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다섯 궁궐과 그 앞길 (유교도시 한양의 행사 공간)

서울의 다섯 궁궐과 그 앞길 (유교도시 한양의 행사 공간)

$18.55
Description
궁궐과 그 앞길을 중심으로 들여다본 서울의 공간 변천사
조선이 개국한 1392년부터 현재까지 600년 서울 공간의 역사를 궁궐과 그 앞길을 중심으로 들여다보는 『서울의 다섯 궁궐과 그 앞길』. 서울의 다섯 궁궐이 언제 어떤 모양새로 지어지고 궁궐이 들어서면서 궁궐 주변 가로가 어떻게 형성되고, 이들은 한양의 가로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정치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알아보고, 궁궐 앞길에서 벌어진 각종 행사들을 함께 살펴본다.

1995년 국가중심가로 조성 계획 발표, 2009년 광화문광장 조성, 2010년 세종대로로 이름을 바꾸며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1392년 7월 왕위에 오른 태조 이성계가 한양 천도를 결정한 600년 전부터 정치, 행정, 문화의 집결지로서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경복궁 광화문 앞길 육조대로. 육조대로 만큼 폭이 넓지 못하지만 자취가 생생하게 남아 있는 창덕궁 돈화문 앞길, 현재 종로4가 교차로에서부터 혜화문이 있던 고갯마루까지 이르는 긴 길인 창경궁 흥화문 앞길 등 서울의 다섯 궁궐과 그 앞 가로가 지닌 다양한 기억들을 되살리고자 한다.
서울에는 다섯 궁궐 이외에 이렇다 할 역사 유적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우여곡절 끝에 광복 50년을 맞이한 1995년에 경복궁 앞을 가로막고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의 돔이 철거되는 등 궁궐들이 재정비되기 시작했지만 이미 너무 많이 변해 버린 궁궐 앞 가로는 복원되지 못한 채 어느 궁궐은 도시의 섬처럼 커다란 차도에 둘러싸여 있고 어느 궁궐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궁궐이 있는지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다. 저자는 우리에게 기억은 소중한 자산이며 아무런 기억할 것이 없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초라하게 만든다고 이야기하며 궁궐과 궁궐 앞길의 기억들을 함께 되새기고자 한다.
저자

김동욱

저자김동욱은고려대학교건축공학과를졸업하고일본와세다대학에서박사학위를받았다.경기대학교건축학과교수를거쳐현재명예교수로있으며한국건축역사학회회장,문화재청문화재위원회위원을지냈다.건축물의외형보다는당시지식인들의건축에대한생각,건축을짓는데참여한장인들의기술,물질적인여건등을통해시대의건축을입체적으로파악하는데집중하고있다.지은책으로《한국건축중국건축일본건축-동아시아속우리건축이야기》(2015),《(개정)한국건축의역사》(2013),《도산서당선비들의이상향을짓다》(2012),《실학정신으로세운조선의신도시수원화성》(2002),《조선시대건축의이해》(1999),《18세기건축사상과실천》(1996),《한국건축공장사연구》(1993),《종묘와사직》(1990),《창덕궁깊이읽기》(공저,2012)《영건의궤-의궤에기록된조선시대건축》(공저,2010)등이있고주요논문으로는〈조선초기경복궁의공간구성과6조대로〉,〈현륭원의입지선정과원침계획에서정조의역할〉,〈18세기구수원읍내주민구성과주택규모〉등이있다.

목차

프롤로그서울다섯궁궐과가로에담긴이야기
섬이되어버린궁궐|한양의다섯궁궐과가로|놓칠수없는궁궐앞의구경거리|유교도시한양의행사|궁궐앞가로,서울을살피는또하나의키워드

1경복궁과육조대로의탄생

한양천도와경복궁창건
정도600년역사의출발,한양천도|개경을본뜬궁궐과종묘,사직단건설|창건당시경복궁의공간구성|유교이념과고려관습이혼합된궁궐|임좌병향의터와계좌정향의건물|동서간선도로의전통

