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몽주스를 좋아하지 자몽을 좋아하지 않아 - 파란시선 165

자몽주스를 좋아하지 자몽을 좋아하지 않아 - 파란시선 165

$12.00
저자

한보경

저자:한보경
2009년[불교문예]를통해시인으로등단했다.
시집[여기가거기였을때][덤,덤][자몽주스를좋아하지자몽을좋아하지않아],산문집[사탕과버찌]를썼다.

목차

시인의말

제1부

우리는머나먼이국에서온이방인이어서11
이름이조르바였던조르바12
일방통행로14
메노포즈16
우리는모르는게많아서18
새라고부르기20
새샘슈퍼22
노포동두시24
언더독에얽힌알려지지않은이야기26
차귀(遮歸)28

제2부

비온뒤첫소금33
자몽주스를좋아하지자몽을좋아하지않아34
징조36
묵비권38
나바위길40
봄눈42
비둘기의시간44
문신과타투46
낡은양말48
이름이바다였던바다50

제3부

반전55
바람의기억56
거울앞에서58
화양연화60
씹고물어뜯기딱좋은62
퀼트64
엎드린말66
목요일의일과68
곰소70
미담72

제4부

트와일라잇존177
트와일라잇존280
클리세182
클리세284
아이스크림을옮기는북극곰86
아모르파티88
빨강모자90
친절하게주(註)를달아주는친절하지않은당신92
장마주의보94
트레이싱페이퍼96

제5부

테드휴즈의아홉가지레시피101
페이스메이커104
봄비106
그림자의바깥108
말하지못한사연110
떨켜112
간절의틈새에손가락이끼다114
개와하모니카116
어바웃타임118
고요120

해설양균원생략과대조의복화술122

출판사 서평

시인의말

커다란착각앞에마주선다
다행이다


책속에서

등을서로등지고다른방향을사랑했다영원이라착각했던습관을버리지못하고다른방향을같은방향이라고겨루었다

똑같은꽃무늬가그려진찻잔을마주놓고똑같은차를우려내는짧은순간들이우리를일몰의눈빛으로데려왔다은은하게번져가는멀버리향에젖어고단한방향을멀리두고갈라진찻잔틈에서한송이꽃이피기를기다렸다

우리는우리가아닌적이없었다우리를둘러싼각진모서리들이팽팽하게잡아당긴방향을내려놓고찻잔속에서시남시남풀어지고서로의입술이묻은꽃무늬들은붉은입술을열었다우리는우리가아닌것이아니다벌어진찻잔틈에서꽃이피었다꽃은가끔손가락을길게뻗어같은방향을가리켰다

우리는머나먼이국에서온이방인이어서불가능이라는이름표를달지않고불가능으로살았듯아무말을하지않아도제법시끄러울것이다
---「우리는머나먼이국에서온이방인이어서」중에서

수보리여,언젠가이름이조르바였던조르바를찾아서
이름이크레타였던크레타에갔을때
켜켜이쌓아둔이름들이움직일수없는금강석인줄알았습니다
그것은건널수없는큰바다를보이지않게건너가는
작은뗏목처럼떠있었습니다
수보리여
이름이조르바여서조르바인이름이어떠한이름으로도부를수있는
하나의이름이기때문에,조르바라부른다면
껍질처럼떠있는섬과섬사이셀수없이떠다니는무수한이름들을조르바라
부르지않고,교외별전이라부를수있겠습니까
수보리여이름이크레타였던크레타에서
이름이조르바였던조르바가강가강의셀수없는모래알갱이로
짓고무너뜨리고다시짓고또지었다는
금강석보다빛나는교외별전은차디찬지중해물빛보다깊고푸르렀습니다
금강이라는이름은무너지지않는이름이아니라
무너지지않는교외별전이그이름이었습니다
수보리여무너지지않는이름으로
지었다는그것을눈물한방울흘리지않고
뜬눈으로다읽었다고
감히말할수있겠습니까
수보리여나의이름은이름이아니고
금강과한편이라고내가나를속인,이름의헐거운그림자였습니다
수보리여언젠가
이름이크레타인크레타에서
이름이조르바인조르바를다시만나
보다많은실패와고뇌의시간이비켜갈수없다는걸이제알았다
감히말할수있겠습니까

*보다많은실패와고뇌의시간이비켜갈수없다는걸:「바람의노래」.
---「이름이조르바였던조르바」중에서

지난시간을모두기억한다는일방적인말에
사랑이라답한적있다
멈춘시간앞버려진낡은기억을뭐라부를지몰라
더는네가낯설지않다고에둘렀던것

먼지쌓인다락방에두고온시간들이지불한
기억의목록에는일방통행로를걸어온곡절들이빼곡했고
굽은사연을부러지지않게펴려면일방적인자세가가장옳았으므로,

기억너머곡절들이유령처럼피어오르는,아샤라시스의길을걷는다

뿌연유리창너머꽃무늬양말이덩굴처럼걸린
양품점을지나빛바랜색종이와갈대펜이꽂힌포켓수첩이널린문구점을따라
드문드문가로등이켜지는굽은샛길을걸어간다
색색의사탕과기름밴봉지에담긴튀김과자더미사이로
문닫은작은주유소가서있고
습득물보관소가딸린세놓은점포들이이어진다
흩어지는환호성처럼
한떼의사람들이몰려다니던골목저편
좌판위에놓인시든배추와새빨간입술을내민홍옥한알
지난유행어처럼서걱서걱하고무안한장면들은정말113번지였을까
맹랑한거짓의제스처처럼
투명한속을숨긴홍안의사과가그립다

굽은걸음걸이에지나온길을실어걸어가는길
펼수없는그길위에서

뒤늦은사랑을꺼내든건
당돌하고막된자유처럼,일방통행에대한구부러진직설을펴기위함이다
낮은잡풀처럼어여쁜고독이되기위해서이다

*아샤라시스의길:발터벤야민의[일방통행로]속이미지들을차용했음.
---「일방통행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