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옷을 입으렴 (양장)

잠옷을 입으렴 (양장)

$19.00
Description
시간은 무심히 같은 속도로 흐르지만, 성장기에 체감하는 시간은 유난히 밀도가 높고 풍성하다. 《잠옷을 입으렴》은 한창 민감하고 섬세한 시기에, 외가에서 함께 자라는 수안과 둘녕의 이야기이다. 엄마가 말도 없이 집을 나간 뒤 시골 외가에 맡겨진 열한 살의 둘녕은 동갑내기 이종사촌 수안을 만난다. 책을 좋아하고 낯을 가리는 예민한 수안과, 뜨개질을 좋아하고 조용히 외할머니를 도우며 지내는 둘녕. 처음 서먹했던 순간이 지나고,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그들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촌이자 친구, 어쩌면 소울메이트가 되어 성장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언제까지나 안온한 유년이 계속될 수는 없으며, 아이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마침내 그 순간이 찾아왔을 때 그들도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을 것이다. 좋은 시절이 끝나면, 그 후에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저자

이도우

저자:이도우
소설가.라디오작가와카피라이터로일하다소설을쓰기시작했다.라디오피디와작가의쓸쓸하고저릿한사랑을담은《사서함110호의우편물》,외가에서함께자라는사촌자매들의애틋한추억과성장담을그린《잠옷을입으렴》,시골낡은기와집에자리한작은서점‘굿나잇책방’에모여용서와위로,사랑을이야기하는《날씨가좋으면찾아가겠어요》등의소설과산문집《밤은이야기하기좋은시간이니까요》를썼다.작가특유의따뜻한시선과깊고서정적인문체로,많은독자들의사랑을받으며‘천천히오래아끼며읽고싶은책’이라는평을듣고있다.엘리너파전의동화집《작은책방》을우리말로옮겼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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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41p
마당에누워올려다보는밤하늘엔뭇별이반짝였다.외가엔많은식구가살았지만내가모암마을에서지내기시작한처음두해를돌이켜볼때,손을내밀면질감이느껴질것같은식구는수안과외할머니뿐이었다.다른이들은그림자처럼멀게만느껴졌고그들의적절한무심함과거리감이나를외롭게도편안하게도만들었다.

51p
“왜,잘산다는데도싫으냐?”
노파가속을떠보듯물었지만나는시선을더러운방바닥에고정한채입을열지않았다.수안이행복하지않은데나혼자행복해진다면안될것같았다.아니,수안뿐아니라사람들이살아가면서얻는행복의평균이있다면나도그정도이길바랐다.혼자서더행복한건어쩐지불안하고,남의행복에서덜어온듯해편치않을것같았다.돌이켜보면세상의기쁨과슬픔,행복과불행의양이처음부터정해져있다고느꼈던날들이있었다.누구하나가많이행복하면다른하나가그만큼불행할지도모른다고.타인의행복이커진다고해서내행복이줄어들진않는다는진실을깨닫기까지는세월이많이걸렸다.

68-69p
그때나는마당의아가위나무가내편이었어요.가을무렵아가위열매가붉게익으면팔뚝에오소소소름이돋을만큼예뻐서,몇알따다호주머니에넣고학교에가곤했습니다.(…)나는언짢은일서러운일이생기면아가위나무에다버렸습니다.마당의그나무는내가버린마음들을다받아내고자랐습니다.그래도아가위나무는아프거나시들지않았습니다.내가잠들고나면낮에내가버렸던그마음을나무또한밤바람에실어서멀리떠나보냈습니다.그래서아가위나무도나도함께숨쉬며자랄수있었습니다.

99-100p
우리는상대방이자기낱말을쉽게맞히면속을빤히들킨듯해샐쭉해지곤했지만,도무지못맞혀도텔레파시가통하지않은것같아서운해했다.변덕스런사춘기가찾아온탓인지도몰랐다.
“난말이야.나와친구가되고싶은사람이있다면,좋아하는낱말열개를적어보라고하고싶어.거기서내맘에드는낱말이적어도다섯개는보여야사귈수있을것같아.”
수안이심각하게말했을때,그래서모암분교여자아이들이수안과놀지않는게아닐까나는생각했지만입밖에내지는않았다.

