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잉크

빨간 잉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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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문화 평론가 이택광의 비평집 『빨간 잉크』
지금 여기에 없는 ‘빨간 잉크’

이택광 저자는 슬라보예 지젝의 농담 중 하나인 ‘빨간 잉크’ 이야기를 예로 들며 글을 시작한다. 그 농담은 지금 여기의 문제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빨간 잉크는 분명 거짓말을 뜻하지만, 빨간 잉크로 쓰인 편지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내용은 이데올로기의 이중 구조를 보여준다. 빨간 잉크의 금지야말로 이데올로기의 거짓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럼으로써 이 거짓은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빨간 잉크’ 이야기는 구 사회주의 국가에서 회자했지만, 현재 우리가 마주하는 한국의 현실을 적확하게 보여준다. 모든 것이 다 갖춰진 듯한 정상적인 2018년의 한국에서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금지당한 것은 무엇일까. 그 비정상적인 것이야말로 정상적인 것을 위해 추방당한 것들일 테다.
저자는 그 추방당한 것들을 검토하면서 지난 4년을 보냈고, 빨간 잉크가 없어 파란 잉크로 적힌 금지당한 것들을 이야기하려고 『빨간 잉크』를 지었다.

『빨간 잉크』의 특별한 권말 부록, 이택광이 만난 랑시에르와 지젝

이택광 저자는 2018년 3월에 파리를 방문했을 때 몽마르트에 있는 자크 랑시에르의 자택을 찾아가 2시간 동안 프랑스와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2016년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트럼프 증상에 대해 도발적 분석을 내놓아 논쟁을 촉발했던 슬라보예 지젝에게 화상 통화로 1시간가량 트럼프 이후 세계는 어떤 모양새일지 더 나아가 좌파적 대안은 어떤 것이 가능할지를 묻고 들었다. 이 두 인터뷰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빨간 잉크』 권말 부록으로 실었다.
저자

이택광

경희대학교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에서문화연구를가르친다.2004년영국에서서구마르크스주의와문화이론을주제로박사학위를받았다.슬라보예지젝과함께TheIdeaofCommunism시리즈세번째권(2016)을편집해출판했다.『박근혜는무엇의이름인가』(2014),『반고흐와고갱의유토피아』(2014)등을냈다.

목차

시작하며:지금여기에서금지당한것들에대해
트럼프는무엇인가
반지성주의
우리의악은먼곳에서시작됐다
팬덤,광신,그리고민주주의
금지당한정치
지그문트바우만의교훈
1968년5월과CIA
‘세계없음’으로부터어떻게세계는존재하게되는가
비트코인이라는절망적희망
페미니즘과진보의재구성
‘남성혐오’는없다
혐오를넘어서
마치며:내용없는민주주의와대안없는민족주의를지나서

부록
자크랑시에르인터뷰:모든대안은이미현실에다있다
슬라보예지젝인터뷰:트럼프이후세계는어디로가고있는가

후주

출판사 서평

비평이란쓰고읽고나누고

이택광저자는지난촛불의광장에서『빨간잉크』대부분의원고를구상했다.많은사람이혁명이라고부른그사건은저자에게는현재를바꾸기위한행동이아니라과거를불러오기위한행동으로보였다.2008년이래촛불은한국의정치상황을보여주는증상이었다.
민주주의의후퇴를말하는분위기에반해저자는진보의비가역성을주장해왔다.알라딘의램프에서거인을불러낼수있지만,다시들어가게할수는없다.이거인이바로민주주의다.이런관점에서저자는지난대통령탄핵의촛불이되돌릴수없는역사의마지노선을확인해줬고,이마지노선이야말로한국사회가1987년이후에달성한근대시민성의본질이라고믿는다.
저자는오늘의한국사회를진지하게성찰하고자한다면이지점에서출발해야하고,어떤과장이나폄하도없이민주주의가초래한낯선상황을마주할수있는침착한용기가필요하다고말한다.무한한부정성의세계를파고들어의미를길어올리는것이계속글을써야하는이유라고밝히면서미력한책을묶기로결심한까닭은이런생각을함께나눌수있는독자들이아직있을것이라는기대감때문이라고덧붙인다.지금의한국을살아가는이들에게과연이런종류의비평은어떤의미일것인지회의적이기도하지만,끊임없이급변하는상황에즉각적대응을내놓아야하는것이오늘의비평가이기도하다는것을부정할수는없다고전한다.

