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그림을관람하는가,
아니면완성하는가
그림은언제완성되는가.화가가마지막붓질을마치는순간일까,액자에걸려미술관벽에놓이는순간일까,아니면누군가그앞에멈춰서서자기만의시선으로그림을다시보기시작하는순간일까.『그림속철학풍경』은이낯설지만근본적인질문에서출발한다.이책은벨라스케스,마그리트,마네의그림을해설하거나푸코의철학을쉽게풀어설명하는데머물지않고,그림을바라보는우리의시선자체를하나의철학적사건으로바꾸어놓는다.우리는그림을관람하는가,아니면완성하는가.
푸코는『말과사물』의첫장을벨라스케스의〈시녀들〉로연다.한화가가캔버스앞에서있고,공주와시녀들,난쟁이와개,어렴풋한거울속국왕부부가한공간에놓여있다.그런데화가는그림속인물만이아니라캔버스밖의관람자를본다.그순간관람자는그림을바라보는자에서그림속빈자리를채우는참여자가된다.푸코가이그림에서발견한것도바로그빈자리였다.그곳은아무것도없는공백이아니라,보이지않는시선과권력,재현의질서가교차하는자리이다.그림은그빈자리를끝내메우지않은채우리를기다린다.
보이는것과말해지는것사이,
마그리트가흔든재현의질서
“이것은파이프가아니다.”마그리트의〈이미지의배반〉앞에서우리는익숙한혼란을경험한다.파이프가그려져있지만,그림아래에는파이프가아니라고적혀있기때문이다.눈은파이프를보는데,언어는그것을부정한다.그렇다면우리는무엇을믿어야할까.『그림속철학풍경』은이오래된질문을단순한언어유희나초현실주의의역설로설명하지않는다.오히려이미지와언어가서로를지시하고흔드는틈새에서철학이시작된다고말한다.
푸코가마그리트에게서발견한것은그림과말의대립이아니라,둘사이에남겨진열린공간이다.그림은말의설명이아니고,말역시그림의정답이아니다.둘은서로를배반하면서도새로운의미를생성하고,그빈틈을관람자의사유가메운다.저자는이과정을따라가며우리가무엇을보고무엇을안다고믿는지를끊임없이의심하는태도가바로철학임을설득력있게보여준다.
현대는그림속에서시작된다
마네가일으킨시선의전환
이책의중심에는마네가있다.푸코는마네를근대회화의혁신가를넘어‘현대성의기획자’로위치지운다.저자는그이유를마네의공간과인물,사건을따라차근차근설명한다.그의캔버스에서공간은더이상안정적인원근법에머물지않고,인물들의관계역시분명하면서도끝내모호하게남는다.그림은하나의장면을보여주면서도,그장면을바라보는우리의위치를끊임없이뒤흔든다.
푸코는바로이지점에서현대성의시발을본다.현대성이란새로운시대를선언하는거창한구호가아니라,세계를바라보는우리의시선이더이상하나의중심에머물수없다는자각이다.마네의그림은우리를향해시선을돌리고,우리는더이상그림밖에머물수없게된다.현대성은그렇게하나의시대가아니라,관람자의자리가바뀌는순간비로소시작된다.
현재를다시그리는푸코,
삶이라는미완의캔버스
벨라스케스가관람자를그림속으로불러들이고,마그리트가이미지와언어사이의틈을열어보이며,마네가관람자의자리를뒤흔들었다면,푸코의사유는마침내그시선을우리자신의삶으로돌려놓는다.저자는푸코의‘헤테로토피아’와‘헤테로크니아’라는개념을통해,공간과시간이하나의질서로고정된것이아니라끊임없이분할되고중첩되며새롭게구성되는것임을보여준다.그림속거울과캔버스,시선과공간은더이상미술의요소가아니다.그것은우리가세계를경험하고이해하는방식자체를드러내는철학의언어가된다.
“모든사람의삶이예술작품이될수는없을까?왜램프나집은예술대상이되어야하지만,우리의삶은그럴수없는것인가?”(푸코,1982)
그렇다면『그림속철학풍경』이도착하는곳은어디일까.종착지는미술관도,철학사의한장면도아니다.그곳은지금이순간,우리가살고있는삶이다.우리는하나의세계를살아간다고믿지만,우리의삶은서로다른시선과관계,기억과시간이끝없이교차하는거대한캔버스위에놓여있다.저자는푸코의입을빌려다음과같이묻는다.우리의삶역시,또다른응시를기다리는하나의미완의캔버스는아닐까.결국이책이다시그리는것은그림이아니라,지금우리의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