 또 다른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여유’일 것이다. 여기서의 여유는 피상적인 느긋함이 아니라, 과속화된 문명적 시간성에 저항하며 전통적이면서도 동시에 현대적인 감각을 새롭게 발명하고자 하는 시적 전략이며, 정형률의 느린 호흡으로 속도의 문법을 교란하는 정밀한 미학적 실천이다.
손남훈 문학평론가(부산대 교수)는 “김종연의 시조는 현대문명의 가장 예민한 병리적 징후들을 현대시조의 넓은 스펙트럼으로 수용한다. 그것은 결코 전통에의 안주가 아니라, 전통의 내적 자장에서 현대성을 비판적으로 조망하고 재구성하려는 진중한 시적 실험이다. 그는 시조의 정통성을 견지하면서도 그 내부로부터 현대적 감각과 문제의식을 섬세하게 침투시킨다. 이로써 전통과 현대는 대립이 아닌 긴장 속 공존의 미학으로 수렴되며, 그 접면 위에 시인은 오늘의 시조가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지형을 펼쳐 보인다. 바로 이 점이 벌써부터 그의 다음 시편들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라고 평한다.
저자 김종연 시인은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2010년 《나래시조》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제3회 나래시조 단시조대상(2017), 제9회 울산시조 작품상(2022), 제5회 나래시조 젊은시인상(2023)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분꽃 엄마』 『아프리카 부처님』이 있다.
김종연 시인은 새 시조집 『시 약방을 아시나요』 에서 “천천히 걸어 여기까지 왔다.(시인의 말)”고 고백한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의 소란들에서 무심하지 못하”기에 시인은 “그 소란들을 껴안고” 오늘도 “기꺼이 고요를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고 밝힌다. 모두 4부로 구성되어 72편의 가편을 선보이는 이번 신작 시조집은 시인의 15년 시작 활동이 집약된 아름다운 결과물이다.
오늘날 현대시조는 ‘현대’의 내용적 복잡성과 ‘시조’의 형식적 반복성 사이에서 쉽사리 조화되지 않는 팽팽한 벡터가 변증법적으로 지양하면서 시적 긴장을 빚어낸다. 각각의 시편에서 나타나는 현대시조의 리듬은 현대인의 삶의 양식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 집중하느냐, 있어야 할 진실에 더 가닿으려고 하느냐에 따라 두 개의 계열로 정리해볼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실험적인 시조 작품은 전자에, 정통성에 입각한 시조는 후자에 해당한다.
김종연의 세 번째 시조집 『시 약방을 아시나요』는 이 두 계열을 동시적으로 포착하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시조의 정통성을 지키되 현대성의 감수성 또한 놓치지 않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김종연 시조의 긴장이 배태되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천지사방 꽃 핀 봄날 꽃비 흩날리던 날
꽃숭어리들 어깨 겯고 봄밤 한기 견디던 날
아파트 옥상에서 툭, 열세 살 소녀가 졌다
- 「동백꽃 비보」 전문
계절의 순환은 자연의 섭리다. 시적 배경은 “천지사방 꽃 핀 봄날”, 심지어 “꽃비”마저 “흩날리던 날”이다. 말하자면, 겨울이 지나 봄이 무르익어 가는 자연의 섭리가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봄밤 한기”를 견뎌야 하는 어느 날, 자신의 꿈과 희망을 봄날의 꽃처럼 “흩날리”듯 만발해야 할 한 소녀가 그만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소녀의 죽음은 봄밤의 한기처럼 자연의 섭리로부터 벗어나고만 안타까운 사태다. 조선조 성리학자들의 단시조가 성리학적 질서에 입각한 자연의 섭리를 반복의 형식으로 육화한다면 이 작품 또한 4음보격의 정제된 단시조 형식으로 세계의 순환과 반복된 질서를 외화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가 전통 단시조의 3장 4음보 형식을 따르면서도 각 장을 ‘행’이 아닌 ‘연’의 구조로 배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형식의 변용은 단지 외형적 실험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가 교란된 세계에서 시적 리듬과 호흡마저 단절되고 있는 현실의 미학적 반영이며, 시인이 그 세계로부터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태도의 표현이기도 하다. 행과 행 사이의 간극은 곧 질서의 균열이며, 구조의 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적 구성은 자동화된 일상의 반복 속에서 생산되는 당위적 질서의 형식화된 벡터와, 그 질서의 내부에서 감지되는 균열과 예감의 벡터가 서로 긴장감을 이루는 이중 구조로 형상화된다. 시는 그 긴장의 장場 위에서, 인간이 구축한 세계 질서의 불완전성과, 그로 인해 희생되는 생명의 감각을 비판적으로 조망한다.