광화문건립
한양성곽축조와경복궁궁성의건립|약간의오해|궁성남문밖풍경|황성없는궁궐

육조대로건설
왕자의난|태종의한양환도와이궁조성|태종의관제개혁|장랑건설과육조대로의탄생

육조대로의형태
광화문앞길,육조대로,육조가|육조대로의형태|육조대로변의관청들

2세종의경복궁전면수리

경복궁으로돌아온세종
세종의즉위|경복궁이어|의례정비|문물제도와건축의정비

경복궁의전면수리
사대문수리|동궁건설|상참의례와편전의개조|강녕전의수리와교태전신축

세종조건축기술의성숙
건축의독자성모색|기술자의국가적관리|외래신양식의채택

광화문의건축적위용
광화문문루의장엄|숭례문과광화문|광화문의월대|광화문의종과북

3육조대로에서벌어진행사들

광화문에서치른의례
계동대나의|취각령|부묘|문종의부묘를치른단종

칙서맞이하기
빈번한사신왕래|칙서를맞는절차|광화문을지나는사신행렬

결채와채붕
가로의결채|채붕|산대와잡희

문무과거시험과광화문
육조대로의무과시험|과거시험의합격자발표|광화문육조거리의체력시험

담처럼모인구경꾼들
여흥과관광의공간|백성들의상소장소|한양의유일한개방공간

4창덕궁과돈화문앞길

이궁창덕궁과돈화문앞장랑
향교동동편의이궁|창건당시창덕궁규모|돈화문과장랑건설|창덕궁의궁장과출입문

17세기이후창덕궁의영역확대
임진왜란후의창덕궁복구|옛모습으로재건된창덕궁|효종의마수전건립과경추문신설|숙종의대보단설치

비좁은돈화문앞길
돈화문의건축형태|돈화문에서파자교까지|돈화문앞길의관청

소략해진돈화문앞의례
채붕설치를중지시킨광해군|사라지는결채|인조국장의발인행렬|파자교까지늘어선무과합격자|돈화문앞에서치른헌부례|노비문서소각

5창경궁과홍화문앞길

대비를위한창경궁건립
수강궁에서창경궁으로|창경궁홍화문의등장|통상적인격식과다른창경궁의전각구성

17세기이후의창경궁
광해군의창경궁복구|동궁을포함한창경궁의영역|빈전?혼전으로활용|경모궁개건

홍화문앞길
창경궁의문|홍화문앞길의상황

홍화문앞길의행사
백성들에게쌀을나누어주는사미행사|목을길게늘이고구경하는왕세자입학례|홍화문으로나가는국왕의재궁

6경희궁과흥화문앞길

숙종과영조가즐겨찾은경희궁
광해군의경희궁창건|바위와숲과샘이있는궁궐|숙종과영조가즐긴경희궁|고종연간의쇠락

경희궁을둘러싼문과가로
궁장과출입문|단층으로지은흥화문|운종가로이어진흥화문앞길

흥화문앞길의행사
흥화문앞에서백성들을만나는영조|태조와세조의초상화흥화문을오가다|흥화문을들어가는종묘의27신위|흥화문을나서는한많은혼령들

7고종연간의경복궁과경운궁

경복궁중건
조대비의중건교지|옛제도를따르고신질서를반영한중건경복궁|궁성과출입문|후원의확장

광화문과육조대로
중건광화문|종친부?의정부?삼군부의청사복구|육조대로의정비|해치

활기잃은육조대로
고종의잦은어가행렬|신정왕후의국장과부묘|경무대에서벌어진과거시험

고종의경운궁건립
경운궁이어|경운궁|중화전건립과경운궁의재건|경운궁의서양식건물

경운궁의여러문과문앞행사
인화문앞의고종황제|대안문과대한문|영성문을나가는재궁과어진

8우리곁의궁궐과가로

일제강점기궁궐의수난
창경궁에들어선식물원과동물원|전시장으로전락하는궁궐|일제강점기시가지계획과궁궐가로|경복궁에들어서는조선총독부청사

광복이후가로의확장과변모
100미터도로로확장되는세종로|지속되는궁궐의수난|박물관과궁궐|철근콘크리트조광화문탄생

1980년대이후궁궐의복원과정비
서울대공원으로가는동물들,제모습찾는창경궁|광복50년과조선총독부청사건물철거|복원되는경복궁|되살아난경희궁터

다섯궁궐앞가로의현주소
새롭게복원되는광화문|광화문광장에돌아온세종|마지막희망,돈화문로

에필로그기억으로남는궁궐과가로
서울에남은유교도시의기억|격변하는육조대로의숙명|왕실의애환을품은돈화문로

출판사 서평

경복궁광화문앞길세종대로

조선왕조의수도로한양이정해지고그머리가되는곳에궁궐이들어서고궁궐문앞으로대로가펼쳐지는순간이길은온갖정치적인변화의현장이되었다.정치상황이달라지면이길이영향을받았다.…최근에이길은온갖정치적욕구나주장을펼치는장소로쓰이고있다.그런모습을보면서세종때석호라는사람이경상도고령에서올라와지방관리의비리사실을적은긴두루마리종이를광화문앞에서중추원까지펼쳤다는이야기가떠오른다.육조대로의숙명같은일은세종때도벌어졌고지금도이어지고있는셈이다._339쪽에서

