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동백꽃

하얀 동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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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박현경 작가의 수필은 고독의 실상에 맞부딪히며 이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극복해나가고 있다. 잃어버린 모든 것 중 먼저 떠나버린 동반자에 대한 상실감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듯한 것도 그것이 사랑의 상실로 인한 통증이기 때문이다.
작자는 이번 작품들과 함께 앞으로 이어나갈 창작의 방향으로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시 분명히 설정해 놓고 있다. 이것이 감각적인 의미의 에로티시즘이나 예수와 석가와 천도교 등에서 추구하는 인간애보다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비극성에 대한 도전이요 극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런 철학적 명제에 우수한 기법을 접목시켜 나가는 박현경의 수필이 앞으로 더 보여 줄 결과에 대한 기대가 매우 클 수밖에 없다.
저자

박현경

출간작으로 『하얀 동백꽃』 등이 있다.

목차

작가의 말 │ 생의 바닥에서 날아오르는 새처럼ㆍ4
근원적 고독과 사랑의 수필미학 - 김우종(문학평론가)ㆍ227

Ⅰ│ 덜 취하고 덜 쓸쓸하게
하얀 동백꽃 ㆍ 13
음악이 건네는 말 ㆍ 18
몽돌 위에 그려진 시간 ㆍ 23
가을 발자국 ㆍ 27
딱딱한 시간과 살고 있는 지금 ㆍ 31
필사적 시점 ㆍ 36
어쩌다 저자 ㆍ 38
코로나와 술지게미 ㆍ 43
나의 마음 방 ㆍ 46
삭정이들의 행진 ㆍ 50
일상의 미덕 ㆍ 53
너무 아쉬워 마 ㆍ 56
낭만의 계절 ㆍ 60

Ⅱ│ 모른 척했던 나 자신이라는 풍경
나이 듦의 힘 ㆍ 67
나 자신이라는 줄다리기 ㆍ 72
아직도 꿈꾸는 어른이 ㆍ 78
꼰대와 샤방샤방 ㆍ 82
쑥부쟁이 연가 ㆍ 86
삶의 허기를 달래는 순간들 ㆍ 90
꽃이 위로가 되고 ㆍ 95
혼자 지내는 기분 ㆍ 99
내가 좋아하는 것들 ㆍ 102
너 자신을 알라 ㆍ 106
박현경 여사님께 ㆍ 110
다리가 긴 신사와 함께한 시간들 ㆍ 112

Ⅲ│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
버팀목 ㆍ 117
간이역 ㆍ 122
하얀 거짓말 ㆍ 127
뭐 재미있는 얘기 있나요 ㆍ 133
지문처럼 의미가 묻어나는 구불길 ㆍ 138
거리의 악사 ㆍ 143
자두 사장 복숭아 할머니 ㆍ 147
가을 속에 도착하다 ㆍ 151
울퉁불퉁한 변증법 ㆍ 156
동백꽃과 쌍가락지 ㆍ 159
유쾌한 택시기사 ㆍ 163
겨울나무 ㆍ 167
사과의 진짜 문제 ㆍ 171
“나는 사랑나무입니다” 수필집을 읽고 ㆍ 177

Ⅳ│ 어쩔 수 없는 것들은 어쩔 수 없는대로
삶에 밑줄을 긋다가 ㆍ 181
까치발 ㆍ 186
눈물의 농담 ㆍ 190
더딘 사랑 ㆍ 194
흙 ㆍ 197
매화 한 잎 ㆍ 202
내 마음속 사랑마을 ㆍ 204
수국 ㆍ 209
홍시 ㆍ 213
바닷가에서 ㆍ 216
여행길, 멜랑콜리 ㆍ 218
대구문학관에 두고 온 시간 ㆍ 223

