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장사상륙작전”개요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남침전쟁으로 낙동강까지 후퇴한 국군이 전세를 만회하고자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 지휘아래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었다. 이때 인천 상륙에 앞서 양동작전의 일환으로 그날 새벽에 육군 제1유격대대가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동 해변에서 LST문산호로 상륙하였다,
당시 문산호에 승선하여 상륙작전을 수행한 유격대 대원은 대부분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학도병이었다. “조국을 우리의 힘으로 지키자” 라는 구호 아래 경상도와 제주 지역에서 징집된 학생들은 단기간의 강도 높은 정신교육과 전술훈련을 받고 이명흠 대대장의 인솔아래 부산으로 이동했다.
군사 극비인 〈육본 작명 제174호〉 작전명령에 9월14일 LST에 탑승하여 다음날 9월15일부터 17일까지 상륙작전을 전개하며, 함포지원과 항공기 폭격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중대한 임무를 맡은 이명흠 대대장은 유격대대원을 집합시켜 출동준비를 지시했다.
부산항에서 출항하기에 앞서 기만작전의 성격상 대대를 ‘사단’으로 중대를 ‘연대’로 격상하고 계급도 이명흠 대위를 ‘소장’으로, 중대장을 ‘대령·중령’으로 임시 계급을 부여한 다음,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고위 장성이 참석하는 출정식을 공개리에 육군본부 광장에서 거행하였다.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처럼 적에게 일부러 노출하기 위함이었다.
LST문산호에 승선한 인원은 모두 843명이었다. 황재중 선장을 비롯한 승조원 44명, 유격대대 772명, 해군 헌병 5명 그리고 육본 51통신대 통신병 12명과 전술 고문 전성호 대령(연락병 3명) 및 정략고문으로 민간인 박영선 등 3명이 승선했고 미 해군에서 해리슨 중위, 쿠퍼상사와 통역관 1명을 파견했다.
태풍 Kezia가 발생하여 거센 바람과 높은 파도로 해상 상태가 나빴으나 인천상륙작전 때문에 9월 14일 오후 4시에 출항을 강행했다. 이명흠 대대장은 대원들에게 출항 목적과 상륙장소와 시간을 알려주고, 개인 총구와 장구를 점검한 뒤 대원들은 출전 각오를 다지며 휴식에 들어갔다.
새벽 여명이 트자 이명흠 대대장의 상륙명령에 따라 황재중 선장이 접안을 시도했으나 거센 바람에 닻줄이 끊겨 배가 파도에 밀려 해안 바닥에 얹히고 말았다. 좌초된 상태에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으나 배의 밧줄을 백사장 소나무에 연결하여 상륙을 개시하자 적으로부터 집중포화가 퍼부어졌다.박격포탄이 선교를 강타하는 등 함정 자체가 운항 불가 상태임에도 대원들의 상륙은 희생이 속출하였지만 계속 진행되었다.
대대원들이 해안에 완전히 상륙하기까지에는 마치 지옥의 불울 건너듯이 두 차례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빗발치는 총탄을 피해 해안을 지나고 전방의 200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했다. 결사적인 돌진으로 60여 명의 전사자와 90여 부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유격대대는 교두보를 확보하고 적의 방어거점을 점령한 후, 곧바로 장사동 일대의 적 잔당을 소탕하는 작전을 펼쳤다. 9월 15일 하루는 새벽부터 밤까지 온종일 계속된 전투를 해서 너무 길었다. 이명흠 대대장은 유격대원을 집합시켜 현 상황을 설명하고 차후 작전을 지시했다.
“북한군은 장사동을 지나가는 동해안 7번 국도를 통해 남쪽으로 군수물자를 운반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유격대가 수행해야 할 작전은 7번 국도상의 교량을 TNT로 폭파하여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적 탱크의 통행을 저지시키는 것이다.”
폭파공작을 자원한 유격대원들이 TNT를 폭발시켜 교량을 파괴하는데 성공하고, 국도상 주요 거점에 잠복하여 적 2군단의 보급 활동을 저지하는 임무를 완수하였다. 일부 대원들은 주민을 상대로 선무활동을 하는 한편 산재한 적들을 소탕하면서 치안을 확보했다. 장사동 지서를 접수하여 애국청년 8명을 석방하고 지역 행정도 장악했다.
한편 좌초된 문산호의 구조를 위해 급파된 LT-1함과 LT-636함은 9월 16일 아침 7시 현지에 도착했다. 고지점령과 장사동 일대를 평정한 유격대원들은 생존 선원 36명과 함께 구조함 조치원호에 탑승한 다음 좌초된 문산호를 그대로 두고 19일 아침 6시에 현지를 이탈하여 부산으로 철수했다.
