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 최석정의 정치사상과 학문세계

명곡 최석정의 정치사상과 학문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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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정치가, 행정관료, 학자 최석정(崔錫鼎)의 사상과 학문세계
8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한 최석정은 조선 숙종 대 혼돈의 정국을 이끈 경세가이자, 큰 학자였다. 2013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 대상자로 최석정을 선정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수학자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진 정국이 혼란을 거듭할 때, 온건파 소론의 영수로 활약하던 정치가의 모습이 다소 퇴색한 듯하지만, 그가 이런 영예를 차지한 것은 주자성리학적 학문 경향성을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양명학을 비롯하여 음운학과 수학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개방성과 융합성까지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최석정의 정치활동이나 사상은 물론, 폭넓은 학문적 세계를 객관적으로 탐구하려는 연구자들이 많고, 그 성과물 또한 적지 않게 쌓여가는 상황에서 여러 학술지에 실린 연구논문들을 한 권의 학술연구총서로 묶었다.

제1편은 역사학적 시각에서 다룬 논문들을 정치사상편으로 묶고, 제2편은 최석정의 다양한 학문적 관심에서 저술된 것들을 오늘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논문들로 채웠으니, 음운학과 철학 수학 등 당대 선비들의 사유체계를 뛰어넘는 최석정의 폭넓은 학문세계까지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격화되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펼친 노련한 정치가로서의 식견, 그리고 행정 관료로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뜻을 펼치고자 했던 학자적 관료로서의 참모습, 나아가 동양 철학과 서양 수학 원리를 융복합했던 선각자로서 천재적 삶을 살다간 최석정의 사상과 학문 세계를 이 책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되기를 바란다.
저자

신병주외

신병주 건국대학교사학과교수

강신엽전동국대학교강사

이재철 전경북대학교강사

김용흠 연세대학교국학연구원연구교수

박경남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교수

김영주 성균관대학교한문교육과교수

심소희 이화여자대학교중어중문학과교수

조희영 조선대학교인문학연구원교수

이상구 성균관대학교수학과교수

이재화 성균관대학교연구원

목차

간행사

서문

제1편.명곡최석정의정치사상
1崔錫鼎의生涯와思想
2明谷崔錫鼎의現實認識과政局運營論
3숙종대소론변통론의계통과탕평론
-明谷崔錫鼎을중심으로
417세기중·후반소론학자의사상
-윤증·최석정을중심으로
5崔鳴吉·崔錫鼎의庶?許通상소와지식인의역할

제2편.명곡최석정의학문세계
1少論系自得的학문논리의연원과전개
-崔錫鼎家를중심으로
2최석정의《황극경세·성음창화도》에대한인식
3明谷崔錫鼎,易數로邵康節과소통후남긴메시지탐색
-『經世訓民正音』坤冊聲音篇과『皇極經世書』역수론비교를중심으로
4『구수략(九數略)』,송대도서상수학으로짜인조선수학서
5崔錫鼎의산학연구와《養窩集》의저자李世龜

출판사 서평

명곡최석정(崔錫鼎:1646~1715)은전주최씨가문에서태어났으며,병자호란당시남한산성에서주화론(主和論)을주장하고영의정까지역임한최명길(崔鳴吉)의손자이다.초명은석만(錫萬),호는명곡(明谷)또는존와(存窩),자는여화(汝和)다.아홉살의나이에『시경』과『서경』을암송했고,열두살이되어『주역』을도해할수있는수준에이르자주위에서신동으로이름났다.

숙종대윤증(尹拯),남구만(南九萬)등과함께소론의영수로활약하면서정계와사상계에서주요한역할을한인물이었다.최석정은숙종후반기에10번이상정승에올랐는데,이처럼오랫동안최고의직책에자리할수있었던데에는온건하고타협적인정치노선이큰작용을하였다.그리고이러한정치관의기저에는사상적으로는주자성리학에만매몰되지않고양명학,음운학,수학등다양한학문에관심을가지는개방적입장이있었다.

그러나최석정을기억하는사람들은별로많지않다.한국사교과서에도별다른언급이없다.이것은지금까지조선후기정치사연구의주요흐름이당쟁사중심으로진행되었고,그과정에서의최석정처럼국익과민생을위해큰공을세운인물의모습은많이가려져버렸다.본책은최석정이지금의시대에왜필요한인물인가를강조하기위해최석정을다시소환한연구성과들을모았다.최석정의정치사상과학문세계를조명한연구성과들을모아서,최석정의진면목을찾아보고자한다.

