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따라 자취따라 다산 정약용

삶따라 자취따라 다산 정약용

$20.32
Description
“다산 정약용 선생을 알지 못하면, 근세 한국의 학문과 사상을 말할 수 없다.”
“술에 취하면 하루가 가고, 목민심서에 취하면 천년 대계가 이루어진다.”

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다산문화원을 다녀갔습니다. 다산문화원에는 다산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이들의 흔적이 이 시대 사람들의 발자취가 되어 이미 수백 권의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기록은“효도는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동트기 전에 일어나라, 기록하기를 좋아하라.”고 당부하신 다산 말씀의 실천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강의를 듣고, 토론하고, 기록하면서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다산 초당을 다녀와서 자녀들과 함께 느낌을 정리하고, 다산의 정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면 더욱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 책은 이런 방문객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쓴 책입니다.
다산선생의 어린 시절부터 오늘의 초당이 있기까지의 내용을 산문적으로 기술하여,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다산초당을 답사하는 많은 분들의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한 지적(知的) 염원을 채워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평소 다산정신 생활화 운동을 추진해 왔던 저의 노력이
삶 따라 자취 따라 다산 정약용」이라는 책으로 정리되어, 다산문화원에서 함께 토의하고 기록하면서 다짐하였던 많은 분들 외에도, 다산을 알고자 하는 더 많은 독자들과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오늘을 살기 힘겨워 하는 많은 분들께 희망이 되고, 귀중한 깨달음으로 간직되길 바랍니다. 〈저자 서문에서〉
저자

윤동환

윤동환(尹棟煥)은1951년12월1일다산이
적거(謫居)하던강진귤동마을
다산초당(茶山草堂)산하에서태어났다.

실학(實學)을집대성한다산학의산실다산초당은
본래윤동환의6대조부귤림처사(橘林處士)
윤단(尹慱)이거처하던단산정(慱山亭)이었다.

윤단은장서2천여권을제공하며18제자와함께
강학으로자오할수있도록선생을뒷바라지하였다.
선생의막내제자성균진사(成均進士)윤종진(尹鐘軫)은
윤동환의4대조부이기도하다.

다산선생의외가후손이자제자의후손인윤동환은
스스로‘다산은나의운명’이라며다산학에심취,
선생의깊은사상과철학을연구,저술,강의하며,
필생의사업으로(사단법인)다산기념사업회·
다산문화원을설립,다산목민정신생활화운동에앞장서고있다.

윤동환은
강진군수를역임하였으며,
(사)다산기념사업회·다산문화원
이사장을맡고있다.
다산명가,다산처럼,다신계다원을운영하고있다.·「해설목민심서」
·영문판목민심서「Mongminsimseoby
JeongYak-YongTranslatedIntoKorean
byYunDong-Hwan」
·「다산의생애와사상」
·「윤동환의다산진혼곡」
·「차와다산그리고강진」등이있다.

목차

제1장하늘이낸천재9
당파싸움을뒤로하고10
외갓집서재에묻혀16
일곱살에확인된천재성21
새로운학문에눈을뜨고28

제2장성군(聖君)정조대왕과의만남 35
임금앞에서강의한다산36
천주교를믿는사람들40
첫귀양길에올라47
암행어사정약용53

제3장목민관이되어백성들의삶속으로63
굶주리는백성들64
농부의마음으로74

제4장어긋나기만하는인간사에밀려 91
고향마현여유당을찾아92
다시시작된천주교박해96
남도천리강진유배114


제5장유배지에서흘리는눈물129
하피첩에담긴가족사랑130
유배지에서보낸편지249
약전형님을생각하며260

제6장사람사는곳에차고넘치는인정283
윤씨가문의헌신적도움284
신선같은다도(茶道)생활289
혜장선사와의만남297
초의선사와의만남309

제7장절망속에서꽃핀실사구시정신 317
실학을집대성한다산초당318
백성들의고통에눈물흘리며359
다산에서맺은다신계(茶信契)405

제8장어둠속에서새벽은오고413
농민이잘살아야행복한나라414
오직백성을위하여424
귀양이풀리고427
고향여유당에서431

제9장다산이남긴민족의찬란한유산 437
다산의개혁사상438
다산의학문세계463

제10장우리에게되묻는다산의의미 473
정다산유적보존회에서
(사)다산기념사업회가설립되기까지474
강진과다산을다시찾아야한다484
부록다산연보(年譜)487

출판사 서평

당파싸움을뒤로하고

하늘이인재를내는것은본디한시대의쓰임을위해서이다.하늘이냈는데도사람이버리는것은하늘을거스르는것이다.하늘을거스르고도하늘에나라를길이유지하게해달라고비는것은있을수없는일이다.나라를다스리는자가하늘의순리를받들어행하면나라의명맥(命脈)을훌륭히계속시킬수있을것이다.’

