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p.16부석사무량수전
소백산기슭부석사의한낮,스님도,마을사람도인기척이끊어진마당에는오색낙엽이그림처럼깔려초겨울안개비에촉촉히젖고있다.무량수전,안양문,조사당,응향각들이마치그리움에지친듯해쓱한얼굴로나를반기고,호젓하고도스산스러운희한한아름다움은말로표현하기가어렵다.나는무량수전배흘림기둥에기대서서사무치는고마움으로이아름다움의뜻을몇번이고자문자답했다.
p.49청자상감운학문매병
그처럼신기한천연색사진으로도잘구워진고려청자의맑고조용한푸른빛의아름다움을재현할수는없다.제아무리희한한물감이있다해도고요와사색에사무친고려청자의아득하고도깊은빛깔을그처럼물들일수는없다.만약에영험스러운마술사가있어서그리고뛰어난화학자가있어서고려청자의그희한한푸른빛의비밀에부딪쳐보면,그것은아마도고려사람들의담담한심상心像의아름다운벽이될지도모르는일이다.
p.65청자상감모란문항
갓맑은비취옥색의티없는바탕에순백한칠흑색만으로이루어진모란꽃한송이의솜씨야말로고려도공들이지닌안목의높이와조형역량의저력을발휘해준것이라고도할수있고또그러한배색의효과를그들은생활속에서덤덤하게피부만으로도가누어낼수있는비상한천성의소유자들이아니겠느냐고생각을해보게도된다.
p.78백자상감초문편병
바라보고있으면허허하고웃음이나올지경이된다.이병을만든사람이나이것을즐겨서쓰던이조시대사람들이모두이병을바라보고느끼는지금의내심정과같은흥건한기분이었을지도모른다.말하자면세상사에대한한국사람들의숨김없는마음의자세가이병에새겨진성근그림처럼야무지지도못하고모질지도못했던것이아닌가싶어진다.
p.135백자달항아리
한국의흰빛깔과공예미술에표현된둥근[圓]맛은한국적인조형미의특이한체질의하나이다.따라서한국의폭넓은흰빛의세계와형언하기힘든부정형不整形의원圓이그려주는무심스러운아름다움을모르고서한국미의본바탕을체득했다고는말할수없을것이다.더구나이조시대백자항아리들에표현된원의어진맛은그흰바탕색과아울러너무나욕심이없고너무나순정적이어서마치인간이지닌가식없는어진마음의본바탕을보는듯한느낌이다.
p.162겸재의조옹도
산곡山谷의여름물을그려서물보다도더시원한맛을낼줄아는화가가겸재다.말하자면겸재는한국산하가지니는습기와여름물의속성을너무나잘알고너무나좋아했기때문이다.낭랑하게소리치며흐르는성급한여울물이있는가하면도란도란흐르는작은계류가있고,또도도히흐르는대하의용용수가있어서한국의여름물경치의멋은아마도겸재가독차지했나싶을때가있다.
p.181단원의봄까치
단원의그림을살펴보면새한마리나뭇가지하나에이르기까지한국풍토의독자적인멋과아름다움이너무나흥겹게표현되어있어서시속화가時俗畵家들의그림과는너무나대조적이라는점에다시금놀라움을금치못할때가많다.말하자면풍토감각이란참으로묘한것이어서같은복숭아나뭇가지하나만도나라에따라각기그자라는자세와마디가다르고,또환경이달라서미술작품에나타난자연풍정도제각기다르기마련이다.
p.213혜원의연당의여인
시간이흐르면서나는달라졌고단단해졌다.새로운근육이생겼고,새로운방식으로세상을마주했다.창의력과유연함,용기는더깊게쌓여갔다.덕분에사랑의방식도달라졌다.내가그남자에게어울릴까걱정하지않고,나에게어울리는남자를찾았다.내마음은창공을날았다.
p.273나전칠기송죽무늬함
수다스러운듯싶어도단순하고화려한듯보여도소박한동심적童心的인즐거움을표현한점이한국민속공예의장식무늬가지닌하나의장점이라고할수있다.별야심이없이다루어진무늬들,특히이조시대나전칠기의좋은도안들을보고있으면늣늣하고도희떱고희떠우면서도익살스러움이한가닥의즐거움을자아내어준다.
p.298신라의막새기와
항아리의오른쪽에는덩실덩실춤추는토끼한마리,왼쪽에는지지리도못생긴두꺼비한마리가앞발을들고토끼와마주서있다.두꺼비등에돋은우툴두툴한무늬모양이라든가넉살스러운그얼굴맵시는간사하고경쾌해보이는토끼의맵시와는매우대조적이지만이러한대조에서오히려미소를자아내는해학의흥겨움이솟아나는듯도싶고옛설화를이렇듯짜임새있게윤색해낸신라와공瓦工의솜씨가보통이아님을알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