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디외가 말하는 부르디외
라디오 대담으로 듣는 부르디외 입문
이 책은 부르디외를 결정론자로 이해하는 잘못된 방식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와 달리 부르디외는 행위 이면의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자유주의 가능성을 진정으로 도입한다.
― 더 모닝스타
다섯 번의 라디오 방송, 부르디외의 이론을 정리하다
1988년 프랑스의 공영 라디오 채널인 프랑스 퀼튀르 부스에는 이제 막 대중적 명성을 얻기 시작한 콜레주드프랑스 교수인 부르디외와 책과 문화에 관한 연구로 이름이 알려진 역사학자 샤르티에가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앞으로 다섯 차례 만나 부르디외의 개념을 놓고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부르디외는 자기 자신마저 비꼴 정도로 대담은 시종일관 유머로 넘쳤고 우호적인 분위기로 흘러갔지만, 그 이면에는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 샤르티에는 역자학자만의 입장이 아니라 일반 독자의 관점에서 부르디외 개념의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부르디외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맞수를 만난 듯이 자신을 둘러싼 삿된 비난에서 벗어나 그 개념이 지닌 함의와 목표, 의도를 차분히 풀어낸다.
다섯 번의 대화는 사회학자의 임무, 환상과 지식, 구조와 개인, 하비투스와 장, 예술가와 예술 장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두 사람이 워낙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저술이 아닌 대화의 특성상, 이야기가 자유롭게 흘러가지만 이 같은 순서는 나름대로 일관성을 보인다. 대담의 앞부분은 사회학자의 사회적 기능, 상식 및 환상을 뚫어내는 지식과 지식인의 전투적 역할을 다루고, 중반에는 현행 사회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지배적 구조와 이를 분석하는 방법을 설명하며, 이런저런 결정 기제 아래 개인의 자유, 이른바 행위자성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프랑스의 근대 문학, 미술을 사례로 예술가와 예술 장의 형성을 다루고 미학 및 예술에 관한 새로운 접근만이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자유의 가능성과 그 조건, 한계를 동시에 탐색한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 책은 부르디외의 수십 년 동안의 작업을 대상으로 구조(또는 권력)의 힘과 그 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또는 저항)에 관한 다양한 접근을 소개하고 있다.
사회학자는 왜 불편한가?
부르디외: 그렇죠. 저는 사회학이 불편함을 준다고 생각합니다.(24쪽) …… 사회학자가 자신의 작업, 그리고 자신의 글쓰기와 맺는 관계는, 제가 아는 한 정신분열에 관해 의사들이 설명하는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회학자는 무언가를 말해야 하거나 혹은 행해야 하지만, 그것을 말하거나 행하는 바로 그 순간 자신이 방금 말하거나 행한 바를 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합니다.(45-46쪽)
첫 대담을 여는 말에서 샤르티에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사회학자는 견디기 힘든’ 존재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 참기 힘들고, 불쾌한 사람이란 뜻이다. 소크라테스가 고대 그리스 아테네 사람의 등에를 자처했듯이, 부르디외는 이 지적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동시에 왜 자신이 동료 학자, 엘리트 계층, 심지어 대중을 귀찮게 하는지 설명한다. 사회학자, 또는 사회학 자체가 성찰성을 특징으로 하며, 남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그들의 진실을 진단하고 말하기에 사회학자는 견디기 힘든 존재이며, 나아가 자기 자신에게도 그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에 사회학자로 산다는 것 자체가 견디기 힘든 일이라고 말이다. 그런데도 사물의 자명한 질서에 도전하는 것, 자기 분열을 껴안고 이른바 ‘사회적’ 진실을 말하는 것, 남들의 비난을 감수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과학적’ 진실을 말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상식을 파괴하고 비판과 해방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사회학자의 임무라고 말한다.
오늘날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와 연결된 문제로서 오늘날 지식, 지식인의 임무는 과거와 달라졌다고 한다. 이제 지식인은 학계 내부의 위계적 규칙에 따라 직업적 안정과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는 학자도 아니고, 무의미한 통계치만 앵무새처럼 나열하는 정책전문가나 여론조사원도 아니다. 또 지식인은 계몽주의의 거대한 기획 아래 인간의 완성을 전망하는 예언자도 아니고, 마르크주의의 전망 아래 미래의 해방을 예단하는 메시아도 아니며, 대중이나 특정 계급을 대변하고 지도하는 당-지식인도 아니며, 남들에게 특정한 담론, 프로그램, 품행을 주입하는 통치 기술의 전문가도 아니다. 오늘날 지식인의 임무는 사회학자와 마찬가지로 죽어버린 지식생산 과정과 그 산물에 구멍을 내고, 대중의 바로 옆에서, 바로 밑에서 그들의 구체적 현실을 대상으로 새로운 개념을 발명하고 그들에게 사유수단을 제공하는 일이다.
샤르티에: 지식인은 정말로 오랫동안 피지배 대중에게 어떤 담론을 부과하는 역할을 자임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관점에서는 지식인의 기획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제는 지식인의 역할이 피지배 대중에게 지배 메커니즘을 스스로 분석할 수 있는 무기를 제공하는 일이 됩니다.
