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머무는 느낌 - 간드레 시 3

곁에 머무는 느낌 - 간드레 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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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시집을 다 읽고도 고개를 들 수 없다. 작은 틈이라도 내어달라, 우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들숨과 날숨 사이가 너무 좁다. 여느 시와 같이 편안하게 시를 읽을 수 없다.

극적인 순간을 포착해 묘사와 이미지로 현재화(現在化)한 이윤학 시인의 열한 번째 시집 『곁에 머무는 느낌』이 간드레 시 03번으로 출간되었다. 풍경이 말하는 시, 풍경의 연구가, 풍경의 투시자, 숙명적인 상실의 독을 말갛게 걸러낸 치유의 시집. (박형준 시인) 그의 시는 카메라 렌즈를 갖다 댄다. 조리개를 돌린다. 낱낱의 잠자고 있던 사물이 언어에 의해 되살아난다. 단어 하나, 한 문장도 함부로 쓰이지 않고, 그냥 스쳐 가는 법이 없다. 마치 시인의 치밀한 계산에 의해 쓰인 듯한 시는 정체불명의 뜬금없는 어휘나 문장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언어와의 고군분투는 오직 언어와 결탁하고, 언어와의 대면 속에서 시어의 조탁이 이루어진다. 그러니 그의 시를 읽기 위해서는 집중하고, 문장의 결을 따라가야 한다. 묘사의 힘이 이런 것인가. 시인은 굳이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시인이 눈으로 본 것만 치밀하게 묘사할 뿐이다. 묘사로서 이미지를 그려낸다. 그럴 때 시는 그림이 되고, 사진이 되고, 풍경이 되고, 한 사람의 처절한 삶의 장면으로 프린팅된다. 거기 시가 존재하고, 시가 완성되기까지 그는 시인으로서 존재한다.

“본다는 것은 거리를 전제로 한다……. 보고자 하는 그것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감촉으로 당신을 건드리는 듯할 때, 또한 보는 방식 그 자체가 일종의 감각적인 접촉일 때, 그리고 보는 것이 거리를 둔 접촉일 때, 그때는 어떻게 되는가……. 거리를 둔 접촉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이미지며, 매혹은 이미지에 대한 정열이다. 우리를 매혹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앗아가 버린다...... 세계의 내면으로 은둔해 우리를 그곳으로 끌어당기고...... 이 공간은 말하자면 절대적인 공간인데...... 그것은 이미지의 배후에 있는 무제한적인 깊이이다...... 물체들이 의미에서 멀어져 이미지 속으로 무너져내릴 때, 물체들은 바로 이 깊이 속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 매혹의 장소에서 우리가 보는 것, 그것은 시선을 붙들고 그 시선을 끊임없는 것으로 만든다.” -모리스 블랑쇼

이윤학 시인의 시가 위의 문장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의미를 나타내지 않는 이미지 글쓰기. 이미지로서 의미를 숨겨두는 방식, 그리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이미지 속으로 걸어 들어가 의미가 되는 방식. 그러므로 그의 시는 자세히 관찰하듯 집중해서 읽어야 이미지의 놀라운 힘을 느낄 수 있다.
저자

이윤학

저자:이윤학
시인.1990년<<한국일보>>신춘문예에당선되어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먼지의집』『붉은열매를가진적이있다』『나를위해울어주는버드나무』『아픈곳에자꾸손이간다』『꽃막대기와꽃뱀과소녀와』『그림자를마신다』『너는어디에도없고언제나있다』『나를울렸다』『짙은백야』『나보다더오래내게다가온사람』『곁에머무는느낌』,산문집『시를써봐도모자란당신』,장편동화『왕따』『샘괴롭히기프로젝트』『나엄마딸맞아?』등을썼다.김동명문학상지훈문학상불교문예작품상동국문학상김수영문학상을수상했다.
수상:2022년김동명문학상,2017년지훈문학상,2014년불교문예작품상,2008년동국문학상,2003년김수영문학상,1997년대산창작기금,1990년한국일보신춘문예
최근작:<곁에머무는느낌>,<시를써봐도모자란당신>,<나를위해울어주는버드나무>,<나보다더오래내게다가온사람>…등.

