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로완역된레오폴트폰랑케의《고대사(GeschichtedesAltertums)》는,그가말년에집필한미완의대작《세계사(Weltgeschichte)》가운데고대세계부분을발췌하여엮은책이다.원고의분책과정이복잡하여엄밀히말하면세계사구상가운데‘로마이전’고대세계(고대오리엔트와그리스)를중심으로엮었다.
독자는이책을통해서양고대사교과서에서익숙하게보아온메소포타미아와이집트,페르시아와그리스같은제국들뿐아니라,그주변의더작은국가와민족들이서로충돌하고교차하는광대한무대를만난다.랑케의시선은무엇보다국가와정치에집중되어있지만,그속에서움직이는지도자와민중의동기,욕망,이해관계를포착하려시도한다.나아가각시대의사회·경제·문화·문명적배경과더불어,인구구조나지정학적조건까지고려하여서술하고있다는점에서,19세기적저작물이란한계에도불구하고오늘날의독자에게도여전히충분히가치를부여한다.
이책을따라가다보면,독자는말그대로“거인의어깨위에올라탄”체험을하게된다.랑케라는역사학의거인이구축한방대한원전독해와사료비판의성과위에서,고대인들의권력·신앙·욕망이교차하는궤적을한눈에조망하는특권을누리게되는것이다.다만그거인의어깨에서보이는풍경은지극히19세기독일적이며유럽중심적인시야라는점은염두에두고읽어야할것이다.같은차원에서또하나포착해야할시점은기독교세계관에투철한기독교인으로서랑케의신학적시야다.
□책의내용과서술방식-장점과한계
《랑케의고대사》는고대근동과지중해세계를중심으로,인류문명이본격적으로역사무대에등장하는장면을장대한서사로엮어낸다.이집트와메소포타미아의왕조들,히타이트와페르시아,고대이스라엘,그리고고대그리스폴리스들의부상과몰락등,교과서적으로잘알려진사건과인물들이랑케특유의정치사중심의서술속에재배열된다.랑케는지나치게이론적추상으로치닫지않으면서,서로동떨어져보이는사건들을하나의큰흐름속에배치하는데탁월했다.그결과이책의각장은대중을위한고대사교양서로서충분한효용가치가있다.특히오늘날처럼분과학문과전문화된세부연구들이쪼개놓은고대세계의파편들에질린독자들이라면,특정시공간(고대근동,지중해)을대상으로하지만일관된시선으로읽혀지는랑케의통사적서술이신선하게다가올수있다.
그러나이러한장점은동시에랑케사학의구조적한계이기도하다.그의역사는기본적으로“국가들의정치사”이며,서사의주연도대부분군주·정치가·외교관같은지배계급이다.민중은이거대서사에서독자적인행위자로등장하기보다는,왕과국가의정책이미치는영향을수동적으로겪는존재로묘사되는경우가많다.이책이제공하는것은“오늘날의고고학과고대사연구가밝힌최신고대사”가아니라,19세기독일역사주의의시각에서본고대사의한버전이라는점을분명히인식할필요가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랑케가보여주는엄밀한사료독해와,사료의범위를가능한한넓히려는역사가로서의노력은오늘날의연구자와독자들에게도새겨둘의미가심장하다.
□랑케사학에서의실증주의’라는용어의의미
사학사에서랑케는흔히“근대역사학의아버지”로불린다.그가원사료에입각한사료비판(Quellenkritik)을근대역사학의기본방법론으로확립했기때문이다.그는회고록이나연대기뿐아니라,외교문서,공·사적서한,관료기록등당대에거의주목받지못하던문서들을체계적으로수집·비판하여역사서술에활용했다.랑케의유명한문구,“역사가의임무는‘그것이실제로어떠했는가(wieeseigentlichgewesen)’를보여주는것이다”라는표현은역사학을“객관적사실을연구하는과학”으로이해하는경향에촉매역할을했다.
