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ㆍ국가와 나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의 회고록)

민족ㆍ국가와 나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의 회고록)

$20.00
Description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의 회고록
장호권 선생이 자신이 살아온 칠십 평생의 삶을 덤덤하게 때론 격정 있게 토로한 회고록을 펴냈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파란만장’했다. 파도의 물결치는 것이 만장(萬丈)의 길이나 될 정도로 많은 시련과 풍파를 겪었다. 그의 아버지 장준하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제1세대 민주화운동가였다. 해방 후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기에 통일을 염원하였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고자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세 번 구속되었고 37번 연행되었다. 결국 장준하 선생은 1975년 8월 17일, 포천의 약사봉 계곡에서 등산 중 의문의 주검으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던 진정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살아온 장호권 선생의 삶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장호권 선생은 자신의 회고록 제1부에서 ‘아버지와 나; 나의 아버지 장준하’라는 제목으로 어머니 혹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들었거나 자신이 경험했던 아버지의 삶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장호권 선생이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은 칠십여 년 동안에 26년 정도이지만, 군 제대 후 21살부터 5년 동안은 비서처럼 아버지를 측근에서 모셨다. 장준하 선생의 전기문이 여러 권 나왔지만, 아들로서 아버지의 삶을 처음으로 들여다본 것이다. 그는 회고록에서 신촌 집에서 살 때가 짧지만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제2부는 ‘나의 아버지; 홀로서기와 의문사 진상규명활동’이란 제목으로 자신의 삶을 회고하였다. 1979년 8월 아버지가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무사를 당한 뒤부터 2008년 4월까지 29여 년의 삶을 회고했다. 회고록 전체에서 가장 긴 시간이지만, 내용은 가장 짧다. 제목에서 ‘홀로서기’라고 되어 있지만, 홀로서기를 위한 준비 기간이 아니었나 한다. 아버지가 의문사를 당한 뒤로도 여전히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독재정권이 계속되었기에 그는 이 땅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어 망명 아닌 망명의 길을 떠나 해외에서 지내야만 했다. 25년 동안의 해외 생활을 접고 국내에 들어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 폐간된 ≪사상계≫를 이어가고자 했으나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매듭을 풀고자 아버지가 경계했던 정치에 발을 들여놓아 총선에 도전했지만 이마저도 이루질 못했다.
제3부는 ‘민족·국가와 나; 일주명창’에서 비치듯 ‘심지 하나가 창을 밝힌다’라는 글귀처럼 불의한 정권에 맞서 ‘하나의 심지’, ‘하나의 불꽃’처럼 사셨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간 자신의 삶을 되돌아봤다. 아버지 주검의 진실을 밝히고자 37년 만에 관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던 불효자로서 한겨울에 맨발로 아버지께 술을 올렸다. 아버지를 다시 묻고는 시묘살이도 했다. 이후 장호권 선생은 그 어느 때보다 진실규명을 위해 애썼고, 인권·평화·통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진정한 ‘홀로서기’를 했다. 그 길이 아버지의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장호권 선생은 70을 넘기고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아름드리 그림자에서 벗어나 나만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회고록』이 마지막이 아니라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는 새로운 출발이 되길 희망한다.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저자

장호권

장준하선생의아들이다.아버지가걸었던민족운동과민주주의국가를만들고자했던신념을새기며살아왔다.