출판사 서평

근원적 고독과 사랑의 수필미학
-문학평론가 김우종

1. 노년기 문학 연령
문학은 전문가의 영역이다. 전문가는 다른 열 가지 분야에 모두 능해도 하나에만 전념하는 사람이다. 지하철에서 남들에게 떠밀리면서도 작품 구상을 하는 사람이 전문가다. 그런데 문학은 생업이 되기 어렵고 사고력과 감수성이 둔화되면 계속하기 어렵다. 그래서 문인들 대다수가 일찍 폐업하고 이름만 달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보면 수필가 박현경은 매우 특수한 존재다. 80 넘은 연령대의 한국 문단은 거의 비어 있기 때문에 그는 특수하다. 활동하는 현역 문인으로 보면 그렇다. 80 넘어서 수필집을 내고 쉴 틈도 없이 제2 수필집을 내는 사람은 박현경 작가 한 사람뿐일 것이다. 그래서 어딜 가나 최고령 작가로 대접해도 별로 사무착오가 아닐 것이다.
나이 많은 것이 벼슬은 아니다. 다른 또 하나의 특성은 문학 연령의 젊음이다. 작품은 나이만큼 성숙함이 바람직하지만, 이것은 일반론이 되기 어렵다. 나이만큼 성숙하다기 보다는 늙는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런데 문학은 늙어서는 안 된다. 80이나 90을 넘어도 갱년기 이전처럼 생기발랄해야 한다. 호적 나이는 팔구십이어도 문학 연령은 한 세대 아래라야 적당하다. 이것이 바람직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한국 문단에서 보면 원로는 시상식 같은 데서 단상용으로 몇 사람만 쓰다가 사라진다. 그러므로 박현경의 활동 양상은 이변이다. 그 연령인데 작품이 유난히 젊고 거의 매일 가동 중인 것 같다.
또 하나 더욱 중요한 특성은 창작의 동기다. 그의 창작 활동의 목적은 일반 상식적 가치관의 수준에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죽음을 무릅쓰고 정상으로 기어오르는 등산가에게 등산 목적을 묻고 ‘저기 산이 있기 때문에 올라간다’라는 대답만 들었다면 그것은 대답이 아니지만 가장 순수하고 명확한 답이 그것일 수 있다.
박현경에게는 글쓰기로서의 완성 목표가 따로 없다. 종착지를 향한 걸음이 아니라 그냥 계속해서 산을 오를 뿐이다. 다만 가장 걷고 싶은 길이 있을 뿐이다. 버팀목이 되어 온 일생의 동반자가 떠나버린 후의 인간, 이 세상에 그냥 내던져진 고독한 존재로서 인간에게서 그 구원의 길이 사랑임을 절감한 것이 이정표가 된 듯하다. 박현경 작가가 글을 쓰며 가는 길의 이정표에는 ‘사랑’이라 씌어 있는 것 같다. 물론 글쓰기 소재는 우물가 여인네들 수다처럼 다양해야 더 좋지만, 이 작가가 조용히 혼자 묻고 대답하는 창작행위의 방향은 사랑인 것 같다.
그리고 이 주제는 근원적인 고독한 존재로서의 인간 구원을 의미하기 때문에 너무도 순수하고 아름답다. 정확한 판단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 연령에 그런 동기의 창작행위를 계속해 나가는 예는 이 작가 말고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세 가지 특성을 좀 더 작품 얘기와 함께 부연해 보자.

내가 오르려고 하는 문학의 산은 정상이 아니다. 한걸음, 한걸음 즐기며 오르고 싶다. 우연을 가장한 행운이 따라 주어서 좋은 작품집을 펴내고 싶은 것이 전부다. 이 세상에 왔다 가는 흔적을 글 속에 남기고 싶은 바람이 오늘도 나를 컴퓨터 앞에 앉혀 놓는다.
〈어쩌다 저자〉

