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떼가 나를 자꾸 불러내고 (정용기 시집)

나비 떼가 나를 자꾸 불러내고 (정용기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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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따금 창밖에서 나비처럼 눈송이 펄펄 날리는 날은 나비 떼가 나를 자꾸 불러내요
[나비 떼가 나를 자꾸 불러내고]는 정용기 시인의 다섯 번째 신작 시집으로, 「빗방울 농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까」 「A4 자서전」 등 58편이 실려 있다.
정용기 시인은 2001년 [심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하현달을 보다] [도화역과 도원역 사이] [어쨌거나 다음 생에는] [주점 타클라마칸] [나비 떼가 나를 자꾸 불러내고]를 썼다.

봄은 다시 왔다. 도시의 봄밤은 시리고 황량하다. 이곳의 봄밤은 방생도, 노래도, 울음도 없다. 예순의 봄밤을 “창백한 청춘들”이 물려받았지만, 아직도 겨울이다. 벚꽃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피었는데 정작 그 밑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창백한 청춘들”은 아무런 삶의 의미도 채우지 못한 채 공허할 뿐이다. 그사이에 도시의 속도는 진화했다. 빗방울을 차창에 매달고 치닫던 속도는 시장의 요구에 발맞춰 경량화되었다. “배달 오토바이”와 “유통기한”에 쫓긴 청춘들의 하루의 일당은 언제나 얄팍하기만 하다. 온갖 것들이 다 있다는 편의점에는 정작 있어야 할 것들이 없었다. 꽃처럼 피어나야 할 존재들이 “꽃샘추위”를 온몸으로 견디며 “간당간당하게” 버텼다. 예순의 시선은 손자를 대했을 때처럼 자신이 가진 “한 시간”이라도 저들에게 나눠 줘야겠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25시 편의점」)
그 예순의 마음에서 비롯된 “뜨거운 밧줄”은 뜨끈한 밥과 같다. 차가운 “삼각김밥”과 “불어 터진 컵라면” 같은 인스턴트식품이 아니라(「25시 편의점」), “밥통에서 밥을 얼마든지 퍼다 먹을 수 있는” 정겹고 뜨거운 밥상을 그들 앞에 펼쳐 줘야 했다(「말복」). 아직 살아 있는 존재의 온기를 수소문해 온 시인에게 ‘시’는 인간이 품어야 할 환희와 울음이었다. 그렇게 시를 쓸 때마다 그의 마음은 “소리의 높낮이가 아직도 살아 있는” 곳으로 향한다(「낙안들이 나안들로」). 정말로 “폭탄이 터지면 자주색 꽃잎이 휘날릴지도” 모르고, “아니면 당신의 오래된 서랍 속 비밀을 미주알고주알 풀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수국」). 앞으로 채워 나가야 할 찬란한 순간들이 비록 많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바쁜 시간에 쫓겨 “차곡차곡 개켜져 상자 속에 감금”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시인은 저들에게 말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빨래 보고서」).
시집 마지막에 실린 짧은 “자서전”을 쓴 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A4 자서전」). 이 짧은 생의 기록들이 청춘들을 포함한 “당신들”에게 읽힐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만약 시간이 된다면, “뜨듯한 자서전 한 장” 위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고 인간다운 온기를 손끝으로 느껴 보길 바란다. 여기까지 눈빛이 당도했다면, 당신들은 이것으로 ‘정용기’라는 한 사람의 불온하고 뜨거운 자서전을 읽은 것이다. 문법에 맞지 않는 “뒤엉킨 문장”들이 실뿌리처럼 어지럽게 보여도 그 위에 피어날 “초록의 촛불”을 상상하라(「양파의 겨우살이」). 촛불을 켜면 아이러니하게도 주변이 어두워질 것이니 그때 다시 이 시집 [나비 떼가 나를 자꾸 불러내고]의 맨 앞으로 되돌아가서 지금도 변함없이 “잘 익은 알전등 하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라.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한 권의 책”이 눈앞에 펼쳐져 있을 것이다.(「모과」) 자, 그럼 이제부터 거기에 당신의 이야기를 쓰라. (이상 정재훈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저자

정용기

저자:정용기
2001년[심상]을통해시인으로등단했다.
시집[하현달을보다][도화역과도원역사이][어쨌거나다음생에는][주점타클라마칸][나비떼가나를자꾸불러내고]를썼다.