지난4월24일문재인대선후보는대통령집무실을광화문정부청사로옮기고대통령관저를광화문인근에마련하겠다는‘광화문대통령시대’를천명했다.문재인후보가대통령으로당선된이후서울역사문화벨트조성공약기획위원회의일원인건축가승효상은한신문과인터뷰에서“2019년이후광화문으로이전할새청와대는현세종로정부서울청사와경복궁내일부시설에분산입주할수있다고본다.”고하면서경복궁안에있는국립민속박물관과국립고궁박물관,광화문앞에있는정부종합청사를새로운청와대건물로쓰자고제안했다.
1995년국가중심가로조성계획발표,2009년광화문광장조성,2010년세종대로로이름을바꾼육조대로는많은변화를겪었지만1392년7월왕위에오른태조이성계가한양천도를결정한600년전부터정치,행정,문화의집결지로서굳건히자리를지켜왔다.
세종대로의조선시대명칭인육조대로는왕자의난이후송도로돌아갔다가다시한양으로돌아올결정을한태종때형성되었다.태종은한양천도후관제개혁을하는데이때육조가2품관청으로승격된다.광화문앞가로변에육조관청이들어서면서육조대로,육조가,광화문앞길등으로불리며육조대로가형성되었다.옛지도에서는광화문앞일직선으로표현된도로좌우에육조관청이늘어선모습을볼수있지만실측한그림이아니어서정확한모습은알수없다고한다.1907년에실측제작해그린〈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를보면북쪽가운데에광화문이긴월대뒤에서있고남쪽으로일직선의넓은대로가있고대로좌우에각관청이늘어선모습을볼수있다.물론이도면이그려질당시에는육조의관청들은모두해체되고통감부의새로운기관들이자리한모습이다.1961년에는공조와형조가있던자리부근에시민회관이들어서고,1970년에예조터에25층높이의정부종합청사가,1980년에는세종로북쪽끝에22층의교보빌딩이세워졌다.길의이름역시물리적변화만큼이나정치상황에따라변화를거듭했다.일제강점기에는식민통치의상징가로로서광화문통,광복후에는세종로,2010년부터세종대로로로불리고있다.
조선시대에육조대로는나라최고의행사장으로한양의유일한개방공간이었다.왕의능행이나온천여행과같은왕의거둥행렬,중국사신맞이행사,무과시험모습등은한양의최대구경거리로“담처럼모인구경꾼들”이라고기록되어있다.

국왕이사직단이나종묘에제사지내러갈때나왕릉에절하러갈때국왕이탄가마는육조대로를지났다.중국황제의칙서를가지고사신이서울을찾으면반드시육조대로를거쳐궁으로들어갔다.세종은국왕출궁이나사신영접절차를세세하게규정했다.거가출궁시가로변은오색천으로치장하는결채를했으며사신이광화문을들어올때는문옆에채붕을꾸미고산대놀이를벌여먼길을찾아온사신의노고를위로했다._335쪽에서

《서울의다섯궁궐과그앞길:유교도시한양의행사공간》은서울의다섯궁궐이언제어떤모양새로지어지고궁궐이들어서면서궁궐주변가로가어떻게형성되고,이들은한양의가로형성에어떤영향을미쳤는지,정치상황의변화에따라어떤변화를겪었는지살핀다.또한당시유일한개방공간이었던궁궐앞길에서벌어진각종행사들도함께살핀다.조선이개국한1392년부터현재까지600년서울공간의역사를궁궐과그앞길을중심으로들여다본다.

