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역사의지평에서테크놀로지의본질을사유하다
이책은에른스트카시러의문화철학과루이스멈퍼드의기술철학에기초한‘문화적접근법’을통해테크놀로지의기원,역사,철학을살펴봄으로써‘기술은무엇인가’라는우리시대의근본질문을탐색한다.문화적접근법은기술을정신의일부이자문화의구성요소로이해하며인간을문화적,상징적동물로규정한다.이러한시각에따르면,기술은단지응용과학이나물질적실천이아니라의미체계이며,총체성·역사성·관계성이기술을제대로이해하게하는핵심이다.그리고기술에대한물음은근원적으로인간에대한물음과다르지않다.
문화적접근법의근본조건은상징의보편성,기술의기원으로서의신화와우주론,기술의진화,기술이해의다양성이다.저자는이런조건을바탕으로서양의철학적사유와기술이맺어온역사를살펴본다.즉고대그리스의테크네techn,중세의아르스ars,근대의테크닉techinc,현대의테크놀로지technology라는네가지기술이해방식을제시한다.시대에따른의미변동에서다양한기술의공존가능성과기술이해의다수성을확인할수있다.
이책은역사와문화의지평에서테크놀로지를이해하는‘문화적접근법’을통해테크놀로지의근본특성과현대문명이직면한위기의본질을드러내고자한다.이러한모색위에서우리는기술결정론에입각해테크놀로지의문제를기술적측면에서만다루고테크놀로지가초래한문제를더많은테크놀로지로해결하려는시각에서벗어나미래의방향을성찰할수있을것이다.
“이제우리앞에는근본적인불확실성속에서새로운질서와동적균형을창출해야하는긴급한과제가놓여있다.이는과거의기계문명에서의도적으로배제됐던인간,생명,생태,공존의가치를문화라는전체틀에서재구성하고테크놀로지를이관계망의일부로다시포섭하는일이될것이다.”
상징체계와문화:카시러와멈퍼드
카시러와멈퍼드의사유의바탕에는인간이만든모든문화적구성요소는상징체계이고,인간이란자신이만든문화적활동을벗어나서는이해할수없는존재라는통찰이깔려있다.멈퍼드에게테크닉과예술은인간본성의두가지성향이다.외부환경을통제하는객관적활동인테크닉과인간의내적필요를표현하는활동인예술은늘함께작용하며,상징이이를매개한다.멈퍼드는이통합이깨져테크닉과예술이극단적으로분리되고정치권력,기계적관념,권위적기술이강하게결속된상태를‘거대기계-거대기술’의조합으로표현했다.멈퍼드가보기에현대의위기의근원은인간본성의분리,즉테크닉과예술의분리이며,이둘의조화와균형에위기극복의길이있다.이러한맥락에서멈퍼드는기계중심의기계적세계관에서인간과생명중심의유기체적세계관으로의전환을역설했다.
카시러문화철학의근본원리는인간의자기인식문제와생성의원리다.카시러에따르면,인간이란정신의근본기능을통해형성된문화세계의영역,곧언어·신화·종교·예술·과학등의상징체계들에서만인간적인삶을유지하고제대로이해될수있는존재다.또카시러는존재와생성의이원적대립관계를진정한상관관계로통일하려했으며,인식의범위를문화전체로확장했다.
문화철학은상징형식의체계들의체계다.상징형식은실재라는근원현상으로부터다양한갈래로뻗어나오는정신의능동적힘이자형태화작용이다.카시러는기술을또다른상징형식의체계로규정한다.그는기술의우위를인정하면서도기술의근본형식과가능성으로기술을체계적으로문화에통합해야한다고주장했다.이는기술을하나의상징형식의체계로다른상징형식의체계들과병치시키는것이아니라기술의형성조건과가능성을파악함으로써문화세계에유기적으로통합시키는것이다.
