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1910-1945 도시계획으로 본 경성의 역사 | 식민지 수도는 어떻게 메트로폴리스가 되었나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1910-1945 도시계획으로 본 경성의 역사 | 식민지 수도는 어떻게 메트로폴리스가 되었나

$22.57
Description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서울, 엄밀히 말하면 ‘현대 서울’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놀랍게도 현대 서울은 식민지 시기 경성의 청사진(blue print)과 겹쳐진다. 물론 많은 변화가 있어왔지만 기본 골격과 변화의 방향은 해방 이전, 1910년에서 1945년 동안 설계되어온 바탕에서 기원한다. 당연히 설계자들은 ‘우리’가 아닌 ‘일본 제국’이었다. 그렇다면 일제는 경성을 어떻게 만들고자 했을까? 나아가 해방 이후 우리는 식민지 수도 경성에서 벗어나, 혹은 극복하면서 어떻게 현대 서울로 변화시켜 왔을까?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은 책 제목에서 은유하듯이 1910년 병합부터 시작된 식민지 수도 ‘경성의 탄생’과 도시 개발의 과정을 통해 지금에 이르는 현대 ‘서울의 기원’을 풀어내고자 한다.

저자

염복규

저자염복규는1971년‘서울동북지역’에서태어나‘서울서북지역’에서주로성장했다.서울대학교국사학과와같은대학원석,박사과정을마쳤다.가톨릭대,동국대,명지대,서울대,이화여대,한신대등에서한국사를강의했으며,국사편찬위원회편사연구사를거쳐현재서울시립대학교국사학과조교수로재직중이다.도시사학회편집위원장,계간《역사비평》편집위원으로도활동하고있다.
저서로는《서울은어떻게계획되었는가》(2005,살림),《식민지공공성,실체와은유의거리》(2010,책과함께,공저),《도시화와사회갈등의역사》(2011,심산,공저),《제국일본과식민지조선의근대도시형성》(2013,심산,공저),《식민지라는물음》(2014,소명출판,공저),《서울의인문학》(2016,창비,공저)등이있으며,한국근현대도시변화와지역사회동향에지속적인관심을가지고연구하고있다.

목차

목차
프롤로그·4
1장제국의문명,도성을해체하다
1경성을격자형도시로만들어라17
조선총독부의경성도심부공간구조재편구상
2수도의정비,식민통치5주년의‘치적’25
1910년대전반경?성시구개수주요노선의부설과정
3식민지권력의‘문명’,식민자의‘사익’43
총독부시구개수의지향과재경성일본인사익추구의충돌
2장종묘관통선,전통/근대/식민의교차로
1총독부,종묘를헐어길을내려고하다53
종묘관통선의최초부설시도와갈등
210년의공사,10년의갈등66
순종의사망과종묘관통선의‘완성’
3‘종묘의존엄’인가,시민의‘편의’인가78
종묘관통선을바라보는조선어언론의다면적시각
3장도시계획을둘러싼갈등과‘정치’
1‘경성도시계획’,새로운갈등의시작89
1920년대경성도시계획논의와시구개수이관문제
2‘친일파’가‘조선인’을대변하는역설96
경성부의수익세제정시도와찬반논란
3갈등의봉합,식민통치의임계108
경성부의시구개수안조정과시구개수이관
4장‘대경성’마스터플랜의형성
1마침내‘대경성’이되다119
경성부행정구역확장논의의전개와귀결
2용도별구획과계층별위계의형성133
경성시가지계획의기본구상
3경성,근대도시의‘내실’을갖추다137
가로망,토지구획정리,지역제의세부계획안
*‘도시’계획령에서‘시가지’계획령으로
5장전쟁이이끌어낸도시계획,전쟁에가로막히다
1재정난,자재난,인력난의악순환181
가로망부설사업의지연과동원의한계
2외곽공업지역과주거지역개발192
토지구획정리의전개과정과‘개발’양상
3폭격에대비하여공지를확보하라217
‘방공’논의와공원계획·풍치지구지정
*청계천,식민과근대를가로질러흐르다
6장도시유토피아,‘교외’의탄생과죽음
1‘전원도시’라는꿈혹은신기루247
식민지시기‘교외’개념의형성
2‘당신들의전원’,남산문화주택지252
남산주회도로의부설과정과사회적갈등
3근대적도시중산층커뮤니티의탄생265
돈암지구구획정리와주택지형성의특징
*전쟁과주거공공성환기의역설
7장도시계획의두얼굴,빈민의구제와배제
1‘토지의불법점유자’,토막민303
경성지역빈민주거의실태
2철거와저항311
경성시가지계획의시행과빈민주거의박탈
3도시계획과빈민의‘포섭’,예정된실패319
경성부빈민주거대책의전개와좌절
8장‘경성’에서‘경인’으로
1대륙침략과병참기지‘경인’335
지방·국토계획론도입과경인지역의위상
2경인메트로폴리스환상곡343
경인시가지계획의배경과전개
3‘수도권’구상의기원과궤적355
‘광역도시권’구상과경인시가지계획의수정
에필로그·368
주·374
참고문헌·404

