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척약재학음집』은 약간의 사(詞)와 명(銘)을 포함하여 전체가 한시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문집의 구성에 있어 산문이 빠진 채 한시 위주로 짜여지는 것은 고려시대 문집들에서 흔하게 보이는 현상이다. 예컨대 진화(陳澕)의 『매호유고(梅湖遺稿)』, 백비화(白賁華: ‘백분화’로 읽기도 한다.)의 『남양시집(南陽詩集)』, 민사평(閔思平)의 『급암시집(及菴詩集)』, 이집(李集)의 『둔촌잡영(遁村雜詠)』, 한수(韓脩)의 『유항시집(柳巷詩集)』, 이종학(李種學)의 『인재유고(麟齋遺稿)』, 이직(李稷)의 『형재시집(亨齋詩集)』 등 많은 문집들이 시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 400여 제(題)의 척약재 시(惕若齋詩)는 그 내용 상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관료로서 바라본 나라와 백성에 대한 근심, 염원 등을 다룬 사회시(社會詩)ㆍ애민시(愛民詩)ㆍ우국시(憂國詩), 산수(山水)의 풍광을 다룬 자연시(自然詩), 다양한 문인 및 승려들과의 교유시(交遊詩), 중국 사행시(使行詩), 여흥 유배시(流配詩), 운남 유배시(流配詩), 만시(挽詩) 등이 그것이다. 이 중 사회시ㆍ애민시ㆍ우국시 계열은 경국제민(經國濟民)의 포부를 품은 사대부(士大夫) 관료 문인의 애국(愛國)ㆍ애족(愛族)의 정신이 나타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자연시 계열은 관조(觀照)와 사색(思索), 시인으로서의 섬세한 감성이 잘 드러난 당시풍(唐詩風)의 시들이 많다. 척약재 시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지우(知友)들과의 교유시이다. 여기에는 서로 화답한 창화시(唱和詩), 차운시(次韻詩), 증시(贈詩)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교유시가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척약재의 다양한 교유 관계에 기인한다. 그가 교유한 인물들을 몇 가지 범주로 분류해 보면 첫째는 성균관 학관(學官)으로 재직하면서 인연을 맺은 그룹이다.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정재 박의중, 박상충 등이 그들이다. 둘째는 학계나 문단의 선ㆍ후배 그룹이다. 이들은 대개 당대의 명망받는 인사들로 권주, 이존오, 권근, 하륜, 염흥방, 강호문, 허금, 염정수, 전오륜, 안종원 등이 그들이다. 셋째는 척약재와 과거에 함께 급제했던 동방(同榜)들이다. 이들 중 몇 명과는 평생지기로 매우 가깝게 지냈으며 계속해서 시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최복하, 함승경, 양이시, 이집, 이보림 등이 여기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승려들인데 척약재는 고려 후기의 다른 사대부들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고승(高僧)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침 스님, 영 스님, 운 스님, 난 스님, 혜전 스님 등이 그들이다.