하지만이과정에서생겨난치명적인오해가있다.한국과일본에서흔히말하는“실증사학”,“실증주의역사학”이라는표현이랑케의객관주의사관과연결되면서,이표현이콩트가말한의미의자연과학적‘실증주의(positivism)’를그대로역사에적용한것처럼이해된것이다.실제랑케자신은자연과학식법칙탐구보다는,역사적개체성(historischeIndividualität)과각시대의고유성을강조하는독일식역사주의(Historismus)에충실한역사가다.그는헤겔식의보편적역사법칙이나계몽주의의직선적진보사관에비판적이었으며,각시대와민족,국가는각각고유한가치와역사적의의를지닌개성적실체라고생각했다.
이러한관점에서,랑케의사료비판은“자연과학처럼법칙을세우고예측하기위한방법”이라기보다는각시대의고유한모습을최대한왜곡없이재구성하기위한수단이었다.그가강조한것은“과거를우리시대의관념으로재단하지말고,가능한한그시대의입장에서이해하려고노력하라”는태도에가까웠다.랑케사학에있어“실증주의”라는용어자체는랑케후학들의통념을반영하지만,랑케사학전체를‘실증주의’로환원하는것은과도한것이다.그의사학은자연과학적이라기보다역사주의적·신학적색채를강하게지닌다.
□랑케객관주의에대한대표적비판-콜링우드의주관주의
EH카는“역사란무엇인가”라는자신의저술에서랑케객관주의의직접적인학문적비판자로서콜링우드를내세우고있다.
랑케가“역사가는자신의주관을최대한배제하고,사료속에담긴사실을있는그대로드러내야한다”고강조했다면,콜링우드는“역사적사실은언제나어떤관점과질문을전제로선택된것이며,역사가의상상력과해석없이는의미를얻을수없다”는점을강조한다.양자는서로를비판하지만,어떻게역사적진실에다가갈것이냐는문제의식은같다고할수있다.단지“절대적이고완전한객관성”이라는이상을어떻게이해하고,그한계를어떻게인식할것이냐는관점에서차이를보일뿐이다.
따라서두입장을정리해보자면,랑케가“역사가라면현실적으로도달가능여부를떠나,최대한객관적사실의정확한재구성을지향해야한다”는입장이라면,콜링우드는“인간의인지능력과언어,사료자체의한계를충분히고려하지않은순진한객관주의는존재할수없으며,역사란본질적으로해석과재구성의학문이다.”라는입장에서있다고할수있다.양자는방법론상으로대립하고있지만,그어느쪽도“역사적진실추구자체를포기하는것은아니다.이점을분명히할때,19세기적객관주의와20세기역사철학의비판간의학문적긴장과생산성이보다정확하게이해될수있다.
□19세기시대적한계와그의미-신앙과학문의혼종
이책은전형적인19세기후반독일역사학의산물이다.그이후20·21세기에이르기까지축적된방대한고고학발굴,동방학·비문학연구,인류학과사회경제사연구의성과는당연히반영되어있지않다.오늘날에는상식에가까운많은사실들이랑케당시에는미지의영역이었거나,제한된자료속에서추정에머물러야했던사안들이었다.
랑케는평생열렬한루터파개신교신자였고,그의역사관에는신의섭리와계시,각시대에부여된신적소명에대한신념이깊이스며있다.그는“모든시대는신에게직접이어지며,각시대는그것자체로서신앞에동등한가치를가진다”고말한바있다.따라서역사속에서드러나는인간의행위와국가의흥망성쇠를통해신의의지가어떻게구현되는지를읽어내려했다.이점에서랑케는신학적·철학적전제위에서있는역사학자였다.그의역사연구작업은중세의신학적사유가완전히가시지않은시대적배경하에서,합리적이성과문헌학적방법을통해신과역사적진실에다가가려는시도였다고할수있다.
신학과역사학이아직완전히분리되지않았던시기에,랑케는사료비판과문헌학적방법을통해맹목적인신학적해석을견제하고자했다.동시에그는역사학을완전히세속화·탈종교화하지않고,역사를신적섭리와연결짓는신학적시야를끝까지유지했다.이러한긴장속에서탄생한것이바로“역사주의(Historismus)”라는19세기독일적사유의독특한형식이며,이는이후서구인문사회과학전반에장기적인영향을미쳤다.랑케식역사주의는신학적전제와문헌학적방법이긴장속에서공존하는혼종적형식이었다.이러한맥락을이해한다면,《랑케의고대사》는단지“구식고대사교양서”가아니라,근대역사학이형성되던현장의지적공기와긴장을보여주는사료로도읽힐수있다.