이처럼 시인은 당위와 현실 간의 거리를 진단하고 이를 시적 형식으로 외화하여 시조의 시조다움을 구체적으로 구현한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거리 감각이 시조라는 작품 내적 세계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인을 둘러싼 세계 전반의 인식과 그 인식에 따른 시인의 심리적 고통 상황으로 돌올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4부로 구성된 이 시집의 1부와 4부가 ‘내면의 소리1·2’인 점은 예사롭지 않다.
내 안의 선과 악을 분리할 수 있나요?
간단한 수술입니다 몇 분이면 끝나죠
아직도 수술 중인가요
55년이 지났는데…
- 「지킬 앤 하이드」 전문
선과 악은 서로 반대의 벡터를 향하고 있지만 시적 화자의 내면 안에서 하나로 용융되어 있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면서 통합적인 성격을 띤다. 인간은 신도, 악마도 아니기에 완전한 선도, 완전한 악도 한 개인의 내면을 완전히 장악할 순 없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악마적 본성과 자연스레 타자를 위하는 선의 본심을 구분하여 인식할 수는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인식한다고 해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정동까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여 인식하는 것과 선악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합되어 있되 모순된 한 개인의 내면 상황은 시적 화자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즉 당위와 현실 사이의 이분법적 모순 상황과 상동 관계를 자아낸다.
우리는 지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
자기만 살겠다는 배반이 넘치는 세상
눈 닫고,
귀 닫은 채로,
몸의 반을 내어준다
- 「도미노 게임」 전문
자크 데리다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윤리와 정치의 기초이자 원칙으로 환대를 정의하면서 무조건적 환대와 조건적 환대 사이에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아포리아를 내재화하는 ‘시적 환대’를 주장했다. 요컨대 진정한 환대란 당위로서의 무조건적 환대도, 현실적인 조건적 환대도 아닌, 이 둘 사이의 모순을 특정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발명, 재발명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우리는 지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선언하며 이러한 ‘짐’은 “몸의 반을 내어”주는 행위로 구체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온통 “배반이 넘치는 세상”에서 그 상황과 반대되는 ‘내어줌’을 발명함으로써 “배반”의 세계로부터 이탈하고자 하는 의지가 여기에는 담겨 있다. 타자를 향한 순수한 베풂의 언사가 “몸의 반을 내어”주는 것이라면 이는 타자에 대해, 타자를 주인으로 모시는 환대의 아포리즘에 대한 시적 표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온전하고 자연스러운 규칙과 질서가 깨어져버린 상황에서, 타자와 함께 하는 연대와 환대의 상상력이 세계를 적대로 삼아 분쇄하고자 하는 적의의 언사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베풂과 나눔의 가치를 새롭게 규정하고 이를 시적 언사로 실천함으로써 “속도전 경쟁전으로”(「장보기 난민」 부분) 어지러운 세상, 온통 “아닌 척의 달인”(「프리사이즈」 부분)일 뿐인 위선의 가면들로부터 시적 대안을 창안해내려 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쓰기는 단지 개인의 내면을 토로하거나 세상의 한 단면을 진단하는 차원을 넘어 자기 구원의 대안적 언어로까지 승격 가능한 것이 된다.
