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바른말이 사라진 우리 시대,
조식(曺植)의 직언(直言)을 읽는다!
서슬 푸른 칼날이 쏟아진다!
불의한 날불한당들의 시대였다. 명종(明宗) 즉위 초기ㅡ, 대궐에는 유학자들의 시신이 쌓이고, 논밭에는 백성들의 시신이 썩어갔다. 유학자 조식은 이와 같은 시대에 지식인으로서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조식은 〈을묘사직소〉를 올려 당시의 정치에 대한 직언을 서슴지 않는다. 상소의 형식은 막 제수받은 현감 직을 사직하는 사직 상소였으나 상소의 내용은 격렬했다. 임금인 명종을 어린아이라고 말하고 대비인 문정왕후를 과부라고 말한다. 곧 임금은 임금이 아니고 대비는 대비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권력을 독점한 권신(權臣)들을 향해서는 ‘야비한 승냥이 떼’라는 독설을 퍼붓는다. 왕조 시대 임금의 권위를 생각하면 이는, 조식이 상소문 위에 자신의 목을 잘라 올려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놀라운 것은 목숨을 건 언사만이 아니었다. 조식은 당대의 학문인 유학의 이념과 논리를 바탕으로 치밀한 논리를 전개했다. 당시 사회가 직면한 문제의 핵심을 곧바로 짚어내고, 또 담대하면서도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 누구도 이 〈을묘사직소〉의 말에 이렇다 할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었다.
〈을묘사직소〉는 유학자의 정신, 학문하는 자의 역할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후 이 〈을묘사직소〉는 조선의 뜻있는 유학자들에게 ‘상소’의 전범(典範)과도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이로써 유학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쫓는 일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지 알았다. 그리고 의(義)로움을 따라 살고자 노력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지식인이 사라진 시대이다. 지식인의 직언을 들을 수 없는 시대이다. 아무도 공의(公義)를 말하지 않는다. 때로는 공인이라는 이름 뒤에 숨고 때로는 전문가라는 이름 뒤로 물러난다. 말해야 할 일을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곡학아세(曲學阿世)와 견강부회(牽强附會)가 판을 친다.
지금, 조식의 〈을묘사직소〉를 읽어야 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조식(曺植)의 직언(直言)을 읽는다!
서슬 푸른 칼날이 쏟아진다!
불의한 날불한당들의 시대였다. 명종(明宗) 즉위 초기ㅡ, 대궐에는 유학자들의 시신이 쌓이고, 논밭에는 백성들의 시신이 썩어갔다. 유학자 조식은 이와 같은 시대에 지식인으로서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조식은 〈을묘사직소〉를 올려 당시의 정치에 대한 직언을 서슴지 않는다. 상소의 형식은 막 제수받은 현감 직을 사직하는 사직 상소였으나 상소의 내용은 격렬했다. 임금인 명종을 어린아이라고 말하고 대비인 문정왕후를 과부라고 말한다. 곧 임금은 임금이 아니고 대비는 대비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권력을 독점한 권신(權臣)들을 향해서는 ‘야비한 승냥이 떼’라는 독설을 퍼붓는다. 왕조 시대 임금의 권위를 생각하면 이는, 조식이 상소문 위에 자신의 목을 잘라 올려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놀라운 것은 목숨을 건 언사만이 아니었다. 조식은 당대의 학문인 유학의 이념과 논리를 바탕으로 치밀한 논리를 전개했다. 당시 사회가 직면한 문제의 핵심을 곧바로 짚어내고, 또 담대하면서도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 누구도 이 〈을묘사직소〉의 말에 이렇다 할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었다.
〈을묘사직소〉는 유학자의 정신, 학문하는 자의 역할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후 이 〈을묘사직소〉는 조선의 뜻있는 유학자들에게 ‘상소’의 전범(典範)과도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이로써 유학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쫓는 일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지 알았다. 그리고 의(義)로움을 따라 살고자 노력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지식인이 사라진 시대이다. 지식인의 직언을 들을 수 없는 시대이다. 아무도 공의(公義)를 말하지 않는다. 때로는 공인이라는 이름 뒤에 숨고 때로는 전문가라는 이름 뒤로 물러난다. 말해야 할 일을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곡학아세(曲學阿世)와 견강부회(牽强附會)가 판을 친다.
지금, 조식의 〈을묘사직소〉를 읽어야 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을묘사직소, 조선을 움직인 한 편의 상소
$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