□장호권이걸어온길
1949.5.14................출생
1965.3~1967.2........이화여자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졸업
1968.6~1971.9........해군복무
1971.9....................군제대후아버지수행비서역할
1973.2....................제9대국회의원선거원으로활동
1973.12..................‘헌법개정백만인서명운동’전개
1975.5....................결혼
1975.8.17...............아버지,의문사를당함
1976.3.1..................장녀장원경출생
1979.......................말레이시라로도피성외유떠남
1981.......................싱가포르로두번째외유떠남
1995.5....................장준하선생20주기추모사업회(대표김준엽)결성
1996.8....................고장준하선생추도식준비위원회결성
1998.11..................장준하선생기념사업회출범(종로기독교연합회관)
1999.8....................제1회‘아,장준하구국대장정’행사개최
2004.12..................영구귀국
2005.10...................≪사상계≫자매지성격의인터넷경제신문〈프라임경제〉창간
2007.1.....................‘사상계복간추진위원회발기인대회’개최
2009.6.....................≪사상계≫복간준비호발간
2007.11....................고구려문화연구회이사장취임
2008.4......................제18대총선에출마,낙선
2012.8.1...................장준하공원조성과첫번째개묘
2012.9......................장준하선생암살의혹규명100만인서명운동전개
2012.9......................‘장준하선생암살의혹규명국민대책위원회’발족
2012.9.....................시대교체국민연대자문위원
2010.12....................‘장준하사건등진실규명과정의실현을위한과거사청산특별법’발의
2012.10....................'장준하암살의혹규명국민대책委'출범
2012.12....................두번째개묘.시묘살이
2013.1.....................긴급조치1호위반재심요청
2017.4.....................제19대대통령출마선언
2018.7.....................어머니별세(92세)
2019.1.....................한신대학교초빙교수임명
2019.4.....................장준하기념사업회회장취임
2019.7.....................광복회서울지부장임명
2019.11....................‘장준하시비이전위원회’(위원장이경형)결성

목차

제1부아버지와나;나의아버지장준하
아버지와어머니가만나다.
6·25전쟁발발이후부산으로피난가다.
≪사상계≫를창간한다.
서울에올라와생활기반을닦다.
≪사상계≫,민족정론지로거듭나다.
4·19혁명이후국토건설본부에참여하다.
5·16군사정변이후부정축재자로몰리다.
‘막사이사이상’을수상하다.
박정희쿠데타세력의민정이양을반대하다.
한일회담반대투쟁에나서다.
정치인의길로나가사카린밀수사건을파헤치다.
야당‘4자회담’을이끌다.
옥중출마하여7대국회의원에당선되다.
아버지가나를해군에입대시키다.
베트남에서삶과죽음의경계를넘나들다.
≪사상계≫,폐간당하다.
『돌베개』를출판하다.
제9대국회의원선거에서낙마하다.
‘헌법개정백만인서명운동’을전개하다.
감옥에서나와병원에서치료를받다.
퇴원후야당통합에진력하다.
나의결혼식장이시국강연회장이되다.
아버지와어머니가혼배성사를올리다.
약사봉에서갑작스러운의문사를당하다.
아버지의시신을안방안치하고검안하다.
검찰측,실족사로처리하다
명동성당에서아버지의영결식을치르다.

제2부나와아버지;홀로서기와의문사진상규명활동
의문사현장에서진상규명에나서고추모비를세우다.
사건진실을밝히려다테러를당하다.
가족생계를위해장사를시작하다.
말레이시아로도피성외유를떠나다.
싱가포르로떠나서도아버지를기리다.
‘장준하새긴돌’을세우다.
싱가포르에서경제적인기반을닦다.
귀국후낯선고국생활을시작하다.
귀국전진상규명에한계를느끼다.
귀국후진상규명에직접나서다.
〈사상계〉를복간하다.
18대총선에나가다.

제3부민족·국가와나;일주명창(一炷明窓)
장준하공원을조성하면서37년만에아버지를유골로만나다.
전면적재조사와진상규명에나서다.
진상규명을위한국민들의관심과동참을호소하다.
장준하선생암살의혹규명국민대책위원회발족,진상규명하다,
‘겨레장’으로영원한안식처에안장하다.
긴급조치위반,무죄선고를받고국가배상을청구하다.
평화운동가,통일운동가로나서다.
‘장준하선생등과거사건진실규명과정의를위한특별법’제정을추진하다.
친일파청산에앞장서다.
C-47비행기,여의도공원에전시하다.
제19대대통령선거에출마하다.
어머니가세상을떠나다.
‘장준하100년위원회’출범,다양한활동을펼치다.
한신대학교초빙교수로활동하다.
‘장준하기념사업회’를이끌다.
‘장준하평화관’건립을추진하다.
광복회서울지부장으로활동하다.
광복회서울시지부의지회장들과함께6천리대장정에나서다.
큰딸원경이를먼저보내다.

글을마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