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비가 파두에 젖는다

밤비가 파두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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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벚꽃은 없다 초록이 묻었다 바다는 말이 없다 빈 고깃배만 남았다
[밤비가 파두에 젖는다]는 최형일 시인의 세 번째 신작 시집으로, 「시뮬라크르의 봄-진해 행암에서 한나절」 「밤비가 파두에 젖는다」 「화엄경을 읽다」 등 86편이 실려 있다.

최형일 시인은 구례에서 태어나 충청도에서 자라고 창원에서 살고 있다. 1990년 [시와 의식]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나비의 꿈] [아무도 울지 않는 시간이 열리는 나무] [밤비가 파두에 젖는다]를 썼다.

최형일 시인의 시들은 비약과 일탈의 구문을 난사하고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파편적 나열을 통하여 의미의 안정성을 뒤흔든다. 그의 시는 마치 정해진 착지점도 없이 길 없는 공중에서 떠도는 패러글라이더 같다. 그의 시들은 초점이 흐린 가늠구멍으로 자꾸 멀어지는 조준점을 들여다보는 사수처럼 난감한 정동(情動)을 보여 준다. 그는 또한 전통 서정시의 확실한 주체를 거의 보여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포스트-서정시인(post-lyric poet)이다. 최형일 시인에겐 세계 또한 확실한 현존이 아니라 연결점도 없이 자꾸 끊어진 흔적으로 존재한다. 그는 뿌옇게 흐려진 창문으로 잘 보이지 않는 바깥을 그린다. 그는 포착하려 할 때마다 굴절되고 미끄러지며 도망치는 세계를 향하여 파편화된 그물을 던진다. 그의 시들은 이렇게 실재의 뒷덜미에 흩뿌려진 기표의 그물들이다. 그렇지만 그는 서정 시대의 왕처럼 자신의 감정을 전경화하지 않는다. 그는 흐려진 세계처럼 주체도 흐릿해졌음을 안다. 이제 왕이 큰소리를 내어 운다고 해서 아무도 따라 하지 않는다. 그는 절망하는 내면을 앞에 내세우지 않고 흐려진 주체와 흐려진 세계를 파편화된 문장에 걸쳐 놓는다. 이 탈서정적・탈낭만적 객관화야말로 주관화되지 않는 세계를 드러내는 최형일 시인의 독특한 전략이다. (이상 오민석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저자

최형일

저자:최형일
구례에서태어나충청도에서자라고창원에서살고있다.
1990년[시와의식]을통해시인으로등단했다.
시집[나비의꿈][아무도울지않는시간이열리는나무][밤비가파두에젖는다]를썼다.

목차

시인의말

제1부시뮬라크르의봄
시뮬라크르의봄-진해행암에서한나절-13
덩굴장미1-20
덩굴장미2-21
자작나무숲에는초록이산다-22
뫼비우스띠-24
백일홍아래서-25
멜랑콜리에피소드-26
낙엽-28
인터셉트-30
공중화장실앞에서-32
안티오이디푸스-33
갈대-34
가포로가는길-35
퇴화-36
망종(芒種)-38
거미의집-40
다호리텃밭-42
산책-43
백색항아리-44
물질하는여자1-45
물질하는여자2-46
물질하는여자3-47
K조선소-48
르네마그리트-50
세잔의정물,푸른사과-51
나무의시문(詩文)-52
단어를찾아서1-53
단어를찾아서2-54
봄날,안민고개-55
봄날,바다로간공룡들-56
봄-58
부랑(浮浪)-광인들의배-59

제2부수집가의알고리즘
수집가의알고리즘-63
채집기(採集期)1-문체반정기(文體反正記)-64
채집기(採集期)2-무선마우스-66
채집기(採集期)3-국수의기하학-67
시(詩)의성장기-68
벚꽃의독백-페르난두페소아식으로-70
굿킬-71
벚나무와자전거에대하여-72
해열제-74
시선의욕망-75
골조공사-76
봄-응시의가면-77
봄눈-78
목련-80
어떤기억들-82
꽃-84
문밖에서-85
계단의말-86
가음정장미공원-87
바깥-88
용지호수-89
평면거울-90
가문비나무옆거칠고긁힌거리를나서며-91
청동거울속여행-92
매미집-93
쓰레기통-94
하늘소-95
해바라기-고흐가그랬다-96
반구대암각화-98
가상현실-100

