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안녕과행복을빌었던옛사람들의마음
옛사람들은눈에보이지않는나쁜기운과귀신이삶을위협한다고믿었다.이를막고복을불러들이기위해궁궐과절,서민들의집안까지다양한상징적장치가곳곳에마련되었다.대문에는호랑이나문신(門神)을그린문배그림을붙였고,절의법당은무서운얼굴의귀면기와로지붕을장식해악귀가들어오지못하게했다.민간에서는마을수호신당에솔가지,붉은고추,숯을꿰어만든금줄을걸어잡귀의출입을막았다.왕릉에는돌로만든석수(石獸)가서서망자의안식을지켰다.그림·조형물·건축물등삶을둘러싼모든공간에동원된이상징들은재앙을막고복을불러들이고자하는길상(吉祥)·벽사(?邪)의장치였다.
복과화는결국사람의행실에서비롯되며,그행실이하늘의감응으로이어진다고여겨졌다.즉,길상은단순한미신이나장식이아니라,인간의바람직한삶을하늘의뜻과잇는질서였다.효(孝)·충(忠)·예(禮)같은덕목을글씨로담아낸윤리문자도병풍이대표적사례다.이런생각은매해정초에그려붙이던세화에서도잘드러난다.세화는단순한장식용그림이라기보다,질병과재난없는한해를기원하는벽사진경의장치였다.‘입춘대길’(立春大吉),‘건양다경’(建陽多慶)과같은글귀나,까치호랑이를그린호작도에는행복과무탈함을빌던소망이담겨있었다.
길상은화려한예술적성취보다도삶을지키려는마음에서비롯되었다.옛사람들은하늘의이치에따르는삶을바람직하게여겼고,그속에서평안과행복을구했다.궁궐의현판,절의장식,집안의작은부적까지,삶의안녕과행복을빌었던옛사람들의마음은모두하나의코드처럼연결되어있다.이런흔적은오늘날에도새해덕담이나집안에두는작은장식들속에서이어지고있다.길상이란결국삶의안녕과행복을바라는보편적열망인것이다.
귀신은어떤존재였을까?
글로벌대중문화코드가된한국적상징코드
《케이팝데몬헌터스》(이하‘케데헌’)의성공은한국적무속전통이어떻게세계적문화코드로작동할수있는지를잘보여준다.작품속에서중요한설정으로등장하는‘혼문’은앞서설명한길상·벽사의개념과도닮아있다.
그렇다면‘데몬’,즉귀(鬼)는어떤존재였을까?‘케데헌’의주인공루미는귀신을잡는존재이기도하며,그녀자신이귀신이기도하다.귀신은선한존재일까,아니면악한존재일까?『전통미술의상징코드』에따르면“귀신은그본체가은미(隱微)하여실제로볼수없는존재”로서한마디로답하기가어렵다.그러나우리의언어생활속에서드러나는다양한표현을통해그복합적성격을짐작할수있다.“‘귀신도모른다’,‘귀신조차넘보지못한다’,‘귀신처럼맞춘다’라는표현에서귀신은전지전능한존재이다.‘귀신이도왔다’라고했을때의귀신은수호자가된다.‘귀신이울고간다’라고할경우의귀신은감성적존재이고,‘귀신나오겠다’라고할때의귀신은어지럽고음습한곳에사는사악한존재가된다.또어떤사람이나쁜행동을했을때‘귀신처럼군다’라고말했다면이귀신은해를끼치는사납고악독한존재가된다.‘귀신을쫓는다’라는말에서귀신은쫓아야할대상이다.그런데그귀신을쫓는일도다른귀신이한다.”(133쪽)
이처럼귀신은선과악이공존하는양가적존재였다.그래서사람들은귀신을두려워하면서도,동시에삶에깊이관여하는존재로받아들였다.오늘날‘케데헌’이세계인에게어필하는이유역시보이지않는존재에대한두려움과경외,그리고그것을통해삶의의미와질서를찾으려는보편적욕망이작품속한국적상징과잘이어져있기때문아닐까?
‘발인’은본래수레바퀴의굄목을뺀다는뜻,
죽음을대하는옛사람들의마음
수레가굴러가려면바퀴앞의굄목을빼야한다.‘발인’(發?)은본래수레바퀴의굄목[?]을제거하는일을뜻한다.그런데이행위가장례절차의용어로쓰이게된것은옛사람들의사생관과관련이있다.우리선조들은사람이죽으면저승으로가는길이멀고험하다고믿었다.그래서망자가길을잃지않고바른길로갈수있도록무덤속에수레바퀴모양의토기를함께묻어주었다.
