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순 평전 (첫 여성 마취과 의사의 잠들지 않는 삶)

신정순 평전 (첫 여성 마취과 의사의 잠들지 않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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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마취과 의사를 하리라”
마취과, 이 단어는 생소하다. 마취과는 내과나 외과와 마찬가지로 의학의 한 분과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낯설다.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마취’는 의사가 담당하는 것이 환자와 수술을 담당하는 의사를 위해 바람직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게 되고, 이후 이 분야에 진출하는 의사의 수가 증가하였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마취과는 언제, 어떻게 생겨났으며, 이 분야 시초는 누구였을까? 역사를 거슬러 가보자. 한국전쟁(6ㆍ25)이 발발하자, UN 16개국에서 전투병을 파병하였고,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이탈리아, 인도 5개국이 인도적 차원으로 의료지원단을 파견했다. 이때 가장 먼저 문을 연 것은 부산에 ‘스웨덴 적십자병원’이었다(1953년 부산 ‘스웨덴병원’으로 개칭). 전후에 이 국가들이 철수하게 되자, 한국 정부는 이 국가들에게 계속적인 진료를 요청한다. 이에 스칸디나비아 3개국(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UN한국부흥위원회(UNKRA), 한국 정부는 3자가 협력하여 스칸디나비아 교육병원을 세우기로 한다. 이에 1958년, 을지로6가에 ‘국립의료원’이 문을 연다(스칸디나비아병원으로도 불림).

신정순, 그녀의 삶은 이 역사와 함께 한다. 의대 재학 중인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피난을 가지 못해 인민군의 포로로 잡혀 북으로 끌려갔지만 생사를 건 탈출에 성공한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내 미군병원에서 의사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스웨덴 적집자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새로운 의료 기법을 받아들이게 된다. 수많은 부상자들을 보고 외과 의사의 길을 선택하려 했으나 스웨덴의 마취과 전문의 노던(Norden)을 보면서 외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마취과를 선택한다. 이후 국립의료원 최초의 한국인 마취과 의사가 된다.
1961년, 국립의료원 재직 중 WHO의 장학금을 받고 코펜하겐 마취학 교육센터로 유학을 떠난다. 덴마크 병원 시설은 매우 현대적이고 각 과와 유기적인 협력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놀란다. 이후 한국에 들어와 마취과 분야를 발전시키고, 국립의료원 수련의(인턴ㆍ레지던트)의 커리큘럼 등을 만든다. 이는 한국 최초 수련의들의 수련과정 프로그램이다.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원칙에 벗어나지 않았다. 1950~1960년 한국의 의학발전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고, 그 중심에 마취과 전문의 신정순이 있었다.
저자

김애리,윤정환

신정순교수의무남독녀다.어머니를닮은의사가되고자의학을전공했다.고려대학교의과대학을졸업하고동대학부속병원에서병리학수련을받았다.미국오클라호마대학에서유방암연구를했고,샌프란시스코대학에서피부병리에관해연수했다.현재고려대학교의과대학병리학교실주임교수이다.

목차

발간사를대신해서
축하의글
1장.가족과유년시절1928.05~1946.06
가족과성장배경
이화고등여학교진학
2장.힘들었던의대진학과대학생활1946.09~1951.10
여성으로서는힘들었던의대진학
쉽지않았던의사의길
한국전쟁포로생활과생사를건탈출
전시연합대학에서의교육과졸업
3장.마취과전문의로의길1951.11~1958.08
의사생활의시작-거제도포로수용소내미군병원
짧은방황-고아구제사업에헌신
마취과의(麻醉科醫)로의길-스웨덴적십자병원마취과
마취과전문의로서의선택-부산대학교의과대학병원
4장.국립의료원초대개원멤버1958.09~1960.12
국립의료원탄생과마취과초대의료진으로서의역할
국립의료원초기운영상황
국립의료원최초의한국인마취과의사
삶의동반자와의만남
5장.덴마크유학1961.01~1961.12/1968.05~06
코펜하겐으로의유학길
코펜하겐도착
코펜하겐마취학교육센터
전반기교육프로그램
후반기교육프로그램
덴마크에서의생활상
한국에왔던동료들과의재회
유학의성과
보수교육(1968.05~06)