제3부얼마를더가야그리움이보일까
청동의시간-103
버려진속도들-104
튤립-105
므네모시네-106
상남시장-108
창원연대기-110
터널을지나며-112
푸른수염나비-113
바다의편지1-114
바다의편지2-115
밤비가파두에젖는다-116
파두에젖다-진주유등에부쳐-117
바닷가터미널구두점점묘-118
스피노자의렌즈-119
동굴의우화-120
해변식당에서-121
바다한점-122
화엄경을읽다-123
동충하초-124
우두커니-126
화분의상상력-128
계엄령-129
얼마를더가야그리움이보일까-130
아카시아초록시첩(詩帖)-131

해설오민석파편화된기표들의그물-132

출판사 서평

작가의말

거울속에서희디흰뼈들이자라듯이
닮음과비슷한것들이기억을비튼다
혼자서도알을까고자라고날아간다
거리와시간넘어스며들고사라진다
끝없이흩어지고깨어지고부수어진다


책속에서

시뮬라크르의봄
-진해행암에서한나절

1.유사한봄날

진해봄은바다보다먼저물든다벚꽃이하얀산비탈을오르고,초록빛새순에서는새소리가났다바다를끼고도는마을과산마루벚꽃무리가그작은뱃머리위로물그림자로옮겨앉는다소낙비에튕긴음표따라고깃배위로꽃잎이날린다물오리떼가희끗희끗고개를수그려부두의서사를줍는다비릿한창틀바람이스친다부두뱃머리깃들이중얼거린다너를닫을때나는비로소삶을연다수직창문이수평의바다를연다느린파도의무늬들푸른파래해조음을모래가생이에풀어놓고,창넘어바다를연다언제인지,언제부터인지늘같은바다는어디부터인지읽고간문장인지,기억나지않는부두에삶을켠다

2.창틀에핀봄날

비릿하다바다가숨쉬듯둑길이끼들이금방오므라들어솜털처럼파릇파릇물결친다늦은오후가내려앉아펄럭인다물의뼈들이갯가에걸린그물에반짝인다덜마른물비늘이비워진공간과공간사이를비튼다멀어짐과사라짐에익숙한바다가있다사라짐없이살아내는바다는없다바다에떨어진벚꽃들이물고기떼를불렀다고깃배사이꽃잎들물고기밥인양끄덕끄덕떠돈다일어나면물결이일고누우면활짝펴는부두처럼,페인트가벗겨진배들이서로를토닥거리며저녁을맞는다파도인지물결인지하루의기억이새김질이다기억나지않는문장이오간다물결의기억을그물에꿰는바람이뒤척인다

3.나무배

에미는바다를지고말이없다지나고나면금방둑길쯤에흩어진날을포구는안다꽃가루가바위틈에서작은물미역으로나풀거린다돌아오지않는바다를안은채,물가로어조사를잇고나눈다몇덩이형용사를묻게펴며번진다뭍으로,접속사를붙여잇는다풍경이줍는바다의말들이집을찾는다부둣가가로등아래비늘이날린다나비들이한잎두잎나풀거린다기억나지않는서술어로길게눕는다짠내를헹군저녁햇살이들썩인다이곳누구나돌이킬수없는봄날하나쯤바다에묻고산다고,행암만봄날은안다바닷길을게워내고거울이파도를게워내고그녀를게워내고둑방길을게워내고익사체같은봄날을게워내고꽃잎지는바람을후려친다에미는뒷짐으로말한다

4.봄날은간다

거짓말처럼불었다떠다니는벚꽃이머뭇거린다바다는그꽃잎으로잔잔히끌어당긴다희고투명하게모래무지들물빛따라멀어진다너의풍경에있지만너를가리키지않는다어딘가로여전히이어지고있을파도의기척을실어나르고있다서로를밀착한채가면같은아침을씻는다배들이창가로,메모지로,희미하게스며든다기억나지않는이름을부르고,존재하지않는시간을쓴다왜이곳에있냐고묻는다봄은너무빨리지나가고,물결은이미봄을잊었다고,꽃이떨어진부두둑길에초록을심는다사라지는물결이먼바다를당긴다사라짐속에서만피는바닷길따라봄날은간다기억나지않는바닷길을찾아배들이멀어진다

5.바다너머

초록이둑길을오른다우리가길이라부르는것은망설임이다바다는매일같은풍경을바라보지만,파도는늘다른문장을건넨다먼뱃고동소리가꽃잎처럼진다포구는터널처럼긴외로움으로눕는다새순이연둣빛이다말없이이미많은말을하며서있다다시바다를본다작은고깃배들이뱃머리를낮춘채햇볕을쬔다두리번대는어제의햇볕은따뜻했고,오늘의햇볕은약간더길다바다너머로파도는사라짐과드러남의연속이다늘수평인바다는안다사라진다는건,매일새로워진다는것을기억넘어초록이짙어가는이유를아는것이다죽음은조용히바다를덮는햇살처럼물결치며삶을적는다행암만이묽게머문다메모지위햇살이다가와물결의언어를적신다봄날은바다너머에지고행암만바람과물빛은문장으로다가온다

