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이 책은 티벳어로 '장춥람림첸모'이다. ‘장춥(보리菩提)’은 깨달음이란 의미이며 ‘람’은 길(도道), ‘림(차제次第)’은 단계, 순서, 과정 따위를 말한다. 즉 깨달음의 길을 가는 순서 혹은 과정이라는 의미이다. ‘첸모’는 자세히 해설한다는 뜻을 담고 있어서 한문으로 ‘보리도차제광론(菩提道次第廣論, 이하 광론)’이라고 한다.
이 책은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붓다를 이루는 길로 이끄는 안내서이자 지도이다. 이 지도가 가리키는 대로 그 길을 따라 가면 반드시 성불이라는 목적지에 이르게 된다. 사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깨달음의 길을 안내하는 거대한 지도이지만 목적지에 따른 안내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고 또 방대해서 사용할 줄 모르는 여행자에게는 활용하기가 어렵다. 이 책은 깨달음의 길을 가는 여정에서 반드시 어디를 거쳐 가야 하는지, 또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자세하게 풀어내면서 동시에 하나의 구조로 체계화되어 있어 활용하기 좋은, 매우 훌륭한 지도이다.
‘보리도차제(람림)’의 연원은 아티샤(Atiśa, 980-1052) 존자로 거슬러 올라간다. 쫑카빠 대사는 『광론』의 예비수습편에서 보리도차제는 근원적으로 미륵보살의 『현관장엄론現觀莊嚴論』의 가르침이며 동시에 『보리도등론菩提道登論』의 가르침을 해설한 것이므로 『보리도차제론』의 실질적인 저자는 자신이 아니라 아티샤 존자라고 밝히고 있다.
『광론』의 예비수습편에서 잘 나와 있듯이 아티샤존자는 기울어져 가는 티벳 후기 불교의 중흥조로서 국가적 차원에서 왕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가며 인도에서 모셔온 존귀한 스승이다. 한 나라의 왕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정신적 스승을 모셨던 그 간절함은 당시의 시대 상황의 절박함을 짐작케 한다. 당시는 밀교라는 미명 하에 자칭 인도의 아사리(阿闍梨,ācārya), 빤디따(paṇḍita)라고 하는 이들에 의해 사도邪道가 크게 성행하여 무엇이 정법인지 사법인지를 구별하기 힘들었다. 때문에 예쎼 외(ye shes ’od) 왕은 이러한 종교적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인도에서 바른 스승을 모셔 와야 한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에서 정법과 사법을 가려 줄 뛰어난 스승을 초청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찍이 예쎼 외 왕은 역경사 린첸 상보(rin chen bzang po)를 비롯한 스물 한 명을 인도로 유학을 보내 인재로 키웠으며 티벳에 돌아온 뒤에는 그들이 경론을 번역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인도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역경사들에게 정법과 사법을 가려 주고 티벳 땅의 쇠락한 불교를 중흥시킬 수 있는 스승이 누구인지를 묻자 그들 모두 디빰까라 씨리쟈나(Dīpamkaraśrījñāna,아티샤 존자의 본명)라는 분을 모셔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들의 말대로 아티샤 존자를 모시기로 결정한 예쎼 외 왕은 인도에 유학했던 스물 한 명의 인재 가운데 한 명인 역경사 갸 쭌뒤 쎙게(rgya brtson ’grus seng ge)에게 많은 금을 주고 여덟 명의 조력자와 함께 인도로 가서 스승을 모셔오도록 하였다. 하지만 아티샤 존자를 모시는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초청을 위한 시도를 계속하고 실제 스승을 모셔 오는 데까지 많은 재정이 필요했던 탓에 금을 채굴하는 일에 왕이 직접 나서게 되었고 그러던 중에 주변 지역의 이슬람교를 신봉하던 갈록(gar log) 왕에게 볼모로 잡히게 되었다. 그가 불교 국가의 왕이었던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갈록은 불교를 버리면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하며 그를 가두었다. 예쎼 외 왕을 살리기 위해 달려온 손자 장춥 외(byang chub ’od)에게 갈록은 인도에서 스승을 초청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지배하에 들어오거나 혹은 예쎼 외 왕의 신체 크기만큼의 금을 받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하였다. 장춥 외는 금을 구해 예쎼 외 왕의 목숨을 구하기로 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머리를 제외한 신체의 크기에 해당하는 금을 구했지만 갈록 왕은 머리 크기만큼의 금까지 모두 가져 올 것을 요구하며 끝끝내 예쎼 외를 풀어 주지 않았다.