중국 사행시(使行詩)는 1372년(공민왕 21) 성절사(聖節使)로 명(明)에 갔을 때 쓴 것으로 척약재는 1372년 8월에 떠나 그 이듬해 7월에 귀국하였다. 중국 사행시의 내용은 대체로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화려한 선진 문물에 대한 감탄, 오고가는 여정(旅程)에서의 감회, 중국 문인들과의 교유 등인데, 특히 남경(南京)에서 포은 정몽주와 조우(遭遇)한 뒤의 기쁨과 반가움을 쓴 시는 특별한 경험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여흥 유배시(流配詩)는 1375년 북원(北元)의 사신을 반대하다가 당시 조정의 권력을 쥐고 있던 이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주(竹州)로 유배를 당하고 얼마 후 모향(母鄕)인 여흥(驪興)으로 이배(移配)된 뒤 1381년 해배(解配)될 때까지 쓴 시들을 말한다. 여흥 유배 중 시인은 정치적 포부를 펼칠 수 없는 자기의 불우한 처지로 인해 계속 갈등하고 고뇌하였다. 이 시기에 쓰여진 시 중 상당수의 작품이 유배지의 자연공간을 다룬 산수시(山水詩)이다. 척약재는 여흥의 자연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며 삶에 대한 의지와 꿈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운남 유배시(流配詩)는 1384년 임금의 명을 받고 명(明)나라에 행례사(行禮使)로 사행을 갔다가 사교(私交)를 했다는 죄목으로 요동(遼東)에서 붙잡혀 당시 명의 수도인 남경으로 압송되고, 명 태조 주원장에 의해 운남 대리위로 유배의 명을 받은 뒤 유배지로 가는 도중 사천(四川) 노주(瀘州)의 객사에서 병사(病死)하기까지 작시(作詩)된 시들을 말한다. 척약재가 사행을 떠난 것이 1384년 1월이고 객사에서 병사한 것이 동년 7월이었으니 6개월 남짓 되는 기간에 쓴 것들인데 45수 정도가 해당된다. 우리 문학사에서 일반적으로 유배문학(流配文學)은 주로 유배지에서 임금을 그리워하는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이거나, 또는 유배의 부당함이나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것에 비해 척약재의 운남 유배시는 이국의 유배지에서 느끼는 향수와 고독감 또는 그 비극성이 여타의 다른 시들에 비해 훨씬 더 심화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즉, 부당한 또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맞서 한 개인이 겪게 되는 고통과 내적 갈등, 염원 등 다양하고 복잡한 정서들이 이들의 유배시에 잘 드러나 있기 때문에, 공룡과도 같은 거대한 세계의 폭력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왜소한 인간의 고독을 이들의 시편을 통해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일찍이 17세기의 비평가 남용익(南龍翼)은 그의 시화집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 김구용의 시를 ‘고형(苦敻)’하다고 평하였는데, ‘고형’은 외롭고 절박한 상황에서 어떤 생각이나 소망이 간절하게 끝없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운남 유배기의 시들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만시(挽詩)는 척약재가 본인과 가까웠던 인물들의 죽음을 접하고 쓴 것들인데, 총 13제 18수의 만시가 보인다. 이는 동시대 목은 이색이나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에 비하면 분량은 적지만, 척약재 특유의 문학성이 잘 드러나 있어 주목할 만한 시작(詩作)이라고 할 수 있다. 척약재 만시는 대개가 동료나 그들의 부인과 모친의 죽음을 애도한 ‘도붕시(悼朋詩)’ 계열의 것이어서 목은, 포은 등이 시도했던 당대 만시 창작의 흐름과도 동일한 현상을 보여 준다. 특히 과거의 동방이었던 양이시(楊以時)의 죽음을 다룬 것은 시인의 안타까움과 애도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어 만시로서의 문학성이 뛰어나다. 또한 운남 유배에 동행했던 인사들의 죽음을 다룬 시도 있어 상당히 특이하며, 이는 유배 중 척약재의 심경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척약재는 정치적으로는 훌륭한 관료였고, 문학적으로는 뛰어난 시인이었다.
이번 번역서를 작업하면서 가장 중점에 둔 사항은 각주작업이었다. 단순한 사전적 해설이 아닌 작시의 배경이나 상황 등도 설명하고자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또한 김구용의 문집인 「척약재학음집(惕若齋學吟集)」의 여러 판본을 비교하는 것은 물론이고, 동시대 교유했던 여러 문인들의 기록과 「동문선(東文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실린 척약재 시문과의 판본 비교도 함께 진행하였다. 본서의 말미에는 「척약재학음집」에는 실려 있지 않은 문집의 발문, 척약재 상소문, 한시 등을 비롯한 척약재 관련 기록들을 부록으로 모아 놓았다.
