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5ㆍ16 군사 혁명을 왜 했나? 혁명 정부는 도대체 뭔 일을 했는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 편은 혁명정부,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인간 박 정희가 1962년과 1963년 기간 동안에 무슨 일을 했는가에 초점을 두고 쓴 글이다. 5ㆍ16 군사 혁명 이후에 전개되는 국가 행정, 통치에 관련되는 내용을 주로 다루었다.
혁명 정부는 모든 영역에서 전 방위적으로 혁신을 추구하였다. 법적, 제도적 정비와 함께 국가 재건을 시도하고 동시에 국민 재건 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민재건운동은 온 국민의 의식주 여건 개선, 관습과 사고 및 행태의 선진화를 추구한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어느 누구도 시도해보지 못했던 국민 의식 개혁, 생활 태도 개선 작업을 혁명 정부에서는 과감하게 시도하였다. 이런 작업은 박 정희 대통령이 오랜 기간 동안 벼르고 벼르던 ‘국민 개조’ 작업에 속하는 일이다.
국가발전을 위해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곧바로 1962년부터 추진에 들어간 것은 ‘실천 행정’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전 정부에서 겨우겨우 체면치레 정도의 계획 수립에 머무르던 것을 치밀하게 계획서를 만든 뒤 행정 관료와 전문가, 관계 국민들을 총동원하여 추진해 갔다. 추진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발생하면 즉시 수정 계획을 수립하여 재추진에 나섰다.
혁명 정부를 괴롭게 한 것은 정치 자유화와 함께 민정 이양이었다. 국가 발전을 위해 가장 절실했던 ‘정치 규제’가 민정 이양을 논하고 자유 민주 정치를 복원하자마자 엄청난 부담과 도전으로 나타났다. 군사 혁명의 원인을 제공했던 정치 혼란이 곧바로 재현되는 상황을 놓고 박 정희 의장과 군부는 엄청난 고민에 빠졌다. 1963년 연초부터 민정 이양의 시기와 방법을 놓고 혁명정부, 박 의장은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국민들을 실망시켰다.
공화당 창당과 민정 이양 과정에서 발생한 내부 분열은 혁명 정부를 뿌리부터 흔들리게 만들었다. 마침내 가장 측근에 있던 동지조차도 잘라 내야만 했다. 그리고 노련한 기성 정치인들과의 협상 과정에서 박 의장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바라다보는 사람들은 그의 권력욕을 비난했고, 그의 민정 이양에 관한 약속을 의심했다.
비록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박 정희 대통령의 민정 이양 일정은 처음 그가 구상했던 대로 차근차근 진행되어 갔다. 제3공화국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윤 보선과 대결하여 당선되었고,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새로운 민간 정부의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여당이 국회에서 안정 의석을 확보함에 따라 박 대통령이 혁명 당시부터 목표로 세웠던 국가 발전, 경제 개발을 순조롭게 추진해 갈 수 있게 되었다.
혁명 정부의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제3공화국으로 정권이 이어지면서 짧은 혁명 정부 기간 동안의 업적이 묻혀버린 감이 있지만 2년 7개월 간의 혁신 정책은 이후 모든 영역에서 빛을 발하게 되었다.
혁명 정부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8개로 정리하였다. 국가 시스템 재건(체 體), 정치 순화(치 治), 법치 사회 구현(법 法), 치안과 국방 공고화(안 安), 실천 행정 국가 구축(행 行), 경제 중심의 산업 국가로 방향 설정(산 産), 수출과 세계화 추구(세 世), 젊은 한국으로 변신(청 靑)이 그것이다. 보는 시각에 따라 정리 방법이 달라질 수는 있다.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 편은 혁명정부,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인간 박 정희가 1962년과 1963년 기간 동안에 무슨 일을 했는가에 초점을 두고 쓴 글이다. 5ㆍ16 군사 혁명 이후에 전개되는 국가 행정, 통치에 관련되는 내용을 주로 다루었다.
혁명 정부는 모든 영역에서 전 방위적으로 혁신을 추구하였다. 법적, 제도적 정비와 함께 국가 재건을 시도하고 동시에 국민 재건 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민재건운동은 온 국민의 의식주 여건 개선, 관습과 사고 및 행태의 선진화를 추구한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어느 누구도 시도해보지 못했던 국민 의식 개혁, 생활 태도 개선 작업을 혁명 정부에서는 과감하게 시도하였다. 이런 작업은 박 정희 대통령이 오랜 기간 동안 벼르고 벼르던 ‘국민 개조’ 작업에 속하는 일이다.
국가발전을 위해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곧바로 1962년부터 추진에 들어간 것은 ‘실천 행정’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전 정부에서 겨우겨우 체면치레 정도의 계획 수립에 머무르던 것을 치밀하게 계획서를 만든 뒤 행정 관료와 전문가, 관계 국민들을 총동원하여 추진해 갔다. 추진 과정에서 시행착오가 발생하면 즉시 수정 계획을 수립하여 재추진에 나섰다.
혁명 정부를 괴롭게 한 것은 정치 자유화와 함께 민정 이양이었다. 국가 발전을 위해 가장 절실했던 ‘정치 규제’가 민정 이양을 논하고 자유 민주 정치를 복원하자마자 엄청난 부담과 도전으로 나타났다. 군사 혁명의 원인을 제공했던 정치 혼란이 곧바로 재현되는 상황을 놓고 박 정희 의장과 군부는 엄청난 고민에 빠졌다. 1963년 연초부터 민정 이양의 시기와 방법을 놓고 혁명정부, 박 의장은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국민들을 실망시켰다.
공화당 창당과 민정 이양 과정에서 발생한 내부 분열은 혁명 정부를 뿌리부터 흔들리게 만들었다. 마침내 가장 측근에 있던 동지조차도 잘라 내야만 했다. 그리고 노련한 기성 정치인들과의 협상 과정에서 박 의장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바라다보는 사람들은 그의 권력욕을 비난했고, 그의 민정 이양에 관한 약속을 의심했다.
비록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박 정희 대통령의 민정 이양 일정은 처음 그가 구상했던 대로 차근차근 진행되어 갔다. 제3공화국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윤 보선과 대결하여 당선되었고,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새로운 민간 정부의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여당이 국회에서 안정 의석을 확보함에 따라 박 대통령이 혁명 당시부터 목표로 세웠던 국가 발전, 경제 개발을 순조롭게 추진해 갈 수 있게 되었다.
혁명 정부의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제3공화국으로 정권이 이어지면서 짧은 혁명 정부 기간 동안의 업적이 묻혀버린 감이 있지만 2년 7개월 간의 혁신 정책은 이후 모든 영역에서 빛을 발하게 되었다.
혁명 정부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8개로 정리하였다. 국가 시스템 재건(체 體), 정치 순화(치 治), 법치 사회 구현(법 法), 치안과 국방 공고화(안 安), 실천 행정 국가 구축(행 行), 경제 중심의 산업 국가로 방향 설정(산 産), 수출과 세계화 추구(세 世), 젊은 한국으로 변신(청 靑)이 그것이다. 보는 시각에 따라 정리 방법이 달라질 수는 있다.
세상은 내가 바꾼다 :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 - 박정희 이력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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