출판사 서평

출판사서평
식민지수도경성은어떻게서울을잉태했는가?
경성은일본이도입한서구의도시,한국적근대의한단면
지금우리가딛고있는서울,엄밀히말하면‘현대서울’은어디에서시작되었을까?놀랍게도현대서울은식민지시기경성의청사진(blueprint)과겹쳐진다.물론많은변화가있어왔지만기본골격과변화의방향은해방이전,1910년에서1945년동안설계되어온바탕에서기원한다.당연히설계자들은‘우리’가아닌‘일본제국’이었다.그렇다면일제는경성을어떻게만들고자했을까?나아가해방이후우리는...
식민지수도경성은어떻게서울을잉태했는가?
경성은일본이도입한서구의도시,한국적근대의한단면
지금우리가딛고있는서울,엄밀히말하면‘현대서울’은어디에서시작되었을까?놀랍게도현대서울은식민지시기경성의청사진(blueprint)과겹쳐진다.물론많은변화가있어왔지만기본골격과변화의방향은해방이전,1910년에서1945년동안설계되어온바탕에서기원한다.당연히설계자들은‘우리’가아닌‘일본제국’이었다.그렇다면일제는경성을어떻게만들고자했을까?나아가해방이후우리는식민지수도경성에서벗어나,혹은극복하면서어떻게현대서울로변화시켜왔을까?
《서울의기원경성의탄생》은책제목에서은유하듯이1910년병합부터시작된식민지수도‘경성의탄생’과도시개발의과정을통해지금에이르는현대‘서울의기원’을풀어내고자한다.이과정에서아래와같은질문들과만나면서자연스레과거의경성과현대의서울을하나의연속선상에서이해하고자한다.
●경성의도시개발은제국의문명이었다?
●왜을지로개발을둘러싸고일본인들이반대했을까?
●조선인들은왜조선황실의존엄이아닌도로의편의를선택했을까?
●경성도시개발을둘러싸고친일파는왜조선인을대변했을까?
●일제는왜청계천을복개하려했을까?
●해방이전‘강남’은불모지였고영등포가주목받았을까?
●식민지시기‘부동산투기열’과이로이득을본자들은누구였을까?
●남산자락은어떻게부촌이되었을까?
●서울의주요주거지는식민지시대만들어진중산층들의‘베드타운’(신도시)이었다?
●일제의‘신도시’건설에쫓겨난식민지철거민들은어디로갔을까?
●경인고속도로,경인운하…1일생활권,수도권서울은일제의계획이었다?
지금,이곳,우리에게식민지시기란무엇인가?쉬운듯하지만어려운질문이다.그러나피해갈수없는질문이기도하다.‘식민지시기’란과연무엇이었을까?1910년8월병합에서1945년8·15에이르는시기식민지수도경성의변화상을살피고자하는이책은이질문에서출발한다.
더불어도시는고대부터존재한것으로근대의고유한산물은아니다.그러나도시를가리켜“근대성의산실이자임상실험실이며도서관”이라는표현에알수있듯이도시는근대를대표하는현상이다.식미지시기경성도마찬가지이다.지금의현대서울을이해하려면식민지시기경성을들여다봐야하는이유이다.
식민지시기일제는경성이라는공간에여러변화의지층을남겨놓았다.이는서울을비롯한한국도시발달의전제가되었으며,오늘날에도여러도시에서식민지도시개발의‘지층’이발굴된다.비단물리적공간에만한정되지도않는다.오늘날도시개발을둘러싼제도와계획들은어떠한가?오늘날날마다목도하는도시개발의기본적인아이디어를식민지시기에서찾는일은어려운일이아니다.따라서경성의변화(도시개발)를살펴봄으로써식민지시기처음대면한근대의실체,그리고그유산의존재가지금무엇을의미하는지이책은강조하고있다.
경성은‘일제의도시’가아니라‘일본을경유한서구’의도시이다