허균이「유재론遺才論)」에서언급한말이다.조선후기사회는분명국운융성의시기였다.그러나모처럼맞이한좋은기회를잃어버림으로써조국은근대화에늦었고,결국뼈아픈근대사를맞이해야했다.이러한비운의역사속에다산정약용이라는민족의큰스승이자리하고있었다.어찌보면,다산정약용의삶과우리민족의역사가동일한궤적을그리고있는지도모르겠다.

여기물있고산있네
큰영화없고
헛된욕심또한없네

푸르름이천지를뒤덮은계절6월이었다.마을앞에‘소내(苕川)’라는이름의강이있었다.강주변은매우아름다울뿐만아니라평화롭고조용했다.
그강가에큰갓을쓰고도포를입은선비한사람이낚싯대를드리우고앉아,고기대신세월을낚는듯강건너먼산을바라보며한수시를읊었다.
그는당파싸움에밀려관직을그만두고고향마을로내려온정약용의아버지정재원(丁載遠)이었다.
마침논에풀을뽑으러강가를지나가던한농부가정재원에게인사말을건넸다.
“어르신,오늘도낚시하십니까?”
“그러하오만….”
정재원은바쁜농사철에강가에앉아낚싯대를드리우고있는것이미안했다.그래서그는말끝을흐렸다.
“많이낚으셨습니까?”하면서농부는정재원곁으로다가서며다시말을시켰다.
그로서는서울에서높은벼슬에올라나랏일을돌보아야할어른이한적한농촌으로내려와하루하루를지루하게소일하고있는것이안타까워서위로의말이라도건네고싶은마음이었다.
“아니,아직그럴듯한손맛한번못보았으니….”

임금님앞에강의한다산

1783년,정약용은22세때소과초시를거쳐회시에합격했다.
이때부터정약용의집에경사가잇따랐다.
그해에맏아들학연을낳았고,남산밑회현방에집을사서이사를했다.
정약용은‘재산루(在山樓)’아래에집을마련하여서재를꾸미고,그곳에서학문을닦았다.
다음해정약용은어전에서「중용(中庸)」을강의하게되었다.23세의청년이임금앞에서자신의실력을발휘할기회를갖게되었으니,참으로영광스러운일이었다.
중용은공자의손자인자사(子思)가지은유교경전의하나다.모든일이한쪽으로치우치지않으면서때에적중하는덕을쌓는것을가르치는책이다.
정약용이어전에서강의할때차분하면서도엄숙한분위기로이끌어갔다.그는임금앞에나가기전에미리그내용을조사하고연구하였다.임금앞에서한시간강의를하려면,정약용자신은무려몇곱절의시간동안그내용을분석하면서준비해야했다.
이때그자신이이해하기힘들거나의문나는대목이있으면수표교부근에사는큰형약현(若鉉)의처남으로학문이높기로잘알려진이벽(李檗)을찾아가서묻고도움을받곤했다.
이처럼성실하고철저하게준비를하고난다음이므로정약용의강의는당연히명강의였다.
하루는강의를듣고난임금이곁에있던승지에게이렇게말했다.
“궁중에서강의하는선비들가운데으뜸가는사람은바로정약용이오.그의강의는항상조리있고명쾌하여어려운대목도이해하기쉽게풀이하거든….”
임금의말을전해들은대사헌김상집은정약용에게그이야기를들려주었다.
“그대의강의가선비들중으뜸이라고말씀하셨소.장래가촉망되는인재라는말씀을덧붙이시면서….”
“황공하옵니다.그러나제강의가참으로임금의마음에드셨다면그것은모두광암(曠菴)이벽선생님의덕분이옵니다.”
정약용은겸손하게말하며고개를숙였다.
그러던어느날,정약용은고향마현의큰형약현의집을찾아갔다.
때마침그곳에는둘째형인약전(若銓),셋째형인약종(若鍾),그리고이벽이함께있었다.
그들은‘서학(西學)’에대해이야기를나누고있었다.
그무렵의사람들은서양의과학기술과천주교를서학이라고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