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더불어역사와씨름하며건너온날들에보내는헌사
문학평론가김병익의빼어난산문모음집
젊은해직기자김병익,그리고문학과지성사의출발
1975년12월,30대의젊은해직기자김병익은친구들의우정어린협박으로1인출판사를열었다.바로문학과지성사의출발이었다.유신정국으로시대는얼어붙고앞길은막막했다.그는‘불온한지식인’으로찍혀거동과글쓰기가막히고출판일은아직서툴렀다.하지만함께할친구들이있어행복했다.그즈음한신문에쓴「우정에대하여」라는짧은글에는당시그의희망과기대가한껏묻어난다.
“문득잠이깨어잠이안올라치면나는이우정들을생각하고사심없고떳떳한,천진난만하면서도시대고(時代苦)의각인을이마에달고다니는그우정의주인공들을떠올리며(『어린왕자』의)여우가말하는‘행복’을느끼고,또(『페스트』의)랑베르가리외에게느끼는감동의부스러기를줍는다.”
시대와삶을품어안는김병익산문의정수
김병익은식민지,해방,전쟁,유신,민주화등우리역사의굵직한사건을모두겪은세대다.모국어로생각하고글을쓴첫세대(419세대)라는정체성위에서자신의문학과비평세계를구축해왔다.그는문학학술출판분야를두루다루는문화부기자로시작해서,문학평론가,편집자,발행인,번역가,칼럼니스트,서평가등책과관련있는거의모든분야를거쳐왔다.책의주변에서평생을살아온셈이다.산수(傘壽)가넘은지금에도칼럼을연재하고느슨할지언정손에서결코책을놓은적이없는,그는여전히현역이다.
이번에펴낸『인연없는것들과의인연』은그동안써온많은글들가운데애착이가는,기억에남는글들을엮은산문선이다.혈기왕성한젊은지식인으로서시대와역사를고민하며쓴진지한글들을중심으로,독서와문학의언저리,그리고삶의순간순간느끼고생각한내면적인글들이알차다.비평,칼럼,서평,단상,잡감에이르기까지다양하지만모두시대와삶을품어안는비평가적사유와성찰이빼어난산문들이다.이책은글마다의끝에덧붙인‘p.s.’가인상적이다.저자는자신의옛글들을다시읽으며그글을쓸때의분위기,사연,열정,고통스러움,뒷이야기들을짧게나마추신을단것인데,이는지나간것들에대한현존감의소망이며되찾을수없는것들을향한호명일것이다.
‘현실의현장’을지키며자기십자가를지는지식인
먼저,‘야곱의씨름’제하에묶인70-80년대에쓴일련의글들은비판적지식인으로서그의지향을잘보여준다.지식인의태도와처세문제에몰두했던그는,단순히많이배운자가아니라그누구든‘지식인이되고싶다’는열의와용기를가진사람을지식인으로규정한다.“‘지금도여전히나는지식인이아니다’라는자기각성,‘지식인되고싶다,되어야한다’는부단한자기계발이있어야한다”고덧붙인다(<지식인다움을찾아서>).한편,그는1973년춘원이광수의훼절을비판하는글을연재하는중에춘원의딸에게항의편지를받는다.그일화로시작되는<작가와상황>이라는글에서그는춘원을서슴없이비난만할수없는일말의감정적유보에시달린다.거기에서“우리시대를정직하게살지못한다는고통스런자기인식”에이르고,지식인의위선과나약을부단히깨닫기위해서‘현실의현장’에남아있기를주문한다.그것은“허위로무장하는비극”을통해서라도“지식인의십자가를지자”는것이다.이런결의는<왜기자로남아있는가>에서도동일하게이어진다.기자들이다만무력해있을뿐이라고동료들을위로하면서비굴함과허위,괴로움가운데자신의자리를지켜냄으로써기자의윤리적결단을증명하고자한다.<야곱의씨름>에서는,의미를두는자에게의미있고깨어있는자에게깨어있는역사를언급하며,“언제든역사는바뀐다”는준엄한경고를환기시킨다.그것은희망이자두려움인것이다.
‘책으로부터의도피’는‘책으로의도피’였다
책읽기와문학에대한글들은저자특유의위트와재치가넘친다.책의현장을떠나다른일을해본적이없는그는,때로활자의세계가신물이나서‘책으로부터의도피’를갈망하지만결국그마저‘책으로의도피’였다.책과의질긴인연이평생을옭아맨것이다.이유쾌한산문들은책에대한애증으로뒤얽힌하소연인듯하면서역설적으로책읽기의즐거움과의미를발견하게한다.그는책만이길이라는‘엄숙주의’를경고하고,정독이니다독이니온갖정해진방식의‘모범주의’를버리라한다.책은대가없는,소용없는일이될수록그무상성(無償性)으로인해진정한희열에이른다는것.또한‘밀당’의기술이필요하다는것.“책에씌어진내용이그럴듯하게여겨지고거기에빠져들것같을때,현명한독자여,침을뱉고거기에서얼른빠져나오라!책을제대로읽는다는것,책의값을올바로매긴다는것은이렇게,정말사랑하는여인에게그러하듯이다가서며의혹을두고,도망가다가도미련으로돌아서고,껴안으면서도배신의가능성을결코지워버리지않는데서얻어진다.”
삶과더불어역사와씨름하며건너온날들에…
나이드는것은어떤것일까저만치보이던자연이성큼다가와친구처럼자상스러워지고,세상의무연(無緣)한것들의존재성을깨닫는일이리라.“그무의미한것들이,늘어서있던지난시간들속에서의미있는경험으로되살아나는느낌을내게일으켜주는것이다”(<인연없는것들과의인연>).만년에이른그의시선은이제이국의풍경들,더멀리영원의세계에까지가닿는다.그는어린아들과비행기를타고여행을하다가신이사라진시대,인간이품는‘비상에의꿈’이무엇인지생각한다.페루로떠나마추픽추를바라보며그곳을둘러싼침묵과신비,절대적인고독을겸허히받아들인다.이제그는느림의미학을만끽하고,세월만큼쌓인시간의지층에서행복했던기억을떠올린다.
이글들의마지막장면은열아홉살소년이었던저자의모습이다.순수한충만함,평화로운행복감,조용한희열로가득했던그시절,그는자신안에서차오르는지복한행복을이제자신의생애에다시는느끼지못하리라고예감한다.이산문선은삶과더불어역사와씨름하며건너온날들에보내는헌사와도같은책이다.영원한슬픔이자영원한꿈인소년시절을향해,삶가운데함께한인연들을,아울러그보다더무수한무연한것들을향해그는이렇게말한다.“무연한것들에대한나의기억이여,앞으로남은것보다지난기억이훨씬많아진나는이제그것들에,따뜻한안녕의인사를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