자취가생생하게남아있는창덕궁돈화문앞길

도시에서시간이지나면서없던길도생기고또있던길이사라지기도하고물길도큰홍수가지나면서바뀌기도하는것이어서쉽게단정할수없는일이기는하지만,돈화문앞길에서보이는도시계획적인가로와물길은적어도창덕궁에돈화문이세워지고돈화문에서동서간선도로로가로가연결되는시기부터존재했을가능성을생각할수있을듯하다._165쪽에서

왕자의난이후왕위에오른정종은송도로되돌아간다.정조의뒤를이어왕위에오른태조는다시한양으로돌아오는데정궁인경복궁이아닌이궁으로창덕궁을짓고이곳에머문다.창덕궁은종묘뒤편의경사지고굴곡있는대지에지은궁궐로잠시머무는기능을염두에두고지어졌지만조선시대가장오랜시간사용된궁궐이다.창덕궁의정문인돈화문이지어지고문앞으로좌우에행랑이늘어선길이운종가까지길이이어져궁궐앞가로의면모를갖추기는했지만육조대로만큼폭이넓지못해국가의중요행사가있을때에는육조대로로옮겨행사를벌이거나돈화문앞길에서행사를벌이더라도육조대로행사만큼화려하게벌어지지못했다.임진왜란이후중요하게부각된비변사가들어선것을제외하면두드러진관청도없다.돈화문앞길에서벌어진눈에띄는행사로는인조발인행렬(1649),이인좌의난을진압하고난에가담한박종원을포함한반란군을참수하고그들의목을장대에꿰어높이매단헌부례(1728),순조때내수사에속한내노비와시노비문서를태우는노비문서소각(1801),순조와순원왕후의가례행렬(1802)등이있다.

세대비를위해지은창경궁과홍화문앞길

홍화문은경복궁의광화문이나창덕궁돈화문과다른점이있다.다른두곳의정문은문앞으로직선대로가열려있는데반해서홍화문의경우에는길이문옆으로나있다.모름지기궁궐의정문앞길은문을두고정면앞으로가로가길게뻗어서가로좌우에관청이도열하는모습이바른것이라고할수있으며,비록가로좌우에관청이배치되지못하더라도가로만은앞으로뻗어있는것이일반적이다.그래야멀리서도긴가로끝에우뚝하게선궁궐정문모습이위용을드러낼수있다.홍화문은지리적으로그런여건이못되었다._217쪽에서

1980년대초까지도동물원이있고밤벚꽃놀이명소로알려져있으며창경원으로불리던창경궁은성종때지어졌다.성종재위당시세대비가궁궐에거처하게되었는데이로인해생긴공간부족문제를해결하고자세종이태종을위해지은수강궁터에지은궁궐이다.창경궁은창덕궁과붙어있어둘의영역을뚜렷이구분하기는어렵다.17세기이후창경궁은주로왕실에흉사가났을때빈전이나혼전으로사용되었다.창경궁흥화문앞길은현재종로4가교차로에서부터혜화문이있던고갯마루까지이르는긴길이다.이길은문묘와태조가창건해교종의수찰이된흥덕사와연결된다.1776년사도세자의사당인경모궁이들어서면서경모궁앞길,현재의대학로가흥화문앞길보다중요한길이되었다.눈에띄는흥화문앞길의행사로는백성들에게쌀을나누어주는사미행사(1749,1795),순조의맏아들효명세자의성균관입학례(1817),정조,헌종,철종의발인행렬등이있다.

숙종과영조가즐겨찾은경희궁과흥화문앞길

결국경희궁의궁장주변다섯출입문은각각운종가로이어지거나돈의문과연결되기도하고또사직단과도이어지면서도성서쪽의궁궐로서주변시설들과크고좁은길을통해소통하고있었던셈이다.지금은궁장자체가모두사라져버리고궁역이크게축소되어주택가로변모하거나공공시설이들어서면서주변과단절된채로남아있다._242쪽에서

왕권유지에불안감을느낀광해군은영창대군을죽이고인목대비를유폐하는등무리한일을하고풍수가가명당자리라고가리키는곳에궁궐을지었다.하나는승려성지가명당자리로지목한땅에지은인경궁이고다른하나는김일룡이왕의기운이서린곳이라고말한새문동돈의문안쪽정원군집터에지은경덕궁이다.1760년에경덕궁은경희궁으로이름을바꾼다.숙종이경희궁회상전에서태어나고융복전에서승하했다.창경궁에서아들사도세자를뒤주에가두어죽인영조는재위37년부터경희궁에머물다가집경당에서승하했다.흥화문앞길에서는여덟차례에걸친영조의사미행사,종묘증축공사를하면서정전과영녕전에모신27위의신주를광명전,장락전,위선당,태령전,자정전에각각나누어모셨다가종묘증축공사가끝난후다시종묘로모시는등의행사가있었다.경희궁은일제강점기에는일본인중학교로전용되고건물들은철거또는매각되고동쪽은관사터로서족경사지에는기상관측소가들어오는등수난을겪었다.현재전각몇곳만복원해놓은초라한모습으로남아있다.