더 이상 금을 구하지 못했던 장춥 외는 예쎼 외를 찾아가 전쟁을 일으켜 무력으로 해결한다면 많은 사상자가 따르는 살생과 악업을 피할 수 없고, 인도에서 스승을 모셔 오는 것을 포기하고 악법을 따르는 왕의 지배하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예쎼 외 왕은 웃으면서 “내가 죽더라도 남은 일을 네가 잘 해낼 수 있겠구나. 법을 위해서 죽는다면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내게 두 가지 소원이 있다. 갈록 왕에게 한 톨의 금도 주지 말고 인도에서 스승을 모셔 오는데 쓰도록 해라. 설사 스승을 모셔 오는 일을 실패하더라도 이 모든 사실을 스승께 고하여 불교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연으로 내생에는 스승을 실제 뵐 수 있도록 가피하시고 제자로 거두어 주십사 했다고 전해 다오.”라고 하며 풀려나기를 포기하고 죽기를 원하였다. 그의 죽음 후 장춥 외 왕이 그 유지를 받들어 많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아티샤라는 뛰어난 스승을 티벳 땅에 모시게 된 것이다.
역사 속에서 불교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써 쓰였다면 티벳의 두 왕은 오직 깊은 신심으로 불교의 위대한 유산을 바르게 계승하려는 애민정신과 보살정신을 보여 주었다. 그와 같은 예쎼 외의 숭고한 희생과 장춥 외의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이 가르침을 접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들 왕이 보여주었던 불법에 대한 진심이 아티샤 존자로 하여금 마지막 여생을 오로지 중생들을 위한 마음으로 전법에 헌신하게 만든 것이다. 아티샤 존자의 전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한 나라의 왕의 아들로 태어나 온갖 향락을 다 누렸으나 출가하여 위대한 스승으로 추앙받으며 존경과 환대를 받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해발 3500미터가 넘는 척박하고 황량한 땅, 유배지나 다름없는 변방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결단했다는 것은 보살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아티샤라는 인물은 인도의 국가적 인재였기 때문에 티벳 방문도 오직 3년이라는 기한 아래 허락되었으며 3년이 지난 후 인도로부터 귀환을 독촉 받게 되었다. 그의 귀환을 바라는 인도의 수많은 제자들과 대중의 열망이 커지고 귀환 요청이 계속되자 아티샤 존자는 인도 제자들을 위해 모든 가르침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보리도등론』을 저술하였고 자신이 인도로 귀환하는 대신 그 책을 인도로 보내었다. 『보리도등론』을 받아 본 인도인들은 아티샤 존자께서 귀환한 것과 다름없다고 크게 만족하였고 존자는 티벳 땅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로써 마침내 법통을 바로 세우고 불교를 중흥하여 대승의 정법을 널리 선양하는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부처님의 모든 교설의 핵심이 응축되어 있는 『보리도등론』을 시작으로 티벳 땅에 도차제의 가르침이 뿌리내리고 훗날 제 쫑카빠 롭상 닥빠(rje tsong kha pa blo bzang grags pa)에 의해 그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이 책은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붓다를 이루는 길로 이끄는 안내서이자 지도이다. 이 지도가 가리키는 대로 그 길을 따라 가면 반드시 성불이라는 목적지에 이르게 된다. 사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깨달음의 길을 안내하는 거대한 지도이지만 목적지에 따른 안내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고 또 방대해서 사용할 줄 모르는 여행자에게는 활용하기가 어렵다. 이 책은 깨달음의 길을 가는 여정에서 반드시 어디를 거쳐 가야 하는지, 또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자세하게 풀어내면서 동시에 하나의 구조로 체계화되어 있어 활용하기 좋은, 매우 훌륭한 지도이다.
‘보리도차제(람림)’의 연원은 아티샤(Atiśa, 980-1052) 존자로 거슬러 올라간다. 쫑카빠 대사는 『광론』의 예비수습편에서 보리도차제는 근원적으로 미륵보살의 『현관장엄론現觀莊嚴論』의 가르침이며 동시에 『보리도등론菩提道登論』의 가르침을 해설한 것이므로 『보리도차제론』의 실질적인 저자는 자신이 아니라 아티샤 존자라고 밝히고 있다.
