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고요가 내 눈동자를 흔들었으므로- 브로콜리숲 시집 5

당신의 고요가 내 눈동자를 흔들었으므로- 브로콜리숲 시집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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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은경

저자 : 이은경
내 할아버지의 입말에서 태어나 그분의 이야기로 세상을 배웠다. 2010년 《수필시대》에 「카타르시스」가 신인상에 당선되었고, 기행 수필을 오래 연재했다. 지금은 세상의 뒤편, 빈 그늘의 장면을 쓴다.

목차

시인의말_

1부

가시의 정색正色 012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에게 013
새벽 세 시의 편지 014 새벽 네 시 반의 답장 015
다시, 오늘의 끝에서 016 진토닉을 마시고 017
황혼 018 나는 아직 여기 있어요 1 019
파동 020 바람 022 추상 023 Still 024
마주 앉은 사람에게 027 점심 지나 두 시 028
춤추는 가로등 030 공명共鳴 032

2부

비대칭 어깨 036 안부는 묻지 마 038
무인칭 040 일종의 외로움 042 삶 044
벚꽃이 저물어 045 명자에게 046
이별이 다가올 때 048 시커먼 구멍 049
꿈 1 050 12월 첫 052 플러스 47 054
약속 056 불면 058 p.s. 059
노인 주간보호센터 060

3부

결핍 064 딸딸딸 066 나 지금 떠난다 068
대화 070 여름 074 땀 077 바람 부는 날 078
점심시간 080 두 개의 가을 083 쓸모 084
형곡동에서 086 남구미 대교 088
친구 090 나는 아직 여기 있어요 2 092
누구는 울고 누구는 웃는 094 오태교 광평천 096
늦여름 098

4부

중력 102 몽돌 소리 103
아주 오래전, 빛나는 마당에 앉아104
과거 106 경계선 108 천생산 110
현상 112 죽은 자의 도시에서 114
꽁무니에는 미래가 매달리고 116 영춘화 118
터무니의 집합 120 불꽃놀이 122
바람의 진동124 사이 126 35.8도 128
가고, 남고, 오는 130 허무맹랑한 위로 132

해설_떨림의 사색_김동원

출판사 서평

타인의 곁을 지키는 ‘눈물겨운 공명’의 서사

이은경의 시는 소란스럽지 않다. 오히려 침묵에 가까운 정적 속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과 외로움을 향해 끊임없이 번져나가는 부드러운 ‘파동’이다.

시집 전반을 관통하는 새벽의 공기는 무겁고 서늘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따뜻하다. 시인은 홀로 선 장미의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면서도 “상처로 일러 준 레드의 정색(正色)”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버스 앞자리에 앉아 서러움을 토해내는 낯선 타인의 혼잣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준다. 인지 장애를 앓는 노인의 가벼운 몸을 받아낼 때 전해지는 무게가 ‘젖은 솜이불’ 같았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타인의 고통을 제 몸으로 고스란히 앓아내는 시인 특유의 깊은 연민과 공명(共鳴)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녀의 언어는 화려한 수식 대신 일상의 낮고 구석진 자리를 비춘다. 밥을 먹는 아이 앞에서 오무린 입술로 바람을 부는 젊은 아버지의 풍경을 ‘박카스 한 병’ 같은 위로로 삼고, 늙은 펭귄처럼 뒤뚱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너는 노인의 가방을 보며 ‘귀엽다’는 말이 사실은 ‘딱하다’의 노란 거짓말임을 간파해 낸다.

결국 이 시집은 “당신을 외면해야만 /나를 볼 수 있는 /이 따뜻한 아픔”에 대한 이야기다. 시인이 던지는 문장들은 우리의 단단한 벽을 흔들고, 흐르지 못한 채 고여 있던 눈물을 기어이 왈칵 쏟아내게 만든다. 누군가의 고요가 내 눈을 흔들 때, 그리하여 내 안의 파도가 시작될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삶의 슬픔과 기쁨이 뭉쳐진 자리에 맨발을 디디고 서서 깊은 떨림을 느끼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이 시집을 권한다.

[시인의 말]

아무 일도 없는 새벽,
사물들이 저마다
다른 얼굴을 달고 나온다.
고요가 흔들려 물끄러미 보았다.
관계없던 것들이 한곳에서 만나고,
그 틈에 내가 모르는 나와
당신이 모르는 당신이 있었다.
버티던 나는
지푸라기를 잡았다.
나무에 미안한 짓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책 속에서

가을 저물기 전에
밥이나 먹자던 친구가
느닷없이 떠나버렸다는
부고를 받은 남자

알 수 없는 표정
픽, 콧김이 새어나오고
멱살 잡힌 울음이
그의 얼굴 위로 자빠진다

꾹 다문 입술이 울대를 막아
흔들리는 목구멍은 묵음이다

시커먼 양복이 내려가는,
침목 계단 위에 들썩이는
어깨의 비대칭이 선명하다

기어이 남을 계절은
눈치 없이 환하다

-「비대칭 어깨」 전문


오래된 나무책상 위
잉크 자국은
세월이 남긴 옹이 속 얼룩이다

손가락 끝에 걸리는 자국
그 속으로 빠질 때마다,
지나간 시절의 묵음이
방안을 채운다

공기가 무거워 내려온다
살아있어 슬프다

-「삶」 전문


말이 자꾸
길을 잃어 멈춥니다
등짝이
어지럽습니다

반사적으로 주저앉아
나무바닥을 짚은
손가락이 파르르
흔들립니다

엄마, 눈이 왔어

식은땀
닦고 있을 동안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첫눈이 오다
말았습니다

-「약속」 전문


‘아이구, 아부지. 아부지.’
남자의 얼굴이 달덩이처럼 환했다
너머의 아버지를 보는 걸까

‘뭐가 그렇게 좋아?’

‘아부지가 장난쳐’

이 대답은 어느 쪽에서
건너온 목소리인지,
무슨 농을 치셨기에
아드님 저렇게 웃으시나

오래 곰국을 달였다
엉덩이 타는 냄새 버텼을 시간 뒤
검은 국물을 품고 앉은 약탕기처럼
지난한 생의 냉기가 뜨거워진다

오늘이 일어나기도 전,
울릉도가 나를불렀다
오늘, 와야한다고

너머에서 여기로 건너 온
신호 덥석 쥐고 길을 나섰다

대문 밖에는, 밤새 나 대신 자다
눈 뜨지 못한 마당이 머리 위로
달을 이고 어스름한 해를 품어
스스로 물들고 있었다

어제 저녁이 오던 불꽃 같았다
오늘이 갓 피운 불꽃 같았다
그래, 모든 걸 미루고 떠난다
나, 지금 떠난다

-「나 지금 떠난다」 전문


가슴골로 흐르는 더위가
몇 번을 돌아 강 하나를 건너
나 사는 이 곳에 닿을 즈음

당신을 만나면 꼭
멀고먼 생에서부터 왔을 형체가
무엇이 되어 있더라도
대번 알아보겠다고 약속했었지요

그 약속 잊은 채
내 앞에 당신을 두고 돌아섭니다

뒤집어 쓰면
온 몸의 털이 쨍하던
남산동 413번지 그,
샘이 그리운 뙤약볕 아래

가을 두 개가 나란히 흔들립니다

-「두 개의 가을」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