6장.국립의료원마취과최초의한국인과장1962.01~1968.02
1960년대여성전문의로서의삶
마취과전문의자격취득및마취과학회활동
국립의료원한국인최초의마취과과장
국립의료원사직과가톨릭병원마취과에서의근무
7장.모교에서의새출발과헌신1968.02~1993.08
모교에서의새출발
의료원및3개병원의마취과·수술실기획
전문의양성의기틀마련
전공의수련환경개선을위한노력
마취과학교실의미래를위한헌신
8장.은퇴후의일상1993.09~2010.08
정든모교를떠나며
은퇴후의삶그리고영면
9장.가족이야기:부모를따라의사가된딸의회고|김애리
한집안의장녀였던어머니
아버지-방사선전문의김기정교수
아버지와어머니,그리고우리가족
엄마로서의삶-어머니와나
한집안의며느리로서의어머니
어머니의유지(遺志)

부록1:국립의료원수련의커리큘럼팸플릿
부록2:지난날을回顧하며
Copenhagen의AnesthesiaInstitution
추모사
신정순연표

출판사 서평

신정순,한국최초마취과전문의
신정순은마취과(痲醉科)라는당시한국에서는생소한전문과를담당하였고,여성으로서국립의료원최초의한국인마취과장을역임했다.그는구제일본식이론중심의의학교육을받았지만,졸업후의사생활을미군야전병원에서시작해미국식의학시스템을경험했고,이후스웨덴적십자병원에근무하면서의사초년기를보내북유럽식병원시스템에익숙했던인물이었다.
그당시세계적으로부족했던마취의사양성을위해WHO에서주관한덴마크코펜하겐마취의사연수교육프로그램에참여하여서구의선진의학기술을습득하면서자신만의영역을확장해나갔다.해당연수프로그램은한국에서매년1명씩참여할수있었는데(해당프로그램을이수한국내의사는10여명정도이다),신정순은최초로WHO장학금을지원받아코펜하겐으로유학을떠났던의사였고,1961년1년간의유학생활을마치고귀국해,한국마취학분야를선도했다.

국립의료원개원당시,스칸디나비아측의료인과한국측의료인간가교역할
국립의료원이문을열자,신정순은본격적인마취과전문의로서제2의인생을시작하게된다.특히한국전쟁기간부터1957년까지파견되었던스칸디나비아측의료진들중일부가본국으로철수하였다가국립의료원이개원하자다시돌아와일했기때문에스칸디나비안측의료진과의진료경험과병원운영에경험이많았던신정순이한국인의료진과스칸디나비아측의료진사이의가교역할을도맡아했으며,국립의료원초기병원운영안정화에크게기여할수있었다.
신정순은국립의료원개원초기에매우중요한역할을했다.모든것을새롭게만들어야만했던국립의료원설립초창기에,한국측인력과스칸디나비아측인력의접점을찾아공통의목표를제시하고함께수행하는데있어서많은혼란과어려움이발생했다.이러한상황에서신정순처럼서구의의료진특히스칸디나비아(스웨덴)의료진들과함께근무했던경험은매우중요한자산이되었다.신정순은양측이원활한관계속에서의료업무를진행할수있도록하는구심점역할을했다.국립의료원구성원중그누구보다많은경험과이해,의사소통의노하우가있었고,영어로대화가가능했다.부산스웨덴적십자병원으로부터이어진인맥과인연으로국립의료원의성공적안착을도왔고,그녀스스로도마취과전문의로서한층더큰성장을이뤄낼수있었다.한국의학이발전하도록노력한숨은공로자중한명이다.

고려대학교의과대학에서새출발그리고헌신
모교인고려대학교의과대학에서새출발을한다.혜화동병원신관이건립될당시,신관으로옮겨갈수술실,구로와안산,여주병원개원당시3개병원의수술실,중환자실,또안암병원수술실등을세팅하는데에핵심적인역할을담당했다.
3개병원(1983년구로병원,1984년여주병원,1985년안산병원)이하드웨어적인골격을갖추어가는동안에도환자안전을위해수술실을지키며밤낮을가리지않고몰두하는열정을보여주었다.동시에고려대학교마취통증의학교실이후진양성의요람이되는기틀을마련하는데중요한구심점이된것이바로신정순의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