『광론』의 예비수습편에서 잘 나와 있듯이 아티샤존자는 기울어져 가는 티벳 후기 불교의 중흥조로서 국가적 차원에서 왕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가며 인도에서 모셔온 존귀한 스승이다. 한 나라의 왕이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정신적 스승을 모셨던 그 간절함은 당시의 시대 상황의 절박함을 짐작케 한다. 당시는 밀교라는 미명 하에 자칭 인도의 아사리(阿闍梨,ācārya), 빤디따(paṇḍita)라고 하는 이들에 의해 사도邪道가 크게 성행하여 무엇이 정법인지 사법인지를 구별하기 힘들었다. 때문에 예쎼 외(ye shes ’od) 왕은 이러한 종교적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인도에서 바른 스승을 모셔 와야 한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에서 정법과 사법을 가려 줄 뛰어난 스승을 초청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찍이 예쎼 외 왕은 역경사 린첸 상보(rin chen bzang po)를 비롯한 스물 한 명을 인도로 유학을 보내 인재로 키웠으며 티벳에 돌아온 뒤에는 그들이 경론을 번역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인도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역경사들에게 정법과 사법을 가려 주고 티벳 땅의 쇠락한 불교를 중흥시킬 수 있는 스승이 누구인지를 묻자 그들 모두 디빰까라 씨리쟈나(Dīpamkaraśrījñāna,아티샤 존자의 본명)라는 분을 모셔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들의 말대로 아티샤 존자를 모시기로 결정한 예쎼 외 왕은 인도에 유학했던 스물 한 명의 인재 가운데 한 명인 역경사 갸 쭌뒤 쎙게(rgya brtson ’grus seng ge)에게 많은 금을 주고 여덟 명의 조력자와 함께 인도로 가서 스승을 모셔오도록 하였다. 하지만 아티샤 존자를 모시는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초청을 위한 시도를 계속하고 실제 스승을 모셔 오는 데까지 많은 재정이 필요했던 탓에 금을 채굴하는 일에 왕이 직접 나서게 되었고 그러던 중에 주변 지역의 이슬람교를 신봉하던 갈록(gar log) 왕에게 볼모로 잡히게 되었다. 그가 불교 국가의 왕이었던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갈록은 불교를 버리면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하며 그를 가두었다. 예쎼 외 왕을 살리기 위해 달려온 손자 장춥 외(byang chub ’od)에게 갈록은 인도에서 스승을 초청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지배하에 들어오거나 혹은 예쎼 외 왕의 신체 크기만큼의 금을 받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하였다. 장춥 외는 금을 구해 예쎼 외 왕의 목숨을 구하기로 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머리를 제외한 신체의 크기에 해당하는 금을 구했지만 갈록 왕은 머리 크기만큼의 금까지 모두 가져 올 것을 요구하며 끝끝내 예쎼 외를 풀어 주지 않았다.
더 이상 금을 구하지 못했던 장춥 외는 예쎼 외를 찾아가 전쟁을 일으켜 무력으로 해결한다면 많은 사상자가 따르는 살생과 악업을 피할 수 없고, 인도에서 스승을 모셔 오는 것을 포기하고 악법을 따르는 왕의 지배하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예쎼 외 왕은 웃으면서 “내가 죽더라도 남은 일을 네가 잘 해낼 수 있겠구나. 법을 위해서 죽는다면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내게 두 가지 소원이 있다. 갈록 왕에게 한 톨의 금도 주지 말고 인도에서 스승을 모셔 오는데 쓰도록 해라. 설사 스승을 모셔 오는 일을 실패하더라도 이 모든 사실을 스승께 고하여 불교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연으로 내생에는 스승을 실제 뵐 수 있도록 가피하시고 제자로 거두어 주십사 했다고 전해 다오.”라고 하며 풀려나기를 포기하고 죽기를 원하였다. 그의 죽음 후 장춥 외 왕이 그 유지를 받들어 많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아티샤라는 뛰어난 스승을 티벳 땅에 모시게 된 것이다.
역사 속에서 불교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써 쓰였다면 티벳의 두 왕은 오직 깊은 신심으로 불교의 위대한 유산을 바르게 계승하려는 애민정신과 보살정신을 보여 주었다. 그와 같은 예쎼 외의 숭고한 희생과 장춥 외의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이 가르침을 접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들 왕이 보여주었던 불법에 대한 진심이 아티샤 존자로 하여금 마지막 여생을 오로지 중생들을 위한 마음으로 전법에 헌신하게 만든 것이다. 아티샤 존자의 전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한 나라의 왕의 아들로 태어나 온갖 향락을 다 누렸으나 출가하여 위대한 스승으로 추앙받으며 존경과 환대를 받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해발 3500미터가 넘는 척박하고 황량한 땅, 유배지나 다름없는 변방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결단했다는 것은 보살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아티샤라는 인물은 인도의 국가적 인재였기 때문에 티벳 방문도 오직 3년이라는 기한 아래 허락되었으며 3년이 지난 후 인도로부터 귀환을 독촉 받게 되었다. 그의 귀환을 바라는 인도의 수많은 제자들과 대중의 열망이 커지고 귀환 요청이 계속되자 아티샤 존자는 인도 제자들을 위해 모든 가르침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보리도등론』을 저술하였고 자신이 인도로 귀환하는 대신 그 책을 인도로 보내었다. 『보리도등론』을 받아 본 인도인들은 아티샤 존자께서 귀환한 것과 다름없다고 크게 만족하였고 존자는 티벳 땅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로써 마침내 법통을 바로 세우고 불교를 중흥하여 대승의 정법을 널리 선양하는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부처님의 모든 교설의 핵심이 응축되어 있는 『보리도등론』을 시작으로 티벳 땅에 도차제의 가르침이 뿌리내리고 훗날 제 쫑카빠 롭상 닥빠(rje tsong kha pa blo bzang grags pa)에 의해 그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보리도차제광론 1 - 나란다불교학술원총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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