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원서로 읽는 우리 고전 『열하일기』
한때 ‘해리포터 시리즈’가 극장가를 풍미하자 영화와 함께 조앤 롤링의 책을 원서로 읽는 붐이 일었다. 10년 영어공부를 1년 만에 끝낸다는 둥, 여기저기서 원서로 ‘해리포터’를 읽는 방법을 포스팅하고 덩달아 책 판매도 뛰었다. 그렇다면 우리 고전의 경우는 어떠한가? 원서는 고사하고, 축약하지 않은 완역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금오신화』, 『춘향전』, 『홍길동전』을 완역본으로 읽은 독자가 얼마나 있을까? 이것이 우리 고전의 현주소이고 수준일 것이다. 『정본 열하일기』가 이렇게 출간될 수 있는 것은, 성가(聲價)가 높은, 민족 최고의 고전이라는 명성 덕이다. 『열하일기』 정본 작업은 우리 문화가 한 걸음 더 내딛는 큰 성과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민족 최고의 고전,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창강 김택영(1850~1927)은 “조선 500년 역사에 퇴계, 율곡의 도학과 충무공의 용병, 연암의 문장, 이 세 가지가 나란히 특기할 만하다”고 말했다. 현대에 들어와 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인 박희병 교수는 그의 번역서인 『나의 아버지 박지원』(원제 ‘과정록’過庭錄; 돌베개, 1998) 서문에서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독일에 괴테가, 중국에 소동파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박지원이 있다”고 극찬한 바 있다. 과장이 아니라, 연암 박지원은 손꼽히는 조선의 대문호이며, 여전히 많은 학자의 연구 대상이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청나라 건륭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에 끼어 중국을 다녀왔다. 공적인 소임이 없어 자제군관 자격으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던 연암은 북경 여행과 함께 조선인으로서는 전인미답이라 할 수 있는 열하 지방을 다녀올 수 있었다.
1780년(연암 44세) 5월 25일 한양을 출발했고, 그해 10월 27일 한양으로 돌아왔다. 연암은 중국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즉시 『열하일기』 집필에 전념했다. 『열하일기』 초고는 책으로 완성되기도 전에 그 일부가 주변의 지인들에 의해 전사(傳寫)되었고, 급기야 한양에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연암체’(燕巖體)라는 새로운 글쓰기 문체가 생겨날 정도로, 『열하일기』는 당시 독서계와 문인 지식층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열하일기』는 당시 문단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새로운 글쓰기 시도에 환호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청나라 연호를 썼다 하여 ‘노호지고’(虜號之稿)라고 비방하였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추진하던 국왕 정조(正祖)까지 이 작품을 주목하고 문제시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시대착오적인 반청(反淸) 사상을 풍자하고 조선을 낙후시킨 양반 사대부의 책임을 추궁하는 등 현실 비판적인 내용과 신랄한 표현이 담긴 이 책은 당대는 물론이고 조선조 내내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손자 박규수가 우의정으로 있던 조선 말기에도, 그리고 서적의 출판과 보급이 비교적 활황을 보였던 근대 초기까지도 공간(公刊)되지 못하고 오직 필사로만 유통되었다.
민족 최고의 고전, 조선 최고의 베스트셀러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창강 김택영(1850~1927)은 “조선 500년 역사에 퇴계, 율곡의 도학과 충무공의 용병, 연암의 문장, 이 세 가지가 나란히 특기할 만하다”고 말했다. 현대에 들어와 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인 박희병 교수는 그의 번역서인 『나의 아버지 박지원』(원제 ‘과정록’過庭錄; 돌베개, 1998) 서문에서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독일에 괴테가, 중국에 소동파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박지원이 있다”고 극찬한 바 있다. 과장이 아니라, 연암 박지원은 손꼽히는 조선의 대문호이며, 여전히 많은 학자의 연구 대상이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청나라 건륭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에 끼어 중국을 다녀왔다. 공적인 소임이 없어 자제군관 자격으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던 연암은 북경 여행과 함께 조선인으로서는 전인미답이라 할 수 있는 열하 지방을 다녀올 수 있었다.
1780년(연암 44세) 5월 25일 한양을 출발했고, 그해 10월 27일 한양으로 돌아왔다. 연암은 중국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즉시 『열하일기』 집필에 전념했다. 『열하일기』 초고는 책으로 완성되기도 전에 그 일부가 주변의 지인들에 의해 전사(傳寫)되었고, 급기야 한양에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연암체’(燕巖體)라는 새로운 글쓰기 문체가 생겨날 정도로, 『열하일기』는 당시 독서계와 문인 지식층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열하일기』는 당시 문단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새로운 글쓰기 시도에 환호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청나라 연호를 썼다 하여 ‘노호지고’(虜號之稿)라고 비방하였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추진하던 국왕 정조(正祖)까지 이 작품을 주목하고 문제시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시대착오적인 반청(反淸) 사상을 풍자하고 조선을 낙후시킨 양반 사대부의 책임을 추궁하는 등 현실 비판적인 내용과 신랄한 표현이 담긴 이 책은 당대는 물론이고 조선조 내내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손자 박규수가 우의정으로 있던 조선 말기에도, 그리고 서적의 출판과 보급이 비교적 활황을 보였던 근대 초기까지도 공간(公刊)되지 못하고 오직 필사로만 유통되었다.

정본 열하일기
$9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