목차

시인의말

1부

루시제(祭)/거기앉은섬/철둑/집근처수목장/내륙등대/웃는다/메밀들길/
소한(小寒)/장엄한상고대/흑장미꽃꽂이/꽃기린/엄동(嚴冬)/소국(小菊)/아직,
파란,밤송이/가을저녁빛/꽃씨받는사람/가는잎오이풀,꽃피다

2부

초록잉크를기억해요/갓길/원형돔하우스/퍼걸러/대숲/파리는왜촛농에
빠지는가/혼인관계증명서/뻐꾸기날다/장박(長泊)/종점낚시민박/심방(尋訪)/
고개를끄덕거린다/째깐한코스모스들,피어난새시/목을조이는잠이찾아와/한낮의태양은/원형탁자깔판유리/웃는다2/졸망제비꽃

3부

서부부루쌈/서부뱃머리슈퍼/서부미정/서부오디/서부모과/서부사
철나무열매/서부댓잎에폭설/서부댓잎에폭설2/서부풀새밭/서부붉은
벽돌집/서부폐다리/서부정금/서부살구꽃/서부옴(싹)이난다/서부밑
불/서부두더지/서부사슴농원/서부돼지감자꽃

4부

수선화/바다제비/부엉이/붉은구름/캠핑/맨드라미/스토커/스트라이크존/첫장미/칠면조목울대/요새/타구(唾具)/사금(砂金)채취동호인/솔숲이보이는단독/너구리/그리마/방음/진공상태/배추뿌리/붉은매화

에필로그l호수의한점섬에서

출판사 서평

“우리는더는연인이아니니
연인의눈빛을상상하는밤이있지”

부재(不在)라는존재(存在)의흔적을마주할때
함께가고싶던돌아앉은섬앞으로뱃머리를돌린다.

서로다른시공간을연결하는묘사의힘.그초자연적신비를보존한시가여기있다.『나보다더오래내게다가온사람』(간드레,2021)이후3년여만에펴내는이윤학시인의열한번째시집『곁에머무는느낌』이간드레출판사시집시리즈‘간드레시03’번으로출간되었다.자연과일상의이미지를초월적인언어로옮겨내는,이제는어떤경지에이르렀다고밖에설명할수없는묘사의시인이윤학은이번시집을통해죽음의끝에서삶을되살리는경이로운감동을선사한다.4부로나누어73편의시를실은이번시집에서시인은상실이꼭유실인것만은아니라고말한다.우리는그저서로다른차원에있을뿐이며그리움이란어떤순간,어떤공간에구애받지않고언젠가함께목격했던‘거기앉은섬’을확인하러노저어가는일.그리하여당신과나는영원한이별이아닌영원한동경속에머무른다.

1부.상실과그리움

블라인드를걷고슬라이딩도어를접어열었지새벽어스름의정원에엎드린거위한쌍잔설의섬이보였지반아름의뽕나무밑자갈이드러난맨땅에엎드려서로의날개에머리를맞교환한엊저녁의일을알아차리곤하였지(중략)너는나를온전히나로지켜내는의지의발로였지내가어쩌지못할아픈신경세포였지언제나과분한현재사랑이었지둘이가고싶어안달한미래의여름수국핀언덕의전망좋은전원주택지였지접이식카약을주문해야겠지돌아앉은섬앞으로접이식카약의뱃머리를몰아야겠지두손으로잔물결을몰아내는기도를드려야겠지밤마다거기앉은섬을보고와눈을붙여야겠지땅굴을파고들어앉은당신문을열고나와눈감고입다물고바위에앉을때까지,초혼(招魂)의피아노연주이어갈수있겠지-「거기앉은섬」