고대세계의테크네와아르스
고대그리스인들은우주를아름답고질서정연한코스모스로규정하면서우주,폴리스,인간을통합된전체로이해했다.당시에‘테크네’는폴리스의유대를강화하고시민들의도덕적합일을이끌어내는사회적기능을했다.신의세계와인간의세계를구별한그리스인들은신적만듦을뜻하는‘피시스’와인간적만듦을뜻하는테크네를구별했다.이런우주론과사유구조에서테크네는자연의질서를모방해주어진것을활용함으로써좋은것을새롭게만들어내는인간의지적활동이자능력이었다.
헬레니즘-로마시대는테크네에서아르스로의이행기였다.이때근대적의미의테크닉과예술의통합개념,즉기예技藝가탄생하는데,두가지핵심적인변화가이를이끌었다.하나는스토아철학의‘인간의근본적평등’이라는관념이로마시대에인간성의이상으로정립된것이다.다른하나는로마의지식인들이아리스토텔레스의질료형상설을바탕으로이데아를장인/예술가의정신에있는내적형상으로파악함으로써플라톤의초월론적미의관점에근본적변화를일으킨것이다.
중세와르네상스시기의아르스
고대의테크네를계승한중세의아르스는순수예술과수공예및학문을포괄하는모든지적형식의통합개념이었다.근대와달리중세에는순수예술과공예를나누지않았으며,아르스의실천에서정신적노고만필요한지신체적노고도필요한지에따라아르스를‘교양아르스’와‘기계적아르스’로구분했다.
중세의근본정신은기독교와신비주의의결합으로형성된상징주의다.모든피조물을하느님이창조한기호나상징으로본중세인들은종교적감정을강렬한이미지로전환한징표를통해말로표현할수없는것을숭배했으며이에걸맞은상징적이미지를끊임없이만들어냈다.중세의사유구조에서아르스의의미는고대테크네처럼자연의질서를모방해새로운것을만들어내는활동에머물지않고하느님이창조한수많은기호/상징의세계를발견함으로써초월적세계로나아가려는인간의의식적활동이었다.아르스의본질적의미는스콜라철학과고딕건축의동시발생이라는사건,그리고중세의초월적미학에서잘드러난다.
근대의테크닉
근대의‘테크닉’은다의적인개념이었다.17세기이탈리아의신조어테크니카technica가프랑스의테크니크technique로,18세기독일에서는테히니크Technik로번역소개되면서전유럽으로확산된결과19세기중반테크닉은세가지의미로쓰였다.첫째무엇을제작하거나실천할수있는인간의지적활동,둘째산업과엔지니어링영역에서의물질적·실천적측면,셋째응용과학이다.그리고19세기후반에베버는‘합리적행위에수반되는수단의총체’라는정의를추가했다.
테크닉의의미는근대의기계적세계관의확립과정및아르스가순수예술과공예로분리되는과정과긴밀히맞물려있다.순수예술과공예의분리는오래된기술과예술의통합의균열을의미했다.규칙과질서라는속성을테크닉에내어준예술은추상적이고분열적인방향으로나아간반면상상력과직관을순수예술에내어준테크닉은모든것을계산가능성과효율성에종속시키는물화체계강화의방향으로나아갔다.이런상황에서공장과기계를중심으로폭발적인산업화가진행되면서산업과엔지니어링의물질적,실천적측면이라는테크닉의의미가점점강화되었다.그결과19세기에는테크닉-엔지니어링-과학이하나로통합되는상호네트워크와협력이가속화되면서기계문명이본격화되었다.
기계문명의비판자들:하이데거와멈퍼드
하이데거와멈퍼드는테크닉의본질을간파하고기계문명을고찰한1세대기술철학자들이다.하이데거는‘몰아세움’개념으로,멈퍼드는‘거대기계-거대기술’개념으로기계문명의작동원리를비판하고,이원리가극단적으로진화한현대테크놀로지의위험성을경고했다.하이데거는근대의테크닉을지배하는탈은폐의방식을‘도발적요청’이라는의미의몰아세움으로규정한다.인간과세계의관계를근원적으로변형시킨몰아세움은모든존재자가언제든지교체가능한‘부품’의방식으로계산되고배치되도록탈은폐된사태를의미한다.여기서모든것은에너지를뽑아내고효율성을극대화하기위해서부품으로배치되는데,결국인간을비롯한자연전체가황폐화되는결과를초래한다.