목차

시인의말

제1부잘익은알전등하나
모과-11
디퓨저-12
빗방울농사-13
양파의겨우살이-14
책벌레-16
대설-18
아코디언-19
허수아비약전(略傳)-20
느티나무그림자-22
동백숲에들다-23
라이너쿤체-24
붉나무-25
나팔꽃3-26
물매화-27
기와불寺-28

제2부봄다음에또봄이오고
백일홍-31
황궁반점후일담-32
일몰증후군-34
띠실마을-36
매미1-38
매미2-39
매미3-40
사각지대-41
달순씨닭집-42
타래난초-44
시소놀이-45
나비를깨우다-46
치마폭-48
25시편의점-50
말복-52

제3부밀항을나서야할때
복사꽃피는밤-55
낙안들이나안들로-56
빨래보고서-58
고양이를수소문하다-60
부겐빌레아-62
산벚꽃초대를기다리다-63
수국-64
아궁이-66
편지-67
저수지-68
밀항-69
수레국화-72
벼룩시장-74
하지-75

제4부무궁화꽃이피었습니까
홍도화-79
층간소음-80
텰슈뎐(哲秀傳)-82
굥비어천가(○飛御天歌)-84
코끼리냉장고-88
전국학력평가-90
달걀귀신-92
무궁화꽃이피었습니까-94
단군신화속편-96
비문증-98
맨홀을엿보다-100
머나먼코트디부아르-102
부고-103
A4자서전-104

해설정재훈예순의봄날동안잘익은시집하나-105

출판사 서평

추천사

정용기시인의이번시집전체를불태우고있는장면을옮겨적자면이러하다.“출구를봉인한채화르르불타오르는저동백숲에서화근내삼키며서성거리느니/자백하건대나를가둔,내가가둔저붉은꽃잎은이번생의배수진이다.”(동백숲에들다)“저붉은꽃”은두말할것없이‘동백’을이어받은구절이지만오롯이‘시’를가리키고있다는것쯤은누구나알일이다.그러니‘시’는‘나’를가두고있고‘나’또한‘시’를가두고있다는게자백의한맥락이고,그것이지금도결코물러설수없는형국이라는사실을자인하는게이에겹친문맥이다.얼핏보자면이문장은시인으로서의‘나’를한껏드러내고있지만,속내를짚자면‘나’와‘시’가연루되어서로결박하고있다는점에서참으로어찌할수없는난경을적시한다.어느정도냐하면“화근내”곧탄내를삼키고‘시’앞에서성이고있다고말할만큼말이다.다른형상을이끌어오자면“자기가내리친칼날을/자기가슴으로고스란히받아내는”닭집“달순씨”가시인자신인셈이다.“달순씨”는“닭의배”를가르면서“무지개서던화양연화의나날을수소문”하고있지만이는무용한일이다.(달순씨닭집)덧붙여야겠다.같은시에서손꼽는“화양연화의나날”이나“보름달”,“달빛아래읽던연애편지”,“두근거리는봄밤”,“날마다낳던알”,“신데렐라의유리구두”는시가아니다.시는“자기가”자신을향해“내리친칼날”이다.어찌보면동귀어진이라고도할수있을이참상은그러나그것이바로생의실재이자시의본래면목이아니겠는가.뒤집어말하자면“매화와산수유꽃사이”는“꽃과열매”,“부패와발효”,“뭍과물”,“양심과앙심”,“바다와바닥”,“미움과믿음”,“간사함과근사함”,“불안과불만”,“악랄과발랄”,“악수(幄手)와악수(惡手)”,“소금과소름”“사이”이기도하지만그곳은실은“매화와산수유꽃”이만발한곳이며그런맥락에서“부패와발효”등속모두꽃이다(층간소음).“얼떨결에지나쳐버린사각지대”는어쩌면저“사이”들자체이자그어우러짐이다.그곳은“언제나절정이었고”“매번절경이었다”.(사각지대)이순과세살간의“시소놀이”처럼말이다(시소놀이).화양연화라니!화엄이다.
―채상우시인