이것은 처음으로 등산하려는 사람의 고백이다. 사실로 첫 수필집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박현경 작가는 문인으로서 초년생이다. 영문과 출신이라는데 졸업 후 영문학 연구와 저술 등으로 얼마나 그 연장선에 머물러 있었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90을 바라보는 나이에 새 출발은 남들 보기에 좀 위태롭다. 실제로 박 작가와 같은 연배라면 이미 10여 년 전에 대개 작품 활동을 멈췄다. 그런데 이 작가는 문학 연령으로는 매우 드물게 갱년기 이전이다. 문학적 연령은 객관적 평가가 어렵지만, 창작 과정에서 나타나는 기억력, 언어 구사의 생동감, 사물에 대한 감수성, 소재의 선택 그리고 상상력과 논리적 사고력 등에서 어느 정도 검증이 가능하다.

2. 소재 선택에 나타난 문학 연령
여러 조건을 굳이 설명하지 않고 다만 ‘소재 선택’ 하나만으로 문학 연령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어느 장르를 막론하고 작가는 연령층에 따라 소재 선택에 차이가 있다. 정확한 객관성은 아니지만, 소년 소녀들의 관심사와 갱년기 여성들의 수다와 탑골공원에서 남은 인생을 보내는 사내들의 대화 내용은 각각 유형이 다르다. 사랑의 서정시는 부부가 서로 각방 쓰며 무관심해지는 노년에는 거의 쓰지 않으며 쓰지 않는 것이 명예 유지에 해롭지 않다.

며칠 전 나의 소녀 감각이 딸을 보챈 것은 아닐까. 친구가 보낸 인천 영흥도 바다 사진을 보고 사춘기 소녀처럼 당장 바다에 가고 싶었다. 모래사장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출렁이는 바다 풍경은 나를 유혹했다. 모래톱에 닿아 장난치다 도망가듯 사라지는 파도가 내 마음을 바다로 끌고 가는 느낌이었다. 당장 철썩이는 파도가 보고 싶었다. 친구에게, 딸들에게 바다에 가지 않겠느냐고 졸랐다. 코로나가 만연한 시기에 “너 참 용감하구나”라는 면박을
받기도 했다.
구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보고 싶은 것이 많아 숨이 가쁘다. 살같이 지나가는 세월을 아쉬워하는 엄마 마음을 딸에게 들킨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다. 여행에 허기진 나는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딸의 마음을 받기로 했다.
남편이 인생의 소풍을 끝낸 지 삼 년이 지났다. 그가 떠난 후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여행 앓이를 한다. 85년을 살아온 지금, 나의 버킷리스트 첫 번째는 여행이다.
〈삶의 허기를 달래는 순간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고백으로 실제적 연령과 함께 자신의 관심사를 나타낸 것이겠지만 ‘사춘기 소녀처럼 당장 바다에 가고 싶었다’라고 하니 이 작가는 감성지수로 보건대 소녀 수필가다. 실제로 그 나이의 소녀는 아니지만 ‘보고 싶은 것이 많아 숨이 가쁘다’는 것은 작품 전반에서 감지되는 이 작가의 청춘 냄새다. 소녀처럼 들뜨고 ‘나의 버킷 리스트 첫 번째가 여행’이라고 한 것은 그만큼 젊음의 감수성이 싱싱하게 살아 있다는 뜻이다.
딸이 바다로 가자고 제의한 것은 이 글을 쓰는 시간에 손자가 내게 어떤 호텔 숙박을 제의한 경우와 비슷하다. 그런데 박 작가는 나와는 나이 차이도 있지만, 이 무더위에 손자가 좋은 호텔로 모시겠다는데도 고맙다는 대답 한마디 해 준 것 말고 들뜨는 감동이 없었던 것은 너무 큰 차이다.
소녀처럼 들떴다는 것은 시원하고 달콤한 물이 터져 나올 같은 복숭아와 이미 국물이 말라버린 복숭아의 차이다. 그런데 이 작가의 이런 젊음은 공짜가 아니다. 작가는 창작에서 매우 소중한 어휘 동원력을 걱정하고 감수성 문제도 걱정한다.