멈퍼드의거대기계개념은인간뿐만아니라사회조차그부속품이되어버린거대한기계체계를의미한다.여러부품이조합되면서사회자체가거대기계로돌아가기시작하면인간은기계를부리는주체가아니라기계체계를위한종속과동원의대상으로전락하게된다.문명전체가마치하나의거대한기계처럼기능하게되는것이다.권력,규모,속도,위계적집중화등의속성을띠는거대기계는거대기술과맞물려권력이상정한사회적목표를달성하기위해서사회전체를일사불란하고체계적인거대동원체계로만들어작동시키는눈에보이지않는구조를의미한다.
현대의테크놀로지
20세기이후양자역학,비평형열역학,사이버네틱스를포함한체계이론의등장이라는패러다임의전환속에서현대테크놀로지개념이정립된다.기원은19세기말미국을중심으로일어난제2차산업혁명의흐름이다.미국학자들은기계라는대중적용어나여러의미가중첩된테크닉이아닌테크놀로지를선택함으로써의미상의공백을메웠다.이에따라1930년대테크놀로지는산업적·공학적실재와물리적실천을의미하는가장일반적인용어로쓰였으며,1940년대원자폭탄프로젝트가성공하면서테크놀로지를응용과학으로보는입장이두드러졌다.이런과정을통해테크놀로지는미국의경제적,정치적영향력확장과함께보편적의미를획득하게되었다.
그러나응용과학으로서의테크놀로지개념은현대테크놀로지의본질적특성을이해하는데부적절하다.현대테크놀로지는19세기에서구유럽을지배했던물화체계로서의테크닉의연장선을넘어독자성과자율성이폭발적으로증대되는특성을보인다.여기서더중요한것은이런독자성과자율성의증대가새로운이론적배경과디지털환경속에서전개되고있다는사실이다.20세기를전환점으로학문적패러다임은근대의기계적,결정론적세계관에서현대의복잡성의패러다임으로전환되었다.계산가능성,선형성,결정성이아니라예측불가능성,비선형성,비결정성의세계로진입한것이다.
체계이론의철학자들:엘륄과시몽동
체계이론을수용해기술철학을전개한자크엘륄과질베르시몽동은21세기를대표하는기술철학자들이다.우연성과작동에서부터의미의산출을전제하는체계이론을수용한사상가들은의미문제를제대로해명하지못하는난점이있다.엘륄은체계이론의자장에서환경자체를테크놀로지로간주함으로써모든것을테크놀로지로환원하는닫힌체계를제시한다.엘륄에따르면,자율적기술체계로성장전화한테크놀로지가현대의새로운신으로등극했으며,이체계에동화된인간은여기서빠져나올수없다.이런아포리아에서인간이선택할수있는피난처로엘륄은종교에의귀의를권유한다.
노버트위너의사이버네틱스이론은2차대전당시대공포시스템구축을위한다학제연구로시작되어로봇공학,인지과학,철학,심리학,조직이론,경제학,컴퓨터과학등의다양한학문영역으로확산되었다.사이버네틱스이론의공통점은인간과사물을유사하게이해한다는것이다.체계-환경간제어와피드백메커니즘의작동이라는원리에서인간,동물,기계,사회조직은차이가없다.위너는기계와생명체와사회에모두사이버네틱스원리를적용했는데,시몽동은위너의체계이론을생명체와사회에적용하는것은불가능하다고비판한다.그는개체화이론의차원에서정보와형태의구분,의미와의미작용의구분,변환역학을통해다양한의미의발생을설명한다.그러나시몽동의논의는너무많은요소를변환작동에포함시킴으로써오히려의미의산출을모호하게만드는측면이있다.의미발생의문제를제대로설명하지못하면,문화에서배제된테크놀로지의존재론적지위를복원함으로써테크놀로지를다시문화세계에통합하려했던시몽동의철학적기획도한계를드러낼수밖에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