□《랑케의고대사》가21세기한국독자에게갖는의의-유사역사학과의대비
유사역사서로유명한《환단고기》는오늘날다수의전문역사학자들에의해위작이거나,최소한신뢰할수없는사료로평가받고있다.그이유는텍스트내부의언어·문체·어휘·사상적내용이실제전통사료와맞지않는점,다른사료와의교차검증이되지않는점,근대적민족주의담론이투영된흔적등복합적이다.반면랑케의저작은,비록19세기유럽중심주의와신학적전제를품고있지만,사료에대한엄격한외적·내적비판을거친결과물이라는점에서근본적으로학문적품격이다르다.이차이는단지“내용의옳고그름”을넘어,역사에접근하는태도와방법에서극명하게드러난다.유사역사학은이미믿고싶은결론을전제한뒤,그에맞는“사료비슷한것”을끌어다맞추는경향이강하다.랑케사학의전통은,먼저사료자체를의심하고,그신뢰성과맥락을검증한뒤,그결과에맞추어서술을구성하려한다.
오늘날한국사회에서여전히중세식문자주의신앙과민족주의적신화가결합한역사인식이강하게작동하고있는현실을생각하면,랑케의《고대사》는단지고대세계에대한지식을제공한다는차원을넘어,“역사텍스트를어떻게읽어야하는가”에대한하나의교본이될수있다.특히성서를포함한종교적텍스트와민족신화를둘러싼논쟁에서,사료비판과역사적맥락읽기가얼마나중요한지를보여주는좋은사례가될수있다.
그런점에서,이책은단지역사학관련자나역사교양에관심많은일반독자들보다역사와신앙의관계를고민하는종교인과신앙인들에게더적극적으로추천할만하다.19세기루터파역사가가고대세계와신의섭리를어떻게함께보려했는지를살펴보는것은,오늘날신앙과학문의경계를고민하는종교인과신앙인독자들에게적지않은통찰을줄것이다.
□어떻게읽을것인가
이상의설명내용들을감안할때,《랑케의고대사》의현재적가치는다음과같이요약정리될수있다.
첫째,근대역사학의기원을보여주는고전이라는점이다.사료비판과역사주의가어떻게구체적인서술속에서구현되는지를직접확인할수있다.
둘째,19세기독일·유럽중심적시각이고대세계를어떻게재구성했는지보여주는사상사적자료라는점이다.이책은고대사내용자체만큼이나,역사에관한19세기유럽인의자기이해를비춰주는거울이다.
세째,유사역사학과신앙적문자주의가득세하는오늘의한국사회에서,사료와텍스트를대하는성실한태도가무엇인지지문하게하는기준점이될수있다는점이다.특히,가스라이팅비즈니스라는조롱을받는개신교신자라면자신이믿는종교의본령과신도로서의올바른판단력과분별력,그리고신앙적자세를점검하는데적지않은도움을받을수있을것이다.
물론앞서언급했듯이이책은최신의고대사연구성과를대체할수없으며,그내용과해석은오늘의눈으로보았을때여러면에서수정과비판의대상이된다.그러나바로그한계와장점이뒤엉킨지점에서,독자로서“역사란무엇이며,어떻게써야하는가”라는근본질문을던지게하는고전으로서의저력이드러나게된다.
결론적으로이책을읽을때에,한편으로는랑케의웅장한서사와치밀한사료독해를즐기되,다른한편으로는19세기라는시공간,루터파라는신앙적배경,독일역사주의라는지적맥락을항상의식하면서읽는것이바람직하다.이러한이해를바탕으로읽어나갈때,《랑케의고대사》는단순히오래된19세기텍스트라는차원을넘어,오늘날의역사인식과학문,그리고신앙과이성의관계를다시생각하게만드는살아있는텍스트로다가올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