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극세계는 트럼프 2.0에 놀라지 않았다
2025년 세계정세의 한복판에는 미국 트럼프 정부가 벌인 ‘관세 세계대전’이 있었다. 동맹국들은 대부분 고개를 숙였지만, 적지 않은 나라들이 순응하지는 않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했고, 특히 중국, 인도, 브라질 등 이른바 ‘다극세계’의 선도국들은 강경하게 맞대응했다. 특히나 중국은 11월 미중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의 조치를 대부분 무효화하는 ‘사실상의 1승’을 거두며, 새삼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미국의 ‘일극 패권’이 해체된 세상을 최근 일반적으로 ‘다극세계’라고 부르고 있다. 브릭스 등의 기구로 대표되며 ‘글로벌사우스’로도 불리는 세계 여러 나라, 여러 세력이 그 구성원이다. 미국, 집단서방, 미국의 동맹국들, 각 국가의 친미 엘리트 등으로 표상되는 10억 인구와 대립하는, 70억 인구의 ‘글로벌 다수’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사실 미국은 ‘언제나 미국’이었다. 동맹국들에게는 그 의미가 사뭇 달랐을지 몰라도, 오바마, 바이든의 ‘친나토’든,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든 다극세계 입장에서 미국은 언제나 지배하고 군림하는 경쟁적이고 적대적인 나라다. 그래서 지난 21세기 20여 년 내내 다극세계는 “NO KINGS”를 외쳐왔다. 그러니 트럼프 2.0에 놀랄 것은 없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금융위기, 군사적 실패, 쌓이는 재정 적자, 생산 능력 상실, 총기 및 마약, 양극화 등의 사회 혼란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쇠퇴와 대비하여 10여 년간 빠른 속도로 착실하게 모든 분야에서 다극세계가 스스로의 힘을 키워왔다는 점이다. 급기야 2023년에는 브릭스 5개국이 미국 주도 G7을 경제적으로 추월(PPP 기준)하고, 2025년에는 그 격차가 더욱 증대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다극세계 진영의 대표적 지정학 분석가, 브라질 출신의 저널리스트 페페 에스코바가 2021~2024년에 쓴 글들을 선별하여 정리한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다극세계의 전진을 이른바 ‘내재적 관점’, 다극화 진영 스스로가 주장하는 관점과 논리를 바탕으로 살피고 있다. 2025년에 가시화되었지만, 사실 다극세계의 폭발적 전진은 이미 2020년대 전반부터 준비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패권 이후를 ‘준비한 시기’가 곧 ‘세계질서 대격변의 장면들’이다. 미국과 집단서방의 눈으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다극세계 스스로의 관점에 입각하여 그들의 행동 전략과 목표, 실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살펴볼 필요성이 증대되는 지금 시기 한국에 적절하게 소개되었다.
다시 쓰는 “거대한 체스판”,
신세계질서의 태동을 생생하게 기록하다
페페는 이 책을 미국의 21세기 국책, ‘테러와의 전쟁’이 끝내 실패로 끝난 아프가니스탄 이야기로 시작하여, 미국-나토-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게 군사적으로 패배하고 있는 돈바스 지역의 전선 방문 취재기로 마무리한다(한국어판에는 트럼프 2.0과 세계정세를 평가하는 2025년 글 추가 포함). 사실상 미국이 촉발한 2개 전쟁의 양상이 지금까지의 “규칙 기반 세계질서”의 종말, 바꾸어 말하면 다극세계의 실질적 우위를 입증하는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14쪽). 파슈툰족과 노보로시야가 보여주듯, 이제는 글로벌 다수가 “거대한 체스판”을 다시 두기 시작했다. 미국이 2차대전 이후 압도적인 군사력, 경제력으로 “거대한 체스판”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세계를 호령하던 시기는 이제 끝났다는 것이다. 저자는 다양한 주제, 소재, 현장 방문을 통해 일극 패권과의 치열한 경쟁 속 다극세계의 여러 모습을 촘촘히 기록하고 분석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가 주목한 네 가지 주제는 다음과 같다.
① BRICS+, SCO, 유라시아경제연합, 일대일로의 ‘따로 또 같이’
브릭스플러스(BRICS+), 상하이협력기구(SCO),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일대일로(一带一路, BRI)는 현재 세계질서의 변화를 이끄는 여러 세력이 ‘따로 또 같이’ 집결한 공간이다. 이들의 연대, 교차, 협력은 점점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들의 포괄하는 범위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사회 모든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점차 ‘통합’적으로 ‘집결’하고 있다. BRICS+와 SCO가 가까운 시일 내에 더욱 가깝게 접근할 것이 예상되며(219쪽), 최종적으로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새로운 유엔’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특유의 전문성을 발휘하여 여러 다자기구 회의 및 행사에 대한 생생한 현장 취재를 바탕으로 다극세계의 결집 양상과 구체적인 현실을 다뤘다.