영국 어느 도시에 시 약방이 있다네요
다시, 겹겹의 상처 번식을 시작해도
여권을 들고 가기에 그곳은 너무 멀어요
과잉 진료 원합니다 비밀은 지킬게요
시 처방 과다 복용해 중독되고 싶어요
온몸에 시움이 돋는 부작용을 원해요
지금은 초연결사회 원격의 메아리를
시 약방 시스템이 읽어낼지도 몰라
기대가 단숨에 자라 설렘이 견고해지네
방전된 몸의 언어 내면의 에코까지
모조리 클릭, 클릭, 전송 버튼 눌러놓고
처방전 당도하기 전 잡념들은 버려야지
- 「시 약방을 아시나요」 전문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약국에 들러 처방을 받듯, 세상으로부터 받은 “겹겹의 상처”를 “시 처방”으로 치유하고자 하는 상상력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이러한 시적 발상은 “방전된 몸의 언어”라는 말이 내포하듯 작품 쓰기의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고 같은 맥락에서 순수한 시적 자아를 보존하기 어려운 세상살이의 힘겨움 때문일 수도 있다. 나아가 시심을 회복하고 시의 시각으로 세계를 새롭게 보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이기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국에서 한국까지의 거리가 먼만큼, 그 원거리의 공간 모두가 시로 가득 차는 “원격의 메아리”로 수신된다면 세계는 시와 동의어가 될 것이기에 “시국(時局)이 시국(詩國) 되는 일”(「계엄 정국」 부분)은 상상적으로나마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시쓰는 일을 “천형을 천행이라 읽네”(「詩묘살이」 부분)라 말놀이(pun)한 동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온통 시로 들어차는 세계로서의 시는 시인이 꿈꾸는 당위적 세계에 대한 수사이자 질서와 규칙을 망각한 세계에 대한 비판이며, 표피적 세계 인식으로부터 실존의 본질을 들여다보게 하는 계기를 안겨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이제 자기 구원은 그 자체로 세계 구원과 동의어가 된다. 세계의 절대적인 규칙과 법칙인 자연에 시인의 내면이 기울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김종연의 시조는 삶의 당위와 현실 사이의 불화에 감응하며, 그로 인한 심리적·육체적 고통을 시적 상상력으로 전환해 나간다. 그의 시적 기획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붕괴된 질서 위에 새로운 세계의 윤리를 상상하려는 치열한 문학적 응전이며, 파편화된 현대문명 속에서 소외된 자연과의 합일, 조화를 회복하려는 잠재적 사유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회귀의 욕망을 넘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한 미학적 저항의 형식으로 작동한다.
그러한 시적 태도를 함축하는 또 다른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여유’일 것이다. 여기서의 여유는 피상적인 느긋함이 아니라, 과속화된 문명적 시간성에 저항하며 전통적이면서도 동시에 현대적인 감각을 새롭게 발명하고자 하는 시적 전략이며, 정형률의 느린 호흡으로 속도의 문법을 교란하는 정밀한 미학적 실천이다.
손남훈 문학평론가(부산대 교수)는 “김종연의 시조는 현대문명의 가장 예민한 병리적 징후들을 현대시조의 넓은 스펙트럼으로 수용한다. 그것은 결코 전통에의 안주가 아니라, 전통의 내적 자장에서 현대성을 비판적으로 조망하고 재구성하려는 진중한 시적 실험이다. 그는 시조의 정통성을 견지하면서도 그 내부로부터 현대적 감각과 문제의식을 섬세하게 침투시킨다. 이로써 전통과 현대는 대립이 아닌 긴장 속 공존의 미학으로 수렴되며, 그 접면 위에 시인은 오늘의 시조가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지형을 펼쳐 보인다. 바로 이 점이 벌써부터 그의 다음 시편들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라고 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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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약방을 아시나요 (김종연 시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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