한국의어제와오늘

트럼프대통령당선,팬덤,비트코인열풍,미투운동,사이버불링,판문점선언등현재이곳에서는여러사건과사고가일어난다.이런각종사회현상으로당장무슨큰일이벌어지는것은아니기에겉으로는평화로워보일지언정이념이든진실이든거짓이든무엇인가의이면에가려져있다.
차례만살펴봐도알수있듯『빨간잉크』는저자가한국의어제와오늘을주도면밀하게통찰해일목요연하게정리한비평집이다.저자가아우른한국은다음과같다.
대통령탄핵이후모든것이완성된것처럼보이는이세계의정체는무엇일까.이세계는세계없음을가리고있는스크린이다.마치디즈니랜드처럼평화로운세계는세계없음이라는진실을가리기위한가상의현실처럼보인다.그러나이가상의현실은파란잉크처럼진리의빨간잉크를공백으로간직한다.진보와보수가치열하게격돌하는것처럼보이지만,부동산문제에가면둘의목소리는하나로잦아든다.비핵화와한반도평화를소리높여말하지만,결국모든문제는남북경협이라는경제논리로빨려들어가고있다.남북문제에서민족이외에다른가치를제시할수없는곤경은무엇을의미하는것인지되새겨봐야한다.평화가우리민족끼리잘사는문제에그친다고한다면지난세기에되풀이했던문제를다시불러들이는제스처이상의의미를가지기어려울것이다.
한국에서전개되는정치상황은이런우려를더욱가속화하고있다.집권여당은보수주의로확고하게이동했고,그대안은이제더왼쪽에있는좌파가아니라더오른쪽에있는우파다.그러나우파의보수주의가궤멸한상황에서대안으로부상할수있는것은유럽의경우와유사하게극우주의일것이다.대한문앞에서벌어지는태극기집회가냉전극우주의라면,앞으로다가올극우주의는냉전으로부터자유로운내전의패러다임에근거한극우주의일것이다.현실사회주의국가의붕괴이후많은사람이거대담론의종언을이야기했지만,실상은그렇지않았다.전지구화가초래하는초국경의상황은민족주의를더욱강화하는결과로나아갔고,한국도예외가아니라고볼수있다.예멘난민을둘러싼분위기는이사실을단적으로보여준다.말만세계시민을지향할뿐이지사실상한국의정책은대내용인경우가허다하다.포퓰리즘이야말로한국사회의정신이다.도처에서확인할수있는기성제도와포퓰리즘의갈등은규제를완화하고일부세력의특권을해체하는방향으로나아갈것이고,이런평평한공간은극우주의도하나의가치로인준받는과정을예비할것이다.

[책속으로이어서]

예를들어지난촛불의경험을떠올려보자.촛불의개개인들은촛불이라는현상으로나타날뿐이지그개개인들을모두나타낼수없다.항상촛불은어떤집합의모습으로재현되지만,개개인들은거기에셈해지지않는다.이렇게셈해지지않는것들이야말로실제로촛불의‘자리’를만들어낸것이라고할수있다.(121쪽)

‘세계없음’의‘사유없음’을보여주는대표사례가한때한국을휩쓴비트코인열풍일것이다.가히광풍이라고불릴만한‘쏠림현상’을비트코인열풍에서확인할수있었다.이‘쏠림현상’도‘사유없음’의징후같은것이라고말할수있겠다.(123쪽)

미투가폭발력을보이는까닭은이처럼남녀라는젠더관계에서발생하는문제가남성에게일방적으로유리한권력관계를통해억압됐기때문이다.이지점에서주목해야할문제는바로이한국적미투의특이성이다.미투는미국에서시작한것이지만,한국으로들어오면서단순하게특정개인의성범죄를폭로하는선에그치지않고사회전반의젠더불평등문제를제기하는방향으로나아갔다.여성의억압문제가보편인권의문제와결합했다는점에서한국적미투의폭발력은주목할만한것이라고하겠다.여기에덧붙여그만큼한국사회에서그동안여성이여성이라는이유만으로발언하지못하고인내해온불평등의구조가존재했다는것을새삼확인할수있는것이다.(136쪽)

나는한국의가족구조와생산관계가결과적으로이런‘여혐’을통해구성됐다고본다.가장핵심적증거는바로임금차등이다.동등하게교육을받고입사해일해도여성이라는이유로여성노동자는임금을적게받는다.이문제는이미일제식민지시대부터불거진것이다.당시공장에서여성노동자는남성노동자와똑같이일하면서도임금을비롯한모든영역에서차별을받았다.이런차별은이른바경제개발시대에도예외는아니었다.여성노동자는언제나‘임시’였고,‘보조’였다.남성은큰일을해야하고,여성은현모양처로서남성을뒷바라지해야한다는가족이데올로기는이런경제구조를재생산하기위한물질적토대였다.여성이열등하다고생각하는사고방식이한국의경제발전과정과무관하다고보기어려운것이다.(151쪽)

‘지적대화’에대한관점이이렇게바뀐것은우연이아니다.백과사전적지식을구축한‘완전한자기’를추구하는경향은이미초기부르주아사회에서도확인할수있는일이었다.재력못지않게명예를추구한부르주아는과거귀족이누렸던문화유산을그대로계승하고자했다.오늘날유럽을관광대국으로만들어주는‘볼거리들’이대부분이렇게만들어진것이다.부르주아는귀족문화를거부한것이아니라자신들을귀족으로만들려했다고볼수있다.(1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