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을 생각했다 (박혜경 시집)

한 사람을 생각했다 (박혜경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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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모두를 닮았으나 누구와도 닮지 않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했다]는 박혜경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으로, 「너의 생일」 「감은 네 눈동자 속으로」 「선향의 모자」 등 50편이 실려 있다. 박혜경은 2015년 [작가세계]를 통해 시인으로,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시집 [한 사람을 생각했다], 비평집 [상처와 응시] [오르페우스의 시선으로], 인문학에세이집 [당신의 차이를 즐겨라] 등을 썼다.
박혜경은 첫 시집 [한 사람을 생각했다]에서 도착(倒錯)을 기본 형식으로 갖는 썩 희귀한 시 세계를 조성하고 있다. 박혜경의 도착은 생성적이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위해 의식적으로 고안된 것이다. 실로 에라스무스에게 도착이 풍자의 한 방식이라면 박혜경에게는 생존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박혜경에게 이 도착은 필사적이다. 그리고 시인 박혜경의 사회적 자세는 매우 강한 ‘여성주의’의 그것이라는 점이 놀랍다. 평론가 박혜경과 오랫동안 함께해 온 기억 속의 박혜경은 오로지 미적 취향에 몰입해 온 사람이었다. 물론 평론가 박혜경과의 공동 작업을 중단한 지 20년가량 흘렀기도 하다. 20년이라! 옛날에도 강산이 두 번 변하는 시간이다. 현대로 올수록 변화의 속도는 가속화되어 왔다. 그러나 속도가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젠더 상황이 거듭 악화되었거나 혹은 부각되어 온 정황이 시인 박혜경의 사회적 태도에 영향을 준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그 점에서 박혜경의 시는 그 정황에 대응하는 썩 의미심장한 하나의 방법을 제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 정과리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저자

박혜경

저자:박혜경
2015년[작가세계]를통해시인으로,1987년[동아일보]신춘문예를통해문학평론가로등단했다.
시집[한사람을생각했다],비평집[상처와응시][오르페우스의시선으로],인문학에세이집[당신의차이를즐겨라]등을썼다.

목차

시인의말

제1부여자는상점의어두운문앞에서있었다
정전11
항로를그리던시간14
감은네눈동자속으로19
너의생일―모든존재는탄생의시간을지나간다22
x26
정희의모자31
혜선의모자34
두개의시퀀스39
뤼미에르공장을나서는노동자들42
행복45
진흙으로만든배한척48
폭설51
마술사54

제2부모두와닮았으나누구와도닮지않은
도시의카툰59
개그맨62
눈오리64
선향의모자67
미선의모자72
자연사박물관75
오래된항구78
고생대의바다와현생인류80
그녀의방82
눈물84
LaVieEnRose―어떤짐작에관한가설86
당신의디자인88
손잡이90

제3부장면속에끝까지남은자가되어
사랑은어떻게시작되는가95
팔월의비98
흰담비들은수풀속으로사라져101
손가락지도104
다섯사람의행인106
목각인형108
챙넓은모자111
핫초코와아이스크림114
의자의용도116
슬리퍼118
거울의얼굴120

제4부최면의시간은끝났습니다
한사람125
카운트다운126
렌즈와파동128
부두131
투명한촉각132
옥상의날들134
올가미137
SOLDOUT140
조용한상자142
벚나무의시간145
당신의모자148
우리150
모이라152

