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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1904년11월4일강원도철원군묘장면산명리에서부친이문교,모친안순흥사이의1남2녀중장남으로출생했다.(1970(?)년사망추측).상허(尙虛)또는상허당주인(尙虛堂主人)이태준(李泰俊)은어린시절아버지를따라블라디보스토크에갔다가1909년에아버지를,1912년에어머니를잃고고아가되었다.1918년고향으로돌아와친척집에기거하면서어렵게철원봉명학교를졸업하였다.졸업후어려운가정상황으로인해방황을하다가,1921년휘문고보에입학했다.여전히어려운형편이었지만,교장선생님등주위사람들의배려로수학을했다.그리고이시기에이미문학가가되기위해많은노력을기울이기시작했다.1924년학교신문〈휘문2호〉에단편동화〈물고기이야기〉를처음발표했습니다.그러다가1924년동맹휴교주모자로낙인찍혀5년제과정중4학년1학기에퇴학을당했다.퇴학의아픔을위무하면서상허는일본유학의길을떠나,1927년동경조치대학(上智大學)예과에입학했다가1928년중퇴한다.일본유학시절인1925년에단편'오몽녀'를'조선문단'에투고하여입선하면서작품활동을시작했는데,귀국할때까지작품활동이거의없었다.귀국하여1929년'개벽'에입사한후'학생','신생'등의잡지편집에관여했고,'어린이'에수필과소년독본을발표하면서창작활동을재개하였다.1930년이화여전음악과를졸업한이순옥과결혼하여가정을이룬다.1931에는'중외일보'기자로입사하였고,'중외일보'가폐간되면서개제(改題)된'조선중앙일보'에서학예부장으로일하게된다.1933년에'구인회'에참여하면서서정성이농후한작품을발표하였고,이화여전등에작문교사로출강하였다.1939년에는'문장'지를창간하여책임편집을맡아일제말기문학을지탱해나갔으며,1941년제2회조선예술상을수상했다.해방후,이태준은지금까지의문학적태도와는달리좌익계열의문학단체에가담하는데,1945년에문화건설중앙협의회조직에참여하였고,1946년에조선문학가동맹부위원장으로활동하면서,'해방전후'로조선문학가동맹이제정한제1회해방기념조선문학상을수상했다.1946년7∼8월경월북한것으로알려져있으며월북직후인1946년10월경조선문화사절단의일원으로소련을여행하고돌아오는길에북한에머물렀다.한국전쟁이발발하자종군작가로낙동강전선까지내려온것으로전해진다.1952년부터사상검토를당하다가1956년숙청당한것으로알려졌으며,이후의행적은자세히알려져있지않고사망연도도불확실하다.작가의작품활동을보면다음과같다.1934년첫단편집'달밤'발간을시작으로'까마귀'(1937),'이태준단편선'(1939),'이태준단편집'(1941)등단편집7권과'구원의여상'(1937),'화관'(1938),'청춘무성'(1940)등장편13권을발간하였고,해방후'소련기행'(1947)이라는기행문도발간했다.일제강점기의그의작품은대체로시대적상황에적극적으로대응하기보다는현실에초연한예술지상적색채를나타냈다.섬세하면서도감각적인묘사와대상에대한연민과동정의시선을통해단편소설의서정성과그예술적완성도를높였다는점에서우리나라의대표적인단편소설작가로평가받고있다.광복이후그의작품은조선문학가동맹의일원으로활동하면서생경한이데올로기를직접적으로드러내는작품을발표함으로써일제강점기의작품에비해예술적완성도가훨씬떨어지고있다.
까마귀6해방전후42돌다리124토끼이야기146농군176무연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