중국 사행시(使行詩)는 1372년(공민왕 21) 성절사(聖節使)로 명(明)에 갔을 때 쓴 것으로 척약재는 1372년 8월에 떠나 그 이듬해 7월에 귀국하였다. 중국 사행시의 내용은 대체로 중국의 유구한 역사와 화려한 선진 문물에 대한 감탄, 오고가는 여정(旅程)에서의 감회, 중국 문인들과의 교유 등인데, 특히 남경(南京)에서 포은 정몽주와 조우(遭遇)한 뒤의 기쁨과 반가움을 쓴 시는 특별한 경험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여흥 유배시(流配詩)는 1375년 북원(北元)의 사신을 반대하다가 당시 조정의 권력을 쥐고 있던 이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주(竹州)로 유배를 당하고 얼마 후 모향(母鄕)인 여흥(驪興)으로 이배(移配)된 뒤 1381년 해배(解配)될 때까지 쓴 시들을 말한다. 여흥 유배 중 시인은 정치적 포부를 펼칠 수 없는 자기의 불우한 처지로 인해 계속 갈등하고 고뇌하였다. 이 시기에 쓰여진 시 중 상당수의 작품이 유배지의 자연공간을 다룬 산수시(山水詩)이다. 척약재는 여흥의 자연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며 삶에 대한 의지와 꿈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운남 유배시(流配詩)는 1384년 임금의 명을 받고 명(明)나라에 행례사(行禮使)로 사행을 갔다가 사교(私交)를 했다는 죄목으로 요동(遼東)에서 붙잡혀 당시 명의 수도인 남경으로 압송되고, 명 태조 주원장에 의해 운남 대리위로 유배의 명을 받은 뒤 유배지로 가는 도중 사천(四川) 노주(瀘州)의 객사에서 병사(病死)하기까지 작시(作詩)된 시들을 말한다. 척약재가 사행을 떠난 것이 1384년 1월이고 객사에서 병사한 것이 동년 7월이었으니 6개월 남짓 되는 기간에 쓴 것들인데 45수 정도가 해당된다. 우리 문학사에서 일반적으로 유배문학(流配文學)은 주로 유배지에서 임금을 그리워하는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이거나, 또는 유배의 부당함이나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것에 비해 척약재의 운남 유배시는 이국의 유배지에서 느끼는 향수와 고독감 또는 그 비극성이 여타의 다른 시들에 비해 훨씬 더 심화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즉, 부당한 또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맞서 한 개인이 겪게 되는 고통과 내적 갈등, 염원 등 다양하고 복잡한 정서들이 이들의 유배시에 잘 드러나 있기 때문에, 공룡과도 같은 거대한 세계의 폭력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왜소한 인간의 고독을 이들의 시편을 통해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일찍이 17세기의 비평가 남용익(南龍翼)은 그의 시화집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 김구용의 시를 ‘고형(苦敻)’하다고 평하였는데, ‘고형’은 외롭고 절박한 상황에서 어떤 생각이나 소망이 간절하게 끝없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운남 유배기의 시들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만시(挽詩)는 척약재가 본인과 가까웠던 인물들의 죽음을 접하고 쓴 것들인데, 총 13제 18수의 만시가 보인다. 이는 동시대 목은 이색이나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에 비하면 분량은 적지만, 척약재 특유의 문학성이 잘 드러나 있어 주목할 만한 시작(詩作)이라고 할 수 있다. 척약재 만시는 대개가 동료나 그들의 부인과 모친의 죽음을 애도한 ‘도붕시(悼朋詩)’ 계열의 것이어서 목은, 포은 등이 시도했던 당대 만시 창작의 흐름과도 동일한 현상을 보여 준다. 특히 과거의 동방이었던 양이시(楊以時)의 죽음을 다룬 것은 시인의 안타까움과 애도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어 만시로서의 문학성이 뛰어나다. 또한 운남 유배에 동행했던 인사들의 죽음을 다룬 시도 있어 상당히 특이하며, 이는 유배 중 척약재의 심경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척약재는 정치적으로는 훌륭한 관료였고, 문학적으로는 뛰어난 시인이었다.
이번 번역서를 작업하면서 가장 중점에 둔 사항은 각주작업이었다. 단순한 사전적 해설이 아닌 작시의 배경이나 상황 등도 설명하고자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또한 김구용의 문집인 「척약재학음집(惕若齋學吟集)」의 여러 판본을 비교하는 것은 물론이고, 동시대 교유했던 여러 문인들의 기록과 「동문선(東文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실린 척약재 시문과의 판본 비교도 함께 진행하였다. 본서의 말미에는 「척약재학음집」에는 실려 있지 않은 문집의 발문, 척약재 상소문, 한시 등을 비롯한 척약재 관련 기록들을 부록으로 모아 놓았다.
역주 척약재학음집 (양장본 Hard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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