해설
정과리여성성의한측면:소외속의도착이노리는것154

출판사 서평

추천사

박혜경시에는특이한리얼리티가있다.현실을반영하는데,몽환적이다.그는이미지만드는능력이탁월하다.어디서이렇게끊임없이이미지가,그리고이야기가솟아나오는걸까.
“검은액체가항해하는내몸의항로가/지도위에남은흐릿한흔적처럼선명해요”(항로를그리던시간).
“흐릿한”데그토록“선명”해서그“흔적”,이미지가샘솟는걸멈출수없네.선병질적으로집요한,그것은도망일까추격일까.환상일까현상일까.
그의시들은내게‘평행이론’을떠오르게한다.흐르는강물이수많은물결로이루어져있듯,땋아지고풀어헤쳐지는겹겹의존재,겹겹의삶.마치흩어진존재의파편들이완전체를지향하여나아가듯거침없는박혜경시의언술을보면,내시와사고가얼마나진부한가,얼마나낡았나,절감하게된다.
시집속의어떤문장은일렁거리고어떤문장은출렁거린다.그렇게견결하고선명한시퀀스가하나둘태어난다.박혜경의상상력,즉영혼의세계는풍요롭고섬세하고신비하다.그런데,그시를읽으면가슴이저릿하고쓸쓸해진다.왜지?
―황인숙시인

시인의말

입안에쓴물이고이듯
언제든내게꺼내보여줄
변명을준비하지않고는
살아내기힘든시간들이있었다고
당신은내게말했었다.

거울속에
내가있다.

거울속에는
거울만있다.

책속에서

<너의생일>
―모든존재는탄생의시간을지나간다

그릇에담기면그릇의형태로만들어진다는점에서
빛은물의속성을닮았다

너의생일을축하하기위해
우리는둥근술잔을들어올렸다

각자의사막을걸어여기에도착하는동안
누구는사막여우의길고뾰족한귀를보았고
누구는모래속으로사라지는전갈을보았고
누구는낙타들의대상을따라오래
밤과낮이바뀐사구의길을걸었다

잔에담긴술이부드럽게뺨을달구며
목안으로흘러드는동안
떠들썩한우리의머리위에는
미래를비추는고요한전등처럼
노란창문이열려있었다

먼훗날창안의빛은
유리잔에담긴물처럼반짝일것이다

그릇을떠나는순간그릇의형태를잊는다는점에서
빛과물은불의속성을닮았다
마른풀에불을지피듯
말들이타오른다
찰랑이며부딪히는잔들사이로
말이물처럼흘러다녔다

어떤말은밝고
어떤말은어둡다
어떤물은차갑고
어떤물은뜨겁다

그날탄생의축제한가운데서있던검은그림자는
미래에서온것일까
과거에서온것일까

모든빛은과거에서오는것
어둠속에더욱빛나는창들을바라보며
우리는알게되지
얼마나자주우리는
어제의창을열고먼훗날의불빛을바라보는가
기억으로만든빛은
기억의형상을재현할뿐
건물로부터흘러나온불빛이
창의형상을재현하듯

창들이허공에서부서지네
물이불속에서타오르네
어떤잔으로도담을수없는
넘치는취기속에서
우리는또한번물과불과빛으로가득한
탄생의시간들을지나간다
우리가서로다른색으로빛나던탄생의문을지나
여기도착한지금

이토록찰랑이는지금
이토록넘치는취기속에서
지금후에남겨질우리는
상상하지않기로해
상상속에도착할추운일들은
유리잔에담지않기로해

물과불과빛이사라진긴공허의시간을지나
모두에게공평하게당도할탄생의주기를기억하며
여기다시모일우리

우리가붉게달아오른서로의눈을보며
깨끗한기쁨으로빛났던여기

먼곳에서바라보는창들이
잠시따뜻했던여기

너의생일을축하해!