시인의말

꽃밭의저나비,
징그러운애벌레와
막막한번데기의곡절을지나고서야
겨우얻는한쌍의날개!

찔레꽃은또피는데,
애벌레도번데기도거치지않고서
어깻죽지가가려우니
이무슨파렴치란말이냐!

책속에서

<빗방울농사>

경칩지나봄비오시는날

차창에필사적으로매달리는저빗방울들,
뿌리쳐도따라붙는저난생(卵生)의결사대,
꼬리를길게끄는저끈질긴올챙이떼,

눈물방울같은저올챙이들을
복장뼈안쪽에고이고이모셔다가
봄밤을보낼밑천으로농사를지어야겠다.
춘분청명어름에는먹을것도지천이라
조팝나무이팝나무가차려내는수만그릇하얀쌀밥
아침저녁으로챙겨주면서잘키워야겠다.

날름날름받아먹으며뒷다리가자라고,
앞다리가생기고,꼬리가떨어져나가고,
봄밤의들판에저양서류들방생을하면
울음주머니부풀려한바가지씩밤새노래를쏟아낼터이니
저갸륵하고다소곳한후렴구들로
봄밤은울울창창소리의꽃밭이될터이니.

<무궁화꽃이피었습니까>

나는늘등을보이는술래입니다.
가위바위보,늘지기만하는술래입니다.
늘방심하고늘허술합니다.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무궁화꽃이피었다고믿고늘뒤늦게돌아섭니다.
그사이에검은그림자가서서히다가옵니다.
또다시무궁화꽃이피었다고믿고돌아섭니다.
내가못본사이에어둠이더가까이죄어옵니다.
무궁화꽃이피었다고거듭믿고또믿는그사이에
더러운손아귀들이내등을덮칩니다.
불온한덩굴손이내목을조입니다.
날카로운송곳니가내목덜미를물어뜯습니다.
천기(天氣)를어지럽히는자들이
보이지않는곳에서환락의축제를벌입니다.
등뒤에칼을숨긴자들이내등을노리고있습니다.
음모는늘등뒤에서발자국소리도없이다가옵니다.

나는오늘도술래입니다.
내등이위태롭습니다.
무궁화꽃이피었습니까?



A4용지한장에내자서전을담습니다.

수식어는없고주어서술어가뒤엉킨문장으로내삶을요약합니다.날개한번펼쳐보지못했습니다.횃대에올라본적없습니다.모래목욕은내삶의목록에없습니다.당신들이큰맘먹고마련해준사글셋방에서날마다사글세를지불합니다.배터리케이지안에서애비없는알을날마다낳아줍니다.대사에너지가높다는사료가지겨울때때때로죽은동료를쪼아먹는다고비난하기도하지만당신들이탈탈털어간내삶이좆같습니다.당신들이핥아먹느라헐어버린내똥짜바리가역겨워미치겠습니다.종이한장에갇힌내삶이추악하여깃털을뽑으면서자해를하고악몽에시달립니다.추레한내삶을A4용지한장으로마무리합니다.방금낳은,갓복사된A4용지의뜨듯한자서전한장을당신들에게부칩니다.

종이한장으로내삶을망쳐버렸습니다.

*배터리케이지:산란계를한정된공간에서밀집사육하기위해사용하는케이지.일반적으로케이지한개의크기는가로50㎝,세로50㎝,높이30㎝이며한케이지에산란계여섯마리정도를사육한다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