장편소설의막장을쓰는당신/한쪽눈을상상하는밤/비그친사지(寺址)의별빛이있지//여분의눈이있다고/상상해보는밤이있지//긴머리를말아올려/볼펜비녀꽂은/당신의뒷모습이있지//초배지(初褙紙)발린벽에걸린사진액자/유리안에들어간빛을태운원이번지지/번갈아떠오르는갈아끼운사진/사라진커서가뒤로밀리는밤이있지/턱관절이오도독뼈를씹는밤이있지/사지(寺址)의별빛과마주친밤이있지//우리는더는연인이아니니/연인의눈빛을상상하는밤이있지-「내륙등대」

우리는모두생의한가운데외로이떠있는섬을품고있다.그섬은“…나를온전히나로지켜내는의지의발로”인‘너’가존재하는곳이다.언제든돌아갈곳이있다는삶의위로,노스탤지어이자그리움의실체가머물러있는너라는섬은나를나로살아가게하는물결이된다.
만약어둠이깊어져그섬을찾지못하고우리가방황할때“비그친사지(寺址)의별빛”이내려앉은내륙등대가추억을잃은모든존재를기억으로회귀하는빛으로안내해줄것이다.

2부.온기어린시선

꽃사과가익어가는935번지방도/딸내미가짰지싶은벨벳모자를쓴할메/전동스쿠터뒷자리에영감을태우고간다/중절모를쓴영감할메어깨께인견블라우스/살짝쥐고간다약타러도립병원에간다//커브길을돌아나온덤프트럭/쌍라이트를켜고경적을울리며/지나친다잽싸게할메허리를감고/찰싹등에붙은영감꼼짝하지않는다/벨벳모자날아가굴러가다멈춘다//(중략)//시내버스비상등켜고멈춘다/선글라스를끼고내린버스기사/할메벨벳모자를주워씌워준다//공터에전동스쿠터세운버스기사/할메와영감을부축해태운버스기사/고마걱정붙들어매고있으소/이따요기내려줄꼬마/룸미러로뒷자리바라본다-「혼인관계증명서」

이번시집에서눈에띄는점은아버지와어머니,남편과아내의모습등사랑의대상을위해타자화되는인물에대한연민이다.둘중하나의부재에서오는결핍은두사람이함께있을때의온전함을극대화시키며그리움의간극을보여준다.이윤학은때로는능청스럽게,때로는집요하고진득하게,그리움의옹이가된간극을예리한시의언어로메꾸어준다.「혼인관계증명서」에서전동스쿠터에올라탄노부부의안정감과틈없이밀착된관계를시인은따듯한시선과유머로그리고있다.‘룸미러’로바라보는노부부의모습은삶의뒤란으로밀려난힘없는현실을보여주는것이아니라,하나의꽃사과처럼서로의향기가되어준세월의깊이를담아낸다.

염색한지한참지난당신의반백머리원형탁자깔판유리에볼을대고눈을감았다얼음이언저수지약방가는지름길얼음장속에서머리를치받았다서둘러출구를휘저어찾는손길무뎌졌다무녀리가된마음나가죽지못한마음원형탁자깔판유리에달라붙은당신의웃는모습도착할때까지깔딱숨을쉬었다-「원형탁자유리깔판」

원형깔판유리가얼음장이되어그리움이투과될때그반대편에맺힌상은무녀리가된사랑의대상이었다.죽음의순간까지맞대보고픈차가운뺨을그리워하는모습은사랑의대상을잃어버린자에겐현실마저도얼음의도가니속임을깨닫게한다.서로닿을수없는두대상을시인은원형탁자깔판유리를매개로표현하며,죽음의시공간을초월하여데칼코마니와같은만남을성사시킨다.우리는마지막순간에서야삶을기억하듯이시인은처절한몸부림과같은사랑의열병을삶이끝난데에서수면으로실어올린다.