109-110p
그시절그아이는,어쩌면세상에없는언어로얘기하고싶었는지도모릅니다.사람들에게서잊혀져가는꼭꼭숨어있는말들을찾아배우고싶었나봅니다.늘쓰던흔한언어로는말이되어나오지않을때.이미죽은언어라는사어를배우고싶은마음일때.살다보면나도그런마음이될때가있습니다.그어떤언어도내마음을표현하기에합당하지않다고느껴질때가말입니다.하지만말도글도쉽게만들거나배울수없다는것을알고있으니까,그럴때면나는그냥침묵합니다.

159p
나는어딘가조용한기쁨에젖어말했다.
“나는이다음에나무가있는집의주인이될거야.”
미주는커다랗게끄덕였다.
“그거좋지.나무가있으려면마당이넓어야할테고.마당이넓으면아무래도부잣집이지.”
“부잣집이아니라도나무가있으면돼.탱자나무울타리도좋고.”
미주는그럼그럼하며동의해주었다.그건왠지내게큰힘이되었다.그순간나는그럴수있을것같았다.언젠가큰나무가자라고향기로운울타리를두른집의주인이될것만같았다.그집에서매일저녁무렵현관에앉아내마당을내다보면서이날을생각해야지.

210-211p
“그한자뭐야?”
그러려고했던건아닌데나도모르게퉁명스러워졌다.충하는책표지를흘끔보고대답할까말까망설이는기색이더니,체념한듯입을열었다.입술을모았지만쉽사리소리가나오지않았다.우­우­
“…우수.”
『필립마로우의우수』.끝까지말안할줄알았는데뜻밖이었고,게다가하도힘겹게대답을하니미안한말이지만기분이조금나아졌다.
“형사구나.범인이름치곤낭만적이니까.”
충하는국민체조목운동처럼고개를한바퀴돌리고는다시애썼다.타­타­
“탐정.”
“그러니까.”
“혀,혀,형사랑타타탐정은…다…다…다,달라!”
힘들여말을끝낸충하는미간을확찌푸리며외면해버렸다.

304-305p
“귀에서기차소리가들려.”
우리는책가방을들고정류장에서있었다.수안은고개를갸웃하더니비로소알겠다는듯이말했다.
“전부터이소리가뭔가했는데방금깨달았어.기차가멀리서다가오는소리야.철길을따라서바퀴를굴리며희미하게.”
이명이들리는걸까.가끔은나도귀에서윙윙바람소리가들릴때가있지만금세사라지곤했다.외할머니도절에서치는종소리같은게날때가있다고했었다.
“소리가종일들려?”
“아니야.들렸다안들렸다해.아마기차를타라는계시가아닐까?”
농담인지진담인지수안은웃지도않고말했다우리는그렇게버스를기다리며서있었다.

386p
충하는편물부만둘러보고는오래머무르지않고강당을나섰다.방명록작성도하지않았다.벽돌이깔린담장길을따라교문까지바래다주면서내가물었다.
“다른전시는안봐?”
“별관심없어.”
“그럼내것만보러온거야?”
충하는고개를끄덕였다.그러고는천천히힘주어말했다.
“가끔생각해봤는데그러니까난,이읍에서만난여자아이들가운데…비교적널,편애하는것같아.”
나는풋웃으면서도코끝이찡해왔다.눈물이날것같아서함께걷는동안바닥에깔린벽돌을밟는데만신경쓰는척했다.강당에서교문까지길은너무짧았다.

398p
“주말에방보러가는데…같이가자.”
수안은돌아보지않았다.
“방앗간옥탑방이래.알아두면놀러올수있잖아.”
“…됐어.놀러안갈거야.”
마음을닫아버린듯조용한목소리가내가슴을아프게했다.언제나전부가아니면아무것도아닌것처럼,내사촌은그랬다.그런점이함께했던시절동안나를힘들게도했지만,그순간은다고마운기억뿐인것같았다.습한바람이불어와오동나무옷장문이삐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