<감은네눈동자속으로>

예순다섯의네가
열아홉의너를만나는날
바다는색을바꾸었다
푸른빛에서잿빛으로
잿빛에서다시푸른빛으로
너는놀이터옆벤치에앉아있었고
스무살이된너는지하철개찰구를나와
지하상가로이어지는긴통로를걸어간다
열일곱의네가음악분수대가는길을물었을때
스물둘의너는지하상가에서산샌들을신고
놀이터에서혼자모래놀이를하는
다섯살의너를지나쳤다
서른한번째생일을맞은날아침
너는지하철충무로역에스컬레이터를오르며
스물셋의너를엇갈려지나간다
마흔둘의네가고속도로톨게이트를빠져나갈때
일곱살이된너는장난감가게에진열된
나무블록을향해손을뻗고있다
열아홉과스물둘의너를지나쳐
너는일흔다섯의너를만난다
너의임종을보기위해모인사람들에게
무언가를말하려는듯떨리는입술을달싹거리는
너는오래전산낡은샌들을신고
낯선도시의육교를오르고있다
정오의뜨거운햇빛이해고를통보받은
마흔일곱살네정수리로쏟아져내리고
일흔다섯의네가입원한병원앞을
스물다섯의네가친구들의팔짱을끼고
웃음을터뜨리며지나간다
노란플라스틱삽,빨간바스켓,
파란물뿌리개가흩어진모래놀이터를지나
열두살의네가머리칼을흩날리며
공원분수대로뛰어간다
서른다섯의너는모래놀이로더러워진
다섯살딸의손을잡고
등뒤를비끼는시월의햇살속에
막음악이흘러나오기시작하는
분수대를향해걸어간다

떨리는입술사이로너의마지막말이흘러나오는시간
쉰여덟의너는겨울해변을향해차를몰고있다

너는차가운해변에홀로누워있다

네가짧은잠에서깨어
바다를향해고개를돌렸을때
감은네눈동자속으로
파도의무수한빛과색이쏟아져들어왔다

이걸로충분해

해변으로밀려온긴파도가
모래위에남겨진발자국을쓸고갔다

<선향의모자?

춤은한참뒤에이르기전까지춤처럼보이지않는다

선향은선하고향기로운아이입니다
선향은자신의이름을좋아했어요
이름을부르면선물을받은듯기뻐지는마음이어서
선향은자꾸만자신의이름을불렀어요

내이름은김선향입니다
내이름은김선향입니다

사월화창한어느날
선향은학교신발장에서
자신의신발이없어졌음을알게됩니다

나란히놓인색색의뒤꿈치들사이에
유독한자리만검게구멍이나있었어요

선향은사라진신발을신고집에돌아옵니다

일주일후다음날
선향은사물함을열었어요
늘선향과함께다니는
선향의모든것을알고있는
모자의빈자리가보이는군요

선향은비어있는모자를쓰고
사물함들로이어진긴복도를지나집에돌아옵니다

그날은거리에아무도없었어요
모자가사라지자선향도사라졌기때문입니다

다시일주일후다음날
교장선생님의훈시를들으며
선향은뜨거운운동장에서있었어요
같은방향으로나란히누워있는그림자들사이에
선향의그림자만비어있네요

아무도선향을본사람은없습니다
선향은오직선향에게만보입니다

선향은한무리의아이들로에워싸인
더러운화장실안에서
자신의모습을발견합니다
선향의머리통을누르고있는악력이
붉게달아오른선향의귀에
검고긴혓바닥을쑤셔박고있군요

병신아!죽어!죽어!죽어!

선향은자신이왜그곳에있는지모르는장소에서깨어납니다

선향은자신이왜그곳에가려는지모르는장소로걸어갑니다

그곳은선향만이알고있는장소이기때문입니다

선향은다만모르는것을아는사람일뿐

선향은다만아는것을모르는사람일뿐

얼음을끌어안고있는선향을
얼음이끌어안습니다
얼어붙은호수밑의세계는
투명하고고요해
선향의신발과모자와그림자가
멈춰버린그대로잠겨있습니다

모자를쓰거나쓰지않은사람들이
짧은환영처럼
호숫가로몰려왔다몰려갑니다

호수옆벤치에선향이앉아있어요
선향의머리위로
흰빛의오후가내려앉아요
나무위에는바람이걸어놓은
선향의모자가춤추듯흔들리고있어요

선향은선물을준사람처럼기뻐져서
나무를향해천천히자신의이름을불러봅니다

내이름은김선향입니다

*춤은한참뒤에이르기전까지춤처럼보이지않는다:뮤리얼루카이저,[어둠의속도],박선아역,봄날의책,2020,p.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