고종황제의대외정치활동무대중하나인경운궁과대한문앞길

이일대는서대문으로가는대로와서소문으로나가는작은길사이의불규칙한형상의넓은대지였으며중앙부가약간언덕을이루었다.이언덕을중심으로남쪽양지바른곳에조선초에는정릉이라는무덤도들어서고그주변에흥천사라는장대한사찰도있었다고짐작된다.고종이이어할즈음이주변은미국,영국및러시아의공관들이들어섰다._287쪽에서

경복궁에머물던고종은친러정책을도모한명성왕후를시해하는등압박해오는일본세력을피해러시아공사관으로거처를옮기는아관파천(1896)을단행한다.이곳에서고종은친일세력을배제한새로운통치구상을하면서경운궁의낡은전각을고치고새롭게몇몇건물을추가하는등통치의새로운기반을다지고1897년경운궁으로이어하고대한제국을선포한다.경운궁일대는서대문으로가는대로와서소문으로나가는작은길사이의불규칙한형상의넓은땅으로고종이이어할즈음주변에미국,영국,러시아공관들이자리하고있었다.경운궁에는석조전,수옥헌,돈덕전,구성헌,정관헌과같은서양식전각을지어열강들사이에서제국의의지를드러내려고했다.경운궁의정문은인화문이었는데인화문앞에남쪽으로높은언덕이가로막고있어서앞으로뻗어나갈수없고좌우로난도로도원활한소통을하기위한정도의폭을충분히갖추지못한지리적한계가있었다.그래서궁궐동쪽에정문구실을하는또하나의문을내고대안문으로이름지었다.1904년경운궁화재이후중건공사를하면서대한문으로이름을고쳐불렀다.

서울의다섯궁궐과그앞길의변화

지금까지궁궐에대한관심은궁궐을둘러싼담장안쪽세계에치우친감이있다.그러나궁궐은궁궐출입문과그앞길을통해바깥세계와통해있었다.궁궐앞길은궁궐과도시를연결하는숨통과같은존재라고할수있다.담장안의세계와함께담장바깥세계까지아울러살펴보아야궁궐을제대로이해할수있을것이라는생각을한다.궁궐앞길에서벌어진행사를살펴보는일은이러한통합적이해에접근하는작은실마리가될것으로믿는다._005쪽에서

서울에는다섯개의궁궐이남아있다.조선의개국에맞춰지은조선의정궁경복궁(1395),왕자의난이후한양을떠났던왕이한양으로다시천도하면서향교동동쪽에지은이궁창덕궁(1405),정희·인수·인순왕후세대비를위해수강궁터에지은창경궁(1484),새문동돈의문안쪽정원군집터에있는‘왕암’이라는바위가예사롭지않다는풍수가의말을들은광해군이왕암일대에지은경희궁(1620),임진왜란으로불에탄궁궐대신선조가행궁으로삼아정릉동행궁으로불리던곳을고종이아관파천이후전각들을고치고새롭게건물을추가해대한제국의통치기반으로삼은경운궁(1897년고종이어)이있다.이다섯궁궐과사직단,종묘,선농단,남단과같은국가적인제사시설과육상궁이나경모궁같은왕실사당이나어진봉안시설인영희전정도가한양의주요시설이었다.
600년역사를가졌다고는하지만이다섯궁궐이외에이렇다할역사유적은별로남아있지않다.사직단과종묘정도가남아있을뿐이다.다섯궁궐도경복궁이나창덕궁,창경궁궁터만거의원형그대로남아있다.경희궁은대부분잘려나갔고,경운궁역시정전인중화전을중심으로한몇몇핵심시설만남아명맥을유지하고있다.궁궐들에는일제강점기에식물원,동물원이들어섰는가하면최대의꽃놀이터였으며최고의전시장이었다.이것은해방후에도이어져산업박람회장이기도하고전통적형상만을본떠어설프게지은박물관이들어섰으며철근콘크리트로광화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