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반야바라밀경 역주

금강반야바라밀경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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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 경(經)의 유래는 부처님께서 설법한 것을 아난의 입을 통하여 경전을 결집한 것을 구마라집(401), 보리유지(509), 진제(562)에 의하여 「金剛般若波羅蜜多經」으로 번역되고, 급다(岌多, 590)에 의하여 「金剛能斷般若波羅蜜多經」과 현장(玄奘, 648)에 의하여 「大般若波羅蜜多經」卷577에 번역되고, 의정(義淨, 703)에 의하여 「佛說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으로 번역된 것이다.
여기에서는 여러 본(本)이 번역되어 있지만 구마라집의 번역본을 저본으로 하고 다른 본들은 참고로 번역하는데 사용하였다. 경(經)의 내용을 중심으로 요의경의 입장에서 대승으로 번역하여 그 당시의 모습을 바탕으로 지금 수행에 사용할 수 있게 하려고 한다.
「금강경」이나 선어록 등에서는 깨달음을 보리ㆍ해오ㆍ증오ㆍ돈오ㆍ정각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는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 정각을 대상으로 이해하면 많은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자신이 반야로 사성제나 12연기법 등으로 견성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성문이나 연각이 되는 법이며 보살이 되는 법은 육바라밀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성문ㆍ연각ㆍ보살이 되는 것으로 삼승을 말한다. 성문ㆍ연각ㆍ보살이 견성하고 실천하는 것을 소승이라고 하는 것이고 여래라는 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기에 견성성불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돈오도 자신이 견성하고 대상경계를 ‘경계지성’으로 전환하여 자각하고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를 해야 한다.
즉 삼승이 되는 것을 견성[깨달음ㆍ정각]이라고 하는 것인데 여래가 되는 것을 깨달음이라는 것은 관점의 차이가 약간 있다. 그리고 돈오라는 말도 바로 자신의 중생심을 불심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며 자신이 견성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깨달음은 삼승이 되는 것을 일반적으로 깨닫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부처의 깨달음은 아라한이나 보살마하살이 훈습된 대승의 상태인 돈오돈수의 훈습에서 나아가 몰종적인 최상승의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고 이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부처이다.
「금강경」은 범어로 “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라고 하며 영어로는 “The Diamond Sūtra”나 “The Diamond Cutter Sūtra”라고 하고 있다. 즉 ‘Vajracchedikā’의 뜻을 보면 ‘Vajra’는 “Indra's thunder bolt”라는 뜻으로 강력한[제석천] 벼락이나 번개라는 뜻이다. 그리고 ‘chedikā’는 자르는 것이나 파괴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이것을 합치면 한자로 ‘霹靂能斷’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말은 구마라집의 「금강경」에서는 금강이라고 하였고 이것을 다이아몬드라고 표현한 영어의 뜻은 강하다는 의미이며 또한 강한 것을 절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말이 ‘반야’를 수식하는 단어이므로 ‘금강’이나 ‘마하’라고 하여도 중요한 것은 ‘능단’하는 반야(般若, Prajñā)가 된다. ‘반야’가 ‘금강’이고 ‘마하’이므로 ‘능단’하는 ‘반야’를 반야의 지혜나 진여의 지혜라고 하여 불교의 근간이 된다. 그러므로 번역하면 (자신이) 반야의 지혜로 번뇌 망념의 육도윤회를 뛰어넘어 여래가 되는 바른 방법이나 길이다. 이것은 「금강경」의 깨달음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자신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하면 바른 보살이 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있다. 즉 ‘진여’라는 것을 ‘능단’으로 이해할 때에 자신이 현신으로 삼승이 되는 것이고 바른 깨달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사상(四相)없이 ‘금강반야바라밀’만 실천하면 대승과 최상승의 자유와 해탈을 이루게 된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는 이 말을 모든 여래가 마음을 깨달아 들어가는 문(門)이라고 하는 것은 이 말에 모두가 다 들어 있는 것이므로 바로 이 자리에서 고정관념의 의심과 집착을 버리고 진여의 지혜로 깨달으면 바로 피안에 도달하고 또 이 경(經)이 있는 곳을 부처가 있는 곳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여래는 이 마음을 깨달아 무명이 삼세의 망심이라는 것을 요달하여 이 지혜가 진심이라고 깨닫는 것을 마음을 깨달았다라고 하고 있다.