숙종42년(1715)70세의일기로죽었을때실록에남겨진졸기(卒記)를보노라면최석정은성품이바르지못하고공교하며경솔하고천박하였으나,젊어서부터문명(文名)이있어여러서책을널리섭렵했는데,스스로경술(經術)에가장깊다고하면서주자(朱子)가편집한경서(經書)를취하여변란시켜삭제하였으니,이로써더욱사론(士論)에죄를짓게되었다.그리고여러번태사(台司:三公)에올랐으나일을처리함에있어전도되고망령된일이많았으며,남구만을스승으로섬기면서그의언론을조술(祖述)하여명분과의리를함부로전도시켰다.경인년(1710)에시약(侍藥)을삼가지않았다하여엄한지시를받았는데,임금의총애가갑자기쇠미해져서그뒤부터는교외(郊外)에물러가살다가졸하니,나이는70세이다.뒤에시호를문정(文貞)이라하였다(《숙종실록》권56,41년11월11일)라고하였듯이,매우부정적인인물로그려놓고있다.노론들이주도하여편찬된실록이기에그편향됨이매우심하다는것을단박에알수있다.

1701년영의정에임명된최석정은장희빈사사(賜死)를반대하다충청도진천에유배되었고,이듬해석방되어판중추부사를거쳐다시영의정에오른것을비롯하여전후8차례에걸친영의정역임이었으니,숙종중~후반기혼돈의정국들이어떻게진행되었는지가히짐작되고도남는다.최석정은남인과서인이대립하고,노론과소론들이분열되던혼돈의시대를살았지만,급진적인과격함보다는온건하고합리적인정치노선을견지했다는점에서매력적인인물이다.당대에주류적사유세계를지배했던예학이나존주대의론에얽매이지않고,현실성에바탕을둔선대의학문과사상을오롯이물려받았기때문일것이다.성리학을보완할수있는천문학이나음운학과상수학은물론서학에이르기까지다양한학문을자기것으로끌어들여녹여내는용광로나다름없었다.

그의가문이력을보면,광해군시절북인정권치하에서축출되었다가영의정으로추증되었던증조부최기남(崔起南)은성혼학통을이어받았다.조부최명길이현실론을앞세운주화론을견지한것이나,양명학에관심을보인것도그런영향으로추정된다.손자최석정이일찍이박세채ㆍ남구만등소론계인물들을사사하여다방면의학문을익인것도가학(家學)영향이적지않았다.좌의정을지낸아우최석항(崔錫恒)역시경종과영조시기의치열한노론과소론의공방전이벌어질때온건파소론영수로활약했고,아들최창대(崔昌大)가아버지뜻을받들어‘노론은당(黨)을위주로의론하여사류들이싫어하는반면소론은당을초월해서일을논의하여공평하게처리한다.’라고주창했던자신감도그냥나온것은아닐것이다.하지만,중앙정국흐름은노론세로급격하게기울어져갔고,급기야궁궐안에대보단(大報壇)설립을계기로대명의리론이크게일자,최석정가문의입지는좁아지기시작했다.주화론자였던최명길에대한공격수위가갈수록높아졌기때문이다.특히숙종임금이말년에내린병신처분으로조선후기정국이나사상적흐름들이노론독주체제로치닫게되면서,척화파와그후예들만을기리는정치사회적분위기로흘러갔으니,주화파후예이자소론을이끌던최석정이란인물이상대적으로묻혀갔던것은결코우연이라할수만은없을것이다.

그러하니,한시대를풍미했던인물을놓고내린사서(史書)의평가는춘추필법자세로엄정해야한다는것이만고의진리일진데,그런차원에서《숙종실록보궐정오》에서수정한최석정졸기를놓고앞의것과비교해보면,성품이청명(淸明)하고기상이화락(和樂)하고단아했으며,총명함이다른사람보다뛰어났다.어려서남구만(南九萬)과박세채(朴世采)를따라배웠는데,이치를분별하여깨달아12세에이미《주역》에통달하여손으로그려서도면을만드니,세상에서신동이라일컬었다.구경(九經)과백가(百家)를섭렵하여마치자기말을외듯이하였는데,이미지위가고귀해지고늙었으나오히려송독(誦讀)을그치지않으니,경술(經術)·문장(文章)·언론(言論)과풍유(風猷)가일대명류의종주가되었다.산수(算數)와자학(字學)에이르러서는은미(隱微)한것까지모두수고하지않고신묘하게해득하여,자못경륜가(經綸家)로서스스로기약하였다.열번이나태사(台司:三公)에올라당론을타파하여인재를수습하는데마음을두었으며,《대전(大典)》을닦고밝히는것을일삼았다.신사년(1701)에세번차자를올려미움받았는데,이는다른사람들이하기어려워하는것이었으니,조태채(趙泰采)가매복(枚卜:정승선발절차과정)에서대신(大臣)의풍도가있다고했다.소관(小官)에있을때부터임금의권애(眷愛)가특별하여만년까지쇠하지않자,당인(黨人)들이이를매우시기하여처음에는경서를훼파(毁破)하고성인을업신여겼다고무함하다가
마침내시병(侍病)하는데삼가지않았다고구죄(構罪)하니,하루도조정에편안히있을수없었다.그러나편안히지내면서끝내기미(幾微)를얼굴빛에나타내지않으니,사람들이그의너그러운도량에감복하였다.만년에는더욱경외를왕래하다가황야(荒野)에서죽으니,식자들이한스럽게여겼다.라는바와같이,사뭇다른평가를내리고있다.소론들의입장이반영되었기때문일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