나이가 들어 적절한 어휘가 막힐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언어를 선택 한다. … (생략) … 순수한 마음으로 나는 글을 쓰며 세월을 낚고 있다. … (생략) … 시간이 지날수록 내 책꽂이와 책상, 식탁 위에는 손만 뻗으면 잡히는 책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어쩌다 저자〉

작가는 이렇게 글 속에서 주근깨나 검버섯 같은 언어는 빼 버리고 싱싱한 젊은이의 용어로 바꾼다. 피부과 병원에 다녀와서 얼굴이 젊어지는 기법 같다. 손만 뻗으면 어디서나 책이 닿는다는 것도 그렇다. 새로운 지식과 용어와 함께 변해가는 세상과 만나고 생각이 앞서간다. 감수성도 노화방지 기능이 계속 작동 중이다. 이것으로 보면 이 작가의 젊은 문학 연령은 매우 힘든 노력의 대가다.
이 작가가 내게 준 작품들은 분명히 추억의 소재들이 많다. 수필은 대개 자신의 직접적 경험담을 소재로 하는 경향이므로 노년기의 수필은 과거지향적인 추억담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에 원로작가들은 세월에 대한 애수는 있는데 푸념으로 그치기 쉽다. 이야기 속에 촉촉한 물기가 적고 향기도 적다. 이와 달리 박현경의 수필은 소재가 달라지며 사랑의 향기와 함께 이를 품은 시와 음악과 그림이 있어서 소재 자체로서 문학 연령이 갱년기 이전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동안 내 가슴 한편에 진한 울림이 있었다. 마리는 인생길에서 얻은 고통을 내면에서 꽃피우는 성숙한 여인으로 나이 들어갔다. 억센 표정이 우아한 선의 여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나의 자화상은 어떤 모습일까 혼자 그려 보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을 아는 글쟁이로 살았다는 기억으로 남고 싶다. 마리 로랑생 같은 품위 있는 작품을 쓰는 꿈을 꾸어본다. 그림 재능은 없지만 오랜 세월 숙성된 사랑의 글을 한편 남길 수 있을까. 나는 붉은색으로 삶을 덧입히며 사랑으로 살고 싶다.
〈나이 듦의 힘〉

이것은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의 그림 전시장을 나오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장면이다. 작가는 로랑생이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와의 사랑과 이별을 통해서 작품을 어떻게 변화시켜 나갔는지를 말하며 자신이 그려 나가고 싶은 자화상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물론 그녀처럼 슬픔까지 실화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만 로랑생이 고통을 통해서 더 성숙해지고 아름다워졌듯이 자신의 자화상도 그렇게 ‘나는 붉은색으로 삶을 덧입히며 사랑으로 살고 싶다’라 말한 것으로 본다.
이 작가의 사고 연령이 얼마나 젊고 수필 속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짐작하게 된다. 로랑생의 자화상이라 할 수도 있는 그림 속 여인들의 입술이 유난히 붉은것이 사랑 때문이라 한다면 박현경의 수필은 붉은색이다.
각 작품의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약 4년 전 수필집 《나는 사랑나무입니다》 이후는 80대 노년기 작품에 해당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의도하는 수필 세계도 여전히 사랑이다. 물론 그 사랑은 로랑생의 그것과는 좀 다르게 평생 ‘소풍’의 동반자이면서 연인 같았던 사람과의 만남을 말하는 것 같다.
이런 사랑의 소재는 박현경 작가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절실한 호소력으로 우리 가슴에 전해준다. 화가 로랑생과 시인 아폴리네르가 그랬듯이 ‘미라보 다리 아래’를 찾아가 더라도 흐르는 강물이 속삭이는 사랑과 이별의 전설을 들을 귀가 없다면 문학을 하기 어렵다.
그림을 통해서 사랑의 자화상을 그린 것처럼 박현경 작가는 음악에서도 사랑을 찾는다. 멘델스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