6.글을쓰는물고기

바람에날린벚꽃무리가항구에떠돈다일렁이는물비늘이눈부시다뭉게구름아래로물고기떼가흘러간다물결을읽는중이다폴폴날리는꽃잎사이로눈이만지는대로번지는바람의언어를,파도는한잎두잎주워먹는다조각난퍼즐을다시새긴다수많은아무도쓰지않은무늬를중얼거린다항구를떠나돌아오지않는말들이벚꽃으로핀다는전설은항구만아는사실이다어느배도건져올리지못한기억이핀다는바다는벚꽃에묻는다죽은바닷새와항구에묶인나무배들의침묵을,잎이진나무죽은새의접은죽지에젖은저녁을,서로다른언어가파닥인다매운냄비한사발,깔깔한바다한숟갈

7.사라진문장

벚꽃이모두졌다뼈만걸친나무의시간을부두는안다벚나무아래죽은길고양이기억쯤은잘게부숴파도에보낼줄도안다하얀먼바다가흘러갔다지는꽃이초록에들도록푸른잎들이지저귀는시간을안다그잎들이비추는바다가있다사라지는문장을물고물고기떼가거울로들어간다비린내가희미하게번진다비늘의흔적이여전히머물며다시쓰이지않은물결에뒤척거린다얇은종잇장아래성별을알수없는파도의무늬를베낀다

8.봄날의기억

초록이산을가득채우기전,바닷가에는봄의그림자만남았다지는벚꽃이파도에젖어떠내려가고,해초와모래가엷은숨결처럼숨을쉰다기억을물고떠난물고기떼는지난바다가남긴바위틈을들락거린다해안선을들락거리는행암만은말없이시간을품는다떠나간물결,사라진문장,그리고바다의기억까지그풍경안에서부재한봄날은물때에절인결처럼말없이풍경이된다

9.무늬

벚꽃은없다초록이묻었다바다는말이없다빈고깃배만남았다물결이잠잠하다숨이길다바람은고깃배아래로파고든다꽃잎은물위에떠돌다사라지고무늬를불렀다말이아니,기억도하지만남았다쓰이지않은것들닿지않은말들버려진모양들그것이바다의문장이라는그것을바람이돛을뚝칠때까지도고깃배는몰랐다아니모른척했다끄덕끄덕봄날이저문다파도가달려오면바람은자리를떠나간다누구도바다의끝을묻지않는다봄날의무늬처럼충분한어쩌면

10.뱃노래

저녁바람이부두에선바람막이옷깃으로날아든다불룩해지도록허리를돌아파고든다바람에서는갈매기소리가난다모래뭍이하는소리로읊조린다팽팽하게졸라맨머리모자를확벗겨간다바다를마주한밤부두로날아간다날아가는갈매기를쫓는다내머리를낚아챈갈매기를따라간다머리통을낀채곤한돛대가펄럭인다누가부르다만노래방기기가깜박거린다바람막이점퍼가날려보낸갈매기떼가한박자느린허리춤을치켜올린다죽지가걸쳐올린음계에갈매기떼가점퍼속으로뛰어든다한가득생선내음이점퍼속으로사라진다■


밤비가파두에젖는다

검은돛배가부두에잠든다
리스본바닷가선술집파두처럼
한번떠나면돌아오지않던화살처럼
기약도없이파도는푸른자락을끌어
모래의기억을사막처럼읽는다

카메라셔터에터진꽃들이산기슭따라뭍에머뭇거렸지,누천년묵은나이테가기억의흰뼈를몰아밤비를쏟는다빗나간과녁을짚는화살의기억으로,따져보니백년도살지못한생의무늬가언제정(定)한결따라검은돛배를잠들게하리오늦은밤비에

*파두(fado):포르투갈의역사를담은서정음악.■


화엄경을읽다

툇마루거미줄이비를맞는다
허공에얽힌실들이
볕에기대며서로살갑다
하늘과땅,
비와빗줄기사이
주름들이펄럭인다
삶의무늬가맺힌물방울들이

여기있으므로저기있고
?저기있으므로여기있다
?이것이없으므로저것이없고
?저것이없으므로이것이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