3부.서부에서의관찰,과거와현재와미래가한몸인풍경

낮전밭일을마치고하우스/적부루를뜯어샘에앉아씻은부부/쌈을싸밥한공기뚝딱해치웠다//밥상을물린부부대청마루에누워/두런두런이야기하다곯아떨어졌다/부룻잎따이고입가에침이고였다//적부루물기를털어내듯/마당에빗방울떨어졌다//처마및풍경(風磬)/나일론끈에묶였다/제자리를맴돌았다-「서부-부루쌈」

3부는서부시편으로채워졌다.시인의고향인충남홍성의서부와현재생활공간인안동의오지서부,얼마전까지살았던가평의산골마을서대길이시공을초월해혼재하는장소이다.3부의첫시는시인의부모님이젊었을적한순간을찍어뒀다수십년이지난뒤인화해낸작품이다.힘을내려놓고쓰는한줄의묘사에꽉들어찬풍경은읽을수록감칠맛이나고정감이있어허기진추억에침이고이도록한다.

늙수그레한남자가젖병을흔들어물렸다/우유를빠는아이를지켜보았다위아래로/고개를흔들어주었다/잠이든아이를안고/마른걸레를집어들었다평상에떨어진오디들/구석에모아두었다강보(襁褓)에싼아이/레이스달린모기장밥상보를펴덮었다/오남매젖을물려키운마누라떠난하늘/오디가까맣게익은하늘입을벌려마중/나갔다뒤집어들기름두른가마솥뚜껑/솔걸에불붙여철질하는소리간장/불고기굽는냄새마누라산소까지/외길을걸어갔다-「서부-오디」

슬픔의여울목으로남는풍경을옮긴시편들은가슴먹먹한통증을전이한다.「서부-오디」에서사내는젖병을흔들어손자아이의입에물려주고,오남매에게젖을물려키운아내를떠올린다.아내를먼저떠나보내고홀로아이를돌보며떠난아내를그리워하는남자의이야기이다.아내의기일에생전의아내가좋아한간장불고기를굽는다.이별은모든오감을되살아나게하기에그녀를기억하는호흡마저도오디처럼새까맣게가슴에멍울이되어맺힌다.

4부.시인의특권이자과업응시.

숨넘어가는할아버지/손목시계를끌렀다/아버지사타구니에/냅다집어던졌다-「부엉이」

당신에게소중했을손목시계가혹시라도유품이될까서둘러아버지의사타구니에던진다는이시는짧지만강렬한울림을준다.예로부터부엉이는부를상징하는새였는데우리에게주어진시간이야말로재물보다더값진의미임을한시구로압축하여보여주는탁월한솜씨에혀를내두르게된다.사랑하는3대독자아들에게손목시계를던져주는아버지의마지막한호흡,그순간에도지나갔을찰나의시간은,우리에게남은사랑의순간이이토록간절하고도터무니없이짧다는것을암시해준다.

바위동굴에신접살림을차리고새끼셋을낳아키웠다동굴언저리밀사초군락바람이자랐다바위절벽머리끄덩이를잡아당겼다잃어버린새끼들에게로먼저간아내시신을뗀마에안치한남자노를저었다지그재그로나는바다제비먹이를채가는바다제비허공을제치며날았다바위절벽틈밀사초군락땅굴에알을낳고먼바다와둥지를오갔다풀꽃을꺾어아내시신을덮은남자가족사진을올렸다평생을어부로산남자노를저었다-「바다제비」

4부는이전의1부로돌아가시인이보여주고자한이미지에마저힘을싣는다.시집의전반에자주등장하는아버지의모습은자기반성적이며고독하고연민을자아낸다.현재(現在)부재중인시인의아버지를향한그리움을따라읽으면그리움은과거가아니며언제나현재화될수밖에없음을알게된다.그어떤누추한인간일지라도우리가알지못한생의뜨거움이스며있을거라는사실,그진실을이윤학은관찰자이자증인이되어담담하게드러내고있다.

'나에게있어사진이란머리와눈과그리고마음을하나의축에놓는것이다.그것은삶의방식이다.'사진가앙리카르티에브레송의말처럼이윤학은그의머리와눈과마음을하나의축에놓아시를완성한다.그리하여시인의렌즈를통해세상으로나온시에선불필요한피사체란존재하지않는다.짜임새있고빈틈없이정갈하며감동이있다.이윤학의시집『곁에머무는느낌』은사랑을잃어버린사람들에게,그리움을간직한사람들에게기댈수있는따스한곁이자흔들리지않는축이되어줄것이다.
-성민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