제목에 ‘능단’이라는 말을 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처럼 자신이 자신의 진심을 자각하여야 생사윤회를 쉬고 이 지혜로 피안에 도달하게 되는 것을 ‘범성’이 동일하다고 하고 있다. 이렇게 깨닫는 것이 정확하므로 경(經)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금강경」에서 깨달음이 시작되어 경전이나 선어록에서 깨달음을 성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금강경」에서 ‘금강’을 다이아몬드라고 하는 것은 가장 강하기에 무엇이나 파괴할 수 있고 또 무엇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진여의 지혜이므로 망념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진여의 지혜로 보살도를 실천하여 여래가 되는 가르침을 설한 경전이다. 그리고 “「금강경」은 여섯 번 한역되었는데 가장 많이 유포되고 독송되는 경(經)이 구마라집의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다.” 또 「금강경」은 대승불교의 반야경전으로 혜능이 구도하여 정각을 얻게 되는 것이 「금강경」의 “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보살이 집착과 분별심을 버리고 상대적인 유무를 벗어나 여래를 친견하여 무소주의 마음인 대승과 최상승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을 설하고 있다.
「금강경」은 오랜 세월동안 많은 이들이 아주 소중하게 여기고 현재까지 수행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이 내용은 궁극적으로 ‘반야’라는 뜻을 전하고 실천하여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즉 ‘반야’에 대하여는 지혜라고 많은 설명이 이제까지 충분하게 된 것이나 실천하는 것은 아직까지 미흡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현재 많은 이들이 독송하고 외우는데 빠져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경(經)에서 중요한 ‘능단’을 놓쳤기 때문에 이 경(經)에서 시작된 깨달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즉 이 경(經)에 의하여 깨달음을 성취하였다고 선어록에서도 전하고 있듯이 이 경(經)에 모든 답이 ‘능단’에 있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깨달아 보살이 되고자 하면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공(空)으로 체득해야 한다. 여기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보살이 되는 깨달음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한자로 번역하면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고 하는 것은 ‘아뇩다라’는 무상(無上)이라는 위가 없다는 것으로 최고라는 말과도 통한다. 그리고 ‘삼먁’은 정등(正等)으로 바른 평등이라는 말이고 ‘삼보리’는 정각(正覺)으로 바른 깨달음이라는 것으로 올바른 깨달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정각은 제법을 자신의 본성인 공(空)으로 견성한 것을 말하는 지혜이므로 모두를 합하면 진여의 지혜로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낸 바른 보살을 말한다.
「금강경」에서 깨달음은 반야(般若)를 말하지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無上正等正覺’으로 바른 깨달음이고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하면 보살인 것이다.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初發心時便成正覺’이라고 ‘초발심’을 정각(正覺)이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바른 깨달음의 내용인 정각(正覺)을 어떻게 성취하는가를 「대방광불화엄경」권8에서는 “初發心時便成正覺, 知一切法眞實之性, 具足慧身不由他悟.”라고 ‘初發心時便成正覺’이라고 하고 있다. 여기에서 정각(正覺)인 바른 깨달음의 내용을 살펴보면 ‘知一切法眞實之性’과 ‘具足慧身不由他悟’인 것이다. 먼저 ‘知一切法’은 일체법을 깨닫는 것[知]이라는 말인데 이것을 「묘법연화경현의」권5에 ‘了達諸法’이라고 ‘知’를 ‘了達’이라 하고 있다. 그리고 내용으로 ‘眞實之性’을 「화엄일승성불묘의」에는 ‘卽心自性’이라고 하였고 「육조단경」에서는 ‘識心見性’으로 깨달음을 견성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종경록」(T48)에 의하면 “舉一心爲宗 照萬法爲鑑(如鏡)”이라고 일심을 종지로 하면 만법을 거울과 같이 관조하게 된다고 여기에서는 ‘일체법’, ‘제법’을 ‘만법’이라고 하고 있다. 이것이 ‘知一切法眞實之性’에서 말하는 견성(見性)이다. 그 다음은 ‘具足慧身不由他悟’를 살펴보면 ‘具足慧身(成就慧身)’을 ‘所有聞法(들은 불법을 소유)’이라고 하고 있다. 또 ‘不由他悟’를 “다른 사람의 깨달음에 말마암지 않는다.”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自覺’이라고 「대방광불화엄경소」19에 기록하고 있다. 자각이라는 말은 ‘능단’해야 한다는 정각을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은 이렇게 견성(見性)하는 것이고 소승(小乘, 성문ㆍ연각ㆍ보살)은 견성(見性)하고 성불해야 하는 것으로 돈오점수하여 훈습해야 대승으로 돈오돈수하여 아라한에서 최상승의 여래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견성을 소승이라고 하는 것은 구경에는 성공(性空)이어야 한다는 사견(四見)이 있기 때문에 소승은 불능(不能)이라고 「금강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소승은 “들을 수도 수지[聽受]할 수도 독송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해설할 수도 없다”라고 분명하게 설하고 있다.(若樂小法者, 著我見 人見 衆生見 壽者見, 則於此經, 不能聽受讀誦 爲人解說.) 이것은 「금강경」을 해설하는 사람은 대승이나 최상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금강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대승과 최상승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하여 이 경(經)에 자세하게 설하고 있으므로 내용을 자세하게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저자

양지

저자:양지

1992년해인사길상암명진스님을은사로출가했으며동국대선학과박사과정을수료하고현재김해신흥사주지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