조선의실학자박지원(朴趾源,1737~1805)은『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에서“명계(冥界)의지남거(指南車)”라는표현을썼다.‘지남거’는‘정방향을가리키는수레’라는뜻이다.태곳적에황제가치우와싸울때,치우가피운짙은안개로병사들이방향을잃고우왕좌왕하자,황제가병사들을인도하기위해만들었다는전설속의물건이바로지남거다.진(晉)나라이후로황제의행차에도이수레가앞길을바로잡는도구로쓰였다고한다.
이발상이장례의례에옮겨와,‘발인’은장례를마치고망자가저승으로떠나는길이곧고평안하게인도하기를기원하는말이되었다.죽음은산자에게는이별이지만,망자에게는또다른여정의시작이라는전통적사고가엿보인다.길을떠나는사람에게바른길로안내하고자했던마음,그속에옛사람들의사생관과삶과죽음을잇는상징적철학이담겨있다.
일제가옮겨단창덕궁·창경궁문액,아직그대로…
문화재복원과정에서놓친것들
전통건축에서‘內’와‘外’는단순한안팎이아니라주체와질서를드러내는중요한개념이었다.왕의거처나정치공간은‘內’로,그주변은자연스레‘外’로규정되었는데,이질서에따라문의현판인문액은밖[外]에서안[內]으로진입하는사람이볼수있도록바깥에달렸다.
1827년(순조27년)에제작된〈동궐도〉(東闕圖)를보면,창덕궁숙장문은원래인정전으로진입하는사람이볼수있도록동쪽에문액이달려있었음을알수있다.그런데현재숙장문의편액은서쪽에달려있다.어쩌다가문액의위치가바뀌었을까?“구한말순종이왕권을잃고창덕궁에칩거하게되면서희정당은내전(內殿)이된다.1908년쯤일제는순종의편익을도모한다는명분으로어차(御車)가돈화문에서부터진선문과숙정문을거쳐희정당까지쉽게진입할수있도록신작로를열었다.이과정에서돈화문앞월대가철거되고숙장문은희정당으로진입하는문처럼기능하게된다.이때일제가희정당진입방향에맞추어편액을문의서쪽에옮겨단것으로추정”된다.(202~204쪽)창덕궁복원사업에서순종때의상태그대로편액이걸린채숙장문이복원된것이다.
창경궁빈양문역시동쪽에달려있어야할문액이현재서쪽에달려있다.『궁궐지』에따르면이일대방위의중심,즉‘內’로설정된곳은함인정이었다.‘빈양’(賓陽)이라는이름은『서경』에서‘인빈출일’(寅賓出日)이라는구절의의미를따온것인데,이는해가뜨고생명의기운이시작되는방위인‘동’쪽을상징하는것으로,빈양문이동문임을암시한다.전통적내외질서와방위의상징체계에비추어볼때,빈양문문액은함인정으로진입하는사람들이볼수있는위치,즉명정전쪽에걸려있는것이옳다.이는단순히현판하나의문제가아니라,전통건축이지녔던내외의질서와방위개념을거스르는왜곡이다.
해와달,북두칠성과북극성…
그림·조형물·의례속으로내려온하늘
옛사람들에게해·달·별은단순한천체가아니었다.삼광(三光)이라불린이하늘의빛은우주의음양과영원성,그리고인간의운명을좌우하는상징이었다.특히북극성과북두칠성은인간의수명과길흉화복을관장하는별로여겨졌으며,무덤속에묻힌칠성판과칠성도는망자의영원한안식을기원하는장치였다.
흥미로운사실은,원래불교와무관했던칠성신앙이조선시대에사찰안으로들어왔다는점이다.조선의숭유억불정책아래재정난을겪던사찰들이현실적해법으로무속신앙을수용하면서,북극성과북두칠성은불교적도상으로변모했다.그렇게치성광여래와칠여래는대중이장수와복을빌수있는친근한신앙대상으로자리잡았다.
별은정치와도맞닿아있었다.공자는『논어』에서북극성을임금에빗대며“(임금이)덕정을펴게되면북극성이가만히제자리를지키고있어도뭇별들이옹위하는것처럼될것이다”라고말했다.여기서비롯된‘공북’(拱北)이라는개념은임금이바른정치를하면신하와백성도자연스레군주를잘따르게됨을뜻하게되었다.고창읍성의공북루,공주공산성의공북루,진주성의공북문루등우리나라곳곳에‘공북’이라는액호를가진문루나정자의수가적지않은것은바로이런이유다.
서양이별에서과학을읽었다면,우리조상들은별에서삶의질서를읽었다.옛사람들에게별을본다는건곧세상의질서와사람의길을이해하는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