부르디외: 우리는 결정된 채로 태어나지만, 자유로운 상태로 생을 마칠 수 있는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 상태로 태어나지만, 주체가 될 수 있는 아주 작은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 우리는 자신이 접하는 사유대상을 제 것으로 만들고 나아가 사유수단을 제 것으로 만들 때 자기 사유의 주체가 될 수 있지만, 그나마 아주 미미한 정도로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49-50쪽)
이런 맥락에서 지식인은 모든 것에 답하는 총체적 지식인이 아니라, 일부러 부분적인 질문을 만들어 제기하며, 현 상태의 인식 도구를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답을 구해야 한다. 달리 말해 멀리 있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에 있는 구체적 현실에 근거해 새로운 개념을 발명해야 한다.
개인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러나 사회학자건 아니건, 인간은 구조(또는 지배)의 결정력에서 무조건 벗어날 수 없으며 날 때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다만 부르디외에 따르면 주체는 구조의 중력에서 약간은 벗어날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자유라는 행위에는 부지런함, 특히 앎에 대한 끈질긴 습득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대신 사유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접하는 사유대상을 제 것으로 만들고 사유수단 역시 제 것으로 만들 때 비로소 자유로운 상태로 죽을 작은 기회를 얻게 된다.
이런 자기 앎이 있을 때, 우리는 현행 사회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다양한 결정 기제를 바꾸거나 적어도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 있다. 두 사람은 대화의 중반부에서 이런 실천을 방해하는 기존의 몇 가지 거대한 이론, 교조화된 접근, 무한한 자유를 주장하는 자원주의,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상식과 권위에 기대는 가짜 이론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부르디외: 제가 보기에 메시아적 희망은 변혁의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런 메시아적 환상을 합리적 희망들로 대체해야 합니다. 적절한 수준의, 매우 이성적인, 어떻게 보면 온건한 희망들 말입니다. 이런 종류의 희망은 자주 개량적이거나 타협적이라는 불신에 시달리지만, 실제로는 아주 급진적인 형식 속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69쪽)
특히 이런 비판에는 ‘메시아적 구원’과 거리를 두려는 사회학의 ‘합리적 유토피아주의’가 배어 있다. 예컨대 당대의 공식 지식인 교조화된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계급이라는 혁명의 메시아를 기다를 뿐, 자본주의 발달에 따라 왜 그들이 체제 내화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게다가 계급투쟁만이 아니라, 다른 수준에서 벌어지는 투쟁, 이른바 교육, 문화 등 상징 영역에서 벌어지는 지배와 저항의 교차, 정확히는 분류화 투쟁을 이해하지 못한다. 단적으로 부르주아 자식은 왜 대학에 더 많이 가고 노동자 자식은 왜 노동자가 되는가.
부르디외가 보기에 이미 굳어진 개념, 실천으로는 이런 현상을 분석하지도 바꾸지도 못한다. 기존의 지배적·상식적 개념은 너무 거칠어서 설명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오용의 위험도 있어서 현실을 오히려 왜곡한다. 부르디외는 이렇게 말한다. “제 얘기는 ‘지금 읽고 있는 것에 주의하시오’라는 메타담론을 실어 나릅니다.”(47쪽)
구조의 힘을 역사화하다
부르디외와 동시대를 살았던 몇몇 철학자는 자신의 작업을 외부, 바깥의 사유라고 부른다. 어떤 학자는 후기 구조주의 자체가 서구 바깥에서 기원했다고 본다. 특히 푸코는 자신의 계보학을 인류학 ― 알다시피 부르디외도 인류학 작업을 수행했다 ― 에 빗댄다. 인류학자가 낯선 세계의 문화를 탐색하듯이, 계보학자는 서구 문화 안에서 바깥의 관점을 취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역으로 자기 문화를 규정하는 결정 기제를 밝혀낼 수 있다. 이 낯설게 하기 전략은 결국 우리를 구속하는 체계, 우리가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실행에 옮기는 허용과 배제의 체계를 드러내는 일이다.
푸코의 전략과 마찬가지로 부르디외는 우리를 구속하는 지배적 체계, 개인의 자유를 한정하는 구조의 힘을 분석하려고 한다. 특히 부르디외는 두 가지 상보적인 이론적 전략을 구상한다. 하나는 구조(또는 지배) 자체를 보편적이고 초역사적인 실체가 아니라 역사적 과정의 산물로 여기고, 한 사회에서 특정한 시기에 들어서는 장의 발생과 그 규칙을 분석하려고 한다. 예컨대 서양 중세에서는 돈보다 명예가 더 중요하고 태평양의 섬에서는 호혜적인 선물 교환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행위자는 그 장의 규칙에 따라, 그 내부의 상징재(돈, 명예, 지위, 명성 등)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이런 접근을 현대 사회에 들이대는 것은 결국 장의 의례, 또는 장이 부과하는 사고범주, 이해범주, 지각도식, 가치체계 따위를 무대 위에 올려 그 자의적 성격을 백일하에 드러내고 변형하고 전복하려는 전략이다.
다른 하나는 장과 결합된 개인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거꾸로 구조에 변형을 가하기도 하는 이론적 장치를 도입하는 전략이다. 그것이 바로 하비투스 개념이다. 하비투스는 객관적 구조, 또는 다양한 결정 기제가 내려앉아 개인에게 내면화된 성향 체계이다. 바꿔 말해 개인은 사회 세계의 구조를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