식민지시기경성은수도로서특별한지위를잃었다.공식적으로는일제의일개지방도시,구체적으로는일제의‘외지’인식민지조선,더나아가경기도도청소재지로격하되었다.그러나조선시대500여년간수도였던서울의‘역사성’을일제가무시할수는없었다.또한조선총독부를비롯한식민통치의핵심기구가밀집한도시로서경성은식민지‘수도’역할을수행했다.이런가운데일제는경성의도시공간을개조하기위해여러시도를지속했다.이를둘러싸고벌어진다양한갈등과결과의방대함은다른도시와비교하기어려울정도다.이런탓인지20세기한국도시의발달은전국도시의‘서울화’였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그러므로식민지시기경성의변화는8·15이후서울의변화로연결되었다.나아가현대한국도시의변화와맞닿아있다는점에서더큰의미를찾을수있다.
한편식민지시기경성은서구와대비되는일제식민지도시건설의특징을잘드러낸다.일반적으로서구제국주의의식민지도시는‘식민자의도시’와‘식민지민의도시’를인위적으로분리한공통점이있다.이런‘분리’는아시아,아프리카곳곳에건설된서구식민지도시에서발견된다.예컨대인도에서무굴제국의옛수도인델리(OldDelhi)옆에온전히영국인만을위한뉴델리(NewDelhi)를건설한것은하나의상징적인사례이다.
그러나일제는식민지도시건설에서인위적인분리를명확하게시도하지않았다.물론도시내부에서식민자와식민지민의거주와활동영역이자연스럽게나뉘는경향은있었지만,적어도식민지권력이공식적으로분리를강제하지는않았다.
또일제식민지도시의외관과내면은일본의전통적인무엇과일본이서구에서도입한무엇이뒤섞여있었다.그중에서도결정적인것은후자,즉경성은일본이서구에서도입한도시의구현이었다.이는도시뿐아니라일제식민통치의고유한특징이라고도할수있다.일본은제국주의를자처했지만그실체는‘일본이도입한서구’혹은‘일본을경유한서구’였던것이다.그러므로한국적근대의비밀은서구와직접대면하지못하고일본을경유한서구와대면했던사정을이해했을때비로소풀린다.
재경성일본인,‘제국의문명’에반기를들다
‘무단통치기’인1910년대경성의도시개발(주로남대문과을지로일대)을둘러싸고갈등이발생하는데상대적으로조선인보다경성거주일본인들의저항이거셌다.주로토지보상을둘러싼일본인들의‘사익’과충돌한것이다.
남대문·남대문정거장[지금의서울역]구간과황금정통[지금의을지로]은공통적으로공사자체보다도로부지를취득하는데많은시간이소요되었다.최종적인이유는총독부의매수교섭에완강하게반발하는일본인토지소유자하마오카와마츠모리때문이었다.[중략]1880년대부터1910년전후까지조선으로건너온일본인중에는일본에서사회적지위가낮고경제력도빈한하여조선에서한몫을보려는자들이많았다.이들은재산축적에서수단,방법을가리지않았음은물론불법도서슴지않았다.따라서통감부나총독부에게서“제국의위신을실추시킨다”는비난을듣는경우도많았다.(45쪽)
일제의식민지도시개발은일본인을‘위해’이루어졌다거나일본인에게‘유리’하게이루어졌다는인식,서울의경우일제는남촌의일본인중심지개발에치중했으며북촌의조선인중심지는버려두었다는인식은지나치게일면적인것임을알수있다.물론식민지도시개발의여러경우를보면그런측면이없는것은아니었다.그러나적어도1910년대전반시구개수[경성중심부도시개발]과정에서식민지권력은조선인은물론일본인의사익과도대립하는목표를추구했으며그것을‘문명’이라는이름으로정당화했다.(50쪽)
황실의존엄VS식민지조선인의편의,일제VS친일파
현재안국동에서이화동에이르는율곡로일부구간은종묘와창덕궁·창경궁을가로지르고있다.이도로는1932년완공되었다.당시도로부설을두고조선황실(순종)과전주이씨종약소를중심으로한조선지배세력과일반식민지조선인의시각은달랐다.일반조선인들은‘종묘의존엄’보다는‘교통의편리’라는근대적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