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21세기의 독립영화
서울독립영화제 40주년에 적지 않은 이들이 의아해 한다. 적어도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독립영화의 출발은 빨라야 1980년대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 독립영화는 새로운 영화의 맹아로서 열린영화, 민족영화, 작은영화, 민중영화 등 여러 이름으로 변주되며 영화에 시대의 공기를 불어넣고자 했다. 1990년대 독립영화는 그 연장으로서 꾸준히 발전하고 확장해 나갔다. 예컨대 집단 창작의 에너지와 관객과 만나기 위한 치열한 노력 등이 그러하다. 최루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공권력과 대치하였던 기억은 독립영화의 출현을 알리는 뜨거운 신호탄이었고, 검열과 맞서 싸웠던 결기는 제도와 문화의 혁신에 기여하였다. 시장에 개입하며 비주류 영화의 유통망을 조직하였고, 네트워크 상영을 통해 관객에게 능동적으로 다가가고자 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영화의 원형은 대부분 이때로부터 출발하였다. 90년대 문화의 성장과 함께 등장한 여러 영화제는 독립영화를 알리는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한국독립영화협회와 영화진흥위원회가 공동 주최하고 있는 현서울독립영화제의 전신은 1975년 시작된 한국청소년영화제이다. 주최 단체는 영화진흥공사와 한국방송공사였고 시상을 통해 젊은 영화인의 창작을 고취하고 격려한다는 목적을 내걸었다. 30세 미만과 순수영화라는 단서에도 불구하고, 첫해 60여 편이 출품되었다. 몇 가지 단서에서 TV수상기의 보급이 문화에 미친 영향과 유신 시절 강력한 문화 통제의 그늘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럼에도 주목할 것은 60여 편의 출품작이다. 경향신문 보도에 의하면 아마추어로 제한되어 있음에도 출품작이 많아 적잖이 놀랐다는 표현이 있다. 미력하나마 자유로운 개인들이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는 반증이다. 이와 관련해서 유현목과 하길종을 비롯한 영화인들이 펼쳤던 아마추어 영화에 대한 지원과 청년영화 운동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국영화의 고단한 침체기였던 1970년대 젊은 감독들은 당대의 청년문화의 자장 안에서 기존의 영화와 전혀 다른 정서를 표출했고, 청년 문화를 지배했던 자유에 대한 갈망과 권위에 대한 저항 정신은 뒤따르는 1980년대 독립영화 운동과 결코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립영화라는 명칭의 발원과 무관하게 1975년 60여 명의 감독들이 만들어 냈던 영화는 지금 우리가 호명하는 독립영화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한국청소년영화제가 비록 관변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일정하게 한국 독립영화의 연장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청소년영화제는 이후 금관상영화제, 금관단편영화제, 금관청소년영화제, 한국청소년단편영화제까지 오랫동안 초기 시상 영화제의 형태를 유지하였다. 1999년 한국독립단편영화제부터 비로소 현재와 같은 조직 시스템과 상영과 시상을 병행하는 축제로서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정부의 문화 정책은 영화진흥위원회 출범, 한국독립영화협회 설립과 맞물리며 영화제의 새로운 구성을 추동하였다. 서울독립영화제는 독립영화 영역에서 시행된 정부와 민간의 최초 거버넌스 모델이다. 비록 일부 시기 풍파를 겪긴 했지만 지금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는 것은 여러모로 상징하는 바가 크다. 서울독립영화제는 이후 독립영화에 대한 공적 담론과 인프라 증진을 가속시켰다. 이와 관련한 기록은 이 책의 2부 독립영화 정책과 운동 및 3부 서울독립영화제 약사에 담겨 있다.
2014. 11.
기획위원을 대표하여
서울독립영화제 사무국장
김 동 현
서울독립영화제 40주년에 적지 않은 이들이 의아해 한다. 적어도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독립영화의 출발은 빨라야 1980년대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 독립영화는 새로운 영화의 맹아로서 열린영화, 민족영화, 작은영화, 민중영화 등 여러 이름으로 변주되며 영화에 시대의 공기를 불어넣고자 했다. 1990년대 독립영화는 그 연장으로서 꾸준히 발전하고 확장해 나갔다. 예컨대 집단 창작의 에너지와 관객과 만나기 위한 치열한 노력 등이 그러하다. 최루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공권력과 대치하였던 기억은 독립영화의 출현을 알리는 뜨거운 신호탄이었고, 검열과 맞서 싸웠던 결기는 제도와 문화의 혁신에 기여하였다. 시장에 개입하며 비주류 영화의 유통망을 조직하였고, 네트워크 상영을 통해 관객에게 능동적으로 다가가고자 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영화의 원형은 대부분 이때로부터 출발하였다. 90년대 문화의 성장과 함께 등장한 여러 영화제는 독립영화를 알리는 본격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한국독립영화협회와 영화진흥위원회가 공동 주최하고 있는 현서울독립영화제의 전신은 1975년 시작된 한국청소년영화제이다. 주최 단체는 영화진흥공사와 한국방송공사였고 시상을 통해 젊은 영화인의 창작을 고취하고 격려한다는 목적을 내걸었다. 30세 미만과 순수영화라는 단서에도 불구하고, 첫해 60여 편이 출품되었다. 몇 가지 단서에서 TV수상기의 보급이 문화에 미친 영향과 유신 시절 강력한 문화 통제의 그늘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럼에도 주목할 것은 60여 편의 출품작이다. 경향신문 보도에 의하면 아마추어로 제한되어 있음에도 출품작이 많아 적잖이 놀랐다는 표현이 있다. 미력하나마 자유로운 개인들이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는 반증이다. 이와 관련해서 유현목과 하길종을 비롯한 영화인들이 펼쳤던 아마추어 영화에 대한 지원과 청년영화 운동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국영화의 고단한 침체기였던 1970년대 젊은 감독들은 당대의 청년문화의 자장 안에서 기존의 영화와 전혀 다른 정서를 표출했고, 청년 문화를 지배했던 자유에 대한 갈망과 권위에 대한 저항 정신은 뒤따르는 1980년대 독립영화 운동과 결코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립영화라는 명칭의 발원과 무관하게 1975년 60여 명의 감독들이 만들어 냈던 영화는 지금 우리가 호명하는 독립영화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한국청소년영화제가 비록 관변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일정하게 한국 독립영화의 연장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청소년영화제는 이후 금관상영화제, 금관단편영화제, 금관청소년영화제, 한국청소년단편영화제까지 오랫동안 초기 시상 영화제의 형태를 유지하였다. 1999년 한국독립단편영화제부터 비로소 현재와 같은 조직 시스템과 상영과 시상을 병행하는 축제로서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정부의 문화 정책은 영화진흥위원회 출범, 한국독립영화협회 설립과 맞물리며 영화제의 새로운 구성을 추동하였다. 서울독립영화제는 독립영화 영역에서 시행된 정부와 민간의 최초 거버넌스 모델이다. 비록 일부 시기 풍파를 겪긴 했지만 지금까지 그 형태를 유지하는 것은 여러모로 상징하는 바가 크다. 서울독립영화제는 이후 독립영화에 대한 공적 담론과 인프라 증진을 가속시켰다. 이와 관련한 기록은 이 책의 2부 독립영화 정책과 운동 및 3부 서울독립영화제 약사에 담겨 있다.
2014. 11.
기획위원을 대표하여
서울독립영화제 사무국장
김 동 현

21세기의 독립영화 (서울독립영화제 4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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