당시 문산호에 승선하여 상륙작전을 수행한 유격대 대원은 대부분 고등학생으로 구성된 학도병이었다. “조국을 우리의 힘으로 지키자” 라는 구호 아래 경상도와 제주 지역에서 징집된 학생들은 단기간의 강도 높은 정신교육과 전술훈련을 받고 이명흠 대대장의 인솔아래 부산으로 이동했다.
군사 극비인 〈육본 작명 제174호〉 작전명령에 9월14일 LST에 탑승하여 다음날 9월15일부터 17일까지 상륙작전을 전개하며, 함포지원과 항공기 폭격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중대한 임무를 맡은 이명흠 대대장은 유격대대원을 집합시켜 출동준비를 지시했다.
부산항에서 출항하기에 앞서 기만작전의 성격상 대대를 ‘사단’으로 중대를 ‘연대’로 격상하고 계급도 이명흠 대위를 ‘소장’으로, 중대장을 ‘대령·중령’으로 임시 계급을 부여한 다음,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고위 장성이 참석하는 출정식을 공개리에 육군본부 광장에서 거행하였다.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것처럼 적에게 일부러 노출하기 위함이었다.
LST문산호에 승선한 인원은 모두 843명이었다. 황재중 선장을 비롯한 승조원 44명, 유격대대 772명, 해군 헌병 5명 그리고 육본 51통신대 통신병 12명과 전술 고문 전성호 대령(연락병 3명) 및 정략고문으로 민간인 박영선 등 3명이 승선했고 미 해군에서 해리슨 중위, 쿠퍼상사와 통역관 1명을 파견했다.
태풍 Kezia가 발생하여 거센 바람과 높은 파도로 해상 상태가 나빴으나 인천상륙작전 때문에 9월 14일 오후 4시에 출항을 강행했다. 이명흠 대대장은 대원들에게 출항 목적과 상륙장소와 시간을 알려주고, 개인 총구와 장구를 점검한 뒤 대원들은 출전 각오를 다지며 휴식에 들어갔다.
새벽 여명이 트자 이명흠 대대장의 상륙명령에 따라 황재중 선장이 접안을 시도했으나 거센 바람에 닻줄이 끊겨 배가 파도에 밀려 해안 바닥에 얹히고 말았다. 좌초된 상태에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으나 배의 밧줄을 백사장 소나무에 연결하여 상륙을 개시하자 적으로부터 집중포화가 퍼부어졌다.박격포탄이 선교를 강타하는 등 함정 자체가 운항 불가 상태임에도 대원들의 상륙은 희생이 속출하였지만 계속 진행되었다.
대대원들이 해안에 완전히 상륙하기까지에는 마치 지옥의 불울 건너듯이 두 차례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빗발치는 총탄을 피해 해안을 지나고 전방의 200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했다. 결사적인 돌진으로 60여 명의 전사자와 90여 부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유격대대는 교두보를 확보하고 적의 방어거점을 점령한 후, 곧바로 장사동 일대의 적 잔당을 소탕하는 작전을 펼쳤다. 9월 15일 하루는 새벽부터 밤까지 온종일 계속된 전투를 해서 너무 길었다. 이명흠 대대장은 유격대원을 집합시켜 현 상황을 설명하고 차후 작전을 지시했다.
“북한군은 장사동을 지나가는 동해안 7번 국도를 통해 남쪽으로 군수물자를 운반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유격대가 수행해야 할 작전은 7번 국도상의 교량을 TNT로 폭파하여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적 탱크의 통행을 저지시키는 것이다.”
폭파공작을 자원한 유격대원들이 TNT를 폭발시켜 교량을 파괴하는데 성공하고, 국도상 주요 거점에 잠복하여 적 2군단의 보급 활동을 저지하는 임무를 완수하였다. 일부 대원들은 주민을 상대로 선무활동을 하는 한편 산재한 적들을 소탕하면서 치안을 확보했다. 장사동 지서를 접수하여 애국청년 8명을 석방하고 지역 행정도 장악했다.
한편 좌초된 문산호의 구조를 위해 급파된 LT-1함과 LT-636함은 9월 16일 아침 7시 현지에 도착했다. 고지점령과 장사동 일대를 평정한 유격대원들은 생존 선원 36명과 함께 구조함 조치원호에 탑승한 다음 좌초된 문산호를 그대로 두고 19일 아침 6시에 현지를 이탈하여 부산으로 철수했다.
장사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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