저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중국과 러시아의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의 확립이다. 저자는 2023년 3월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시진핑-푸틴 정상회담을 “팍스 아메리카나의 잔존물”을 철거하기로 확약한 “다극세계를 향한 새 시대의 얄타 회담”이라고 규정한다(118쪽). 중국의 ‘중국몽’과 러시아의 ‘유라시아 구상’은 다극세계 구축, 즉 세계질서의 민주화와 주권 중심의 국제 관계 구축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접점을 지니고, 이를 바탕으로 이들은 “흔들림 없이” “100년 동안 볼 수 없었던 중대한 변화”를 “하나로 뭉쳐” 추동해 나가겠다고 다짐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글로벌사우스’가 이들의 기본 구상을 “동반자”로서 분명히 지지하고 함께 만들어나가고 있으며, 특히 아프리카의 광범위한 지지와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음에 주목한다. 이로써 미국과 서방 중심의 식민주의적ㆍ인종주의적 팍스 아메리카나 질서와의 질적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비서구권, 개발도상국, ‘제3세계’를 지칭하는 말로 쓰여 온 ‘글로벌사우스’는 사실상 다극세계의 구성원 그 자체를 의미한다. 거대한 아시아(동, 서, 중앙아시아를 모두 포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나라들이 현재 글로벌사우스의 중심이다. 글로벌사우스가 점점 성장하고, 아시아가 유럽까지 연결되며 ‘유라시아’로 확대되고, 집단서방 속에서도 다극세계 질서에 동조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이제는 “글로벌글로브”라는 용어까지 쓰이기 시작했다. ‘글로벌 다수’가 곧 글로벌사우스이자 글로벌글로브인 시대가 왔다.
현재 20개국까지 확대된 브릭스플러스(회원국 10, 파트너국 10)는 가장 큰 범위에서 세계를 아우르는 정치, 경제, 문화 동반자 거버넌스로 작동하고 있다. 유라시아를 중심으로 중국이 주도하는 상하이협력기구는 정치, 군사, 경제적 측면에서 급속히 강화되고 있고,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경제연합은 특히 중앙아시아와 극동을 연결하는 광범위한 경제, 정치 회랑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연결되는 접점인 플랫폼이자 인프라로 나아가는 것이 지금의 일대일로, 이른바 ‘신실크로드’라고 볼 수 있다(단순히 중국의 투자 사업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저자는 그들의 목표를 “전쟁이 아니라 무역”(No War Make Trade, 反戰通商)이라고 말한다(144쪽). 다극세계의 지향은 ‘발전, 평화, 주권, 협력, 실천’이라는 말이다. (물론 패권국의 엘리트들은 이를 “지정학적·지경학적 최대 위협”으로 해석한다.)
② 탈달러 거버넌스 구축의 경로
2차 대전 종전 이후 80년 동안 지속된 달러 패권의 위기에 대한 심각한 논의들이 제출되는 요즘이다. 세부적으로 중요한 정보들이 많이 보도되고 있지만, 그조차도 ‘달러의 근원지’인 미국의 학자, 금융 관계자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한 정보들은 월가 또는 자본주의 금융에 대해서는 상세할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그러한 상황을 야기하는 ‘달러 없는 세계경제’를 추진하는 주체들의 전략과 논리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맹점이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서방 중심의 ‘달러 이후의 질서’ 논의를 뛰어넘는 새로운 관점과 정보로 탈달러 거버넌스 구축의 경로를 예상한다.
특히 저자는 유라시아경제연합의 현 통합거시경제장관 세르게이 글라지예프와의 상세한 교류를 통해 이른바 R5(런민비-인민폐, 루블, 루피, 헤알-레알, 랜드. 브릭스 국가들의 통화가 영문명으로 모두 R로 시작하여 붙은 별칭)를 사용하는 브릭스 국가들의 ‘새로운 결제수단’(향후 준비통화로 발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켜보아야 함)에 관한 구상 및 진행 상황을 다루고 있다.
탈달러 거버넌스의 출발점은 달러를 무기화하고 그 속에서 타 국가의 외환을 제재의 형태로 강탈해 온 미국의 정책이다. 최근 많이 회자 되는 트리핀 딜레마, 미란 보고서 전략은 사실상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한계를 누설한 것이다. 달러로 인한 피해를 벗어나 자신들의 경제 현실에 부합하는 자주적인 경제 체계로서의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것이 새로운 화폐의 지향이며, 동시에 이는 미국 중심의 비효율적 금융 경제체제보다 우월한 “중앙집권적 전략 계획과 시장경제의 이점, 화폐와 물리적 인프라의 국가 통제와 기업가 정신의 이점을 결합”한 다극세계권의 새로운 실물 중심 경제체제에 어울리는 체계다.
탈달러 세계경제 거버넌스는 먼저 상호 경제 교류 과정을 자신들의 통화로 진행하는 단계(달러 사용을 급격히 줄인다)를 착실히 거친 후, 2단계에서 달러를 참조하지 않는 새로운 가격 형성 체계(결제수단)를 고안하고, 3단계에서 투명성·공정성·선의·효율 원칙의 준비통화 창설을 실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계획이다(52~55쪽). 매 단계를 관통하는 4대 핵심 사안은 금 및 핵심 자원, 실제 생산 능력에 기반한 GDP, 디지털 결합(스테이블 코인 등), 주권에 기반을 둔 상호 신뢰와 호혜성이다. 현재 브릭스 국가들을 시작으로 자신들의 교역을 자기 화폐 기반으로 진행하는 일은 이미 꽤 궤도에 올라서고 있으며, 이에 대해 미국은 “공황”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306쪽). 그것만으로도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에는 이상이 생길 수밖에 없고, 이는 곧 천문학적 재정 적자에 시달리는 미국의 경제 붕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달러 이후의 거버넌스’ 수립은 가능할까? 저자는 시행착오는 많겠지만, 미래는 밝다고 전망한다. 다극세계권 국가들의 국민 경제가 실질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상호 신뢰와 연결을 통한 확장이 점점 강력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상황은 “인간적 교류에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