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내면으로미끄러지듯들어가,인생의진실쪽으로부서지듯나오는’
책속의산문중발자크와호손을다루는전기성격의비평문과프랑스,이탈리아,영국,미국등지의여행기들은각각19세기말유럽문화의단면을날카롭게보여준다.작가가어린시절부터미국과유럽을자유롭게다니면서익힌‘세계시민’으로서의감각이여실히밴,유려하고아름다운글들이다.이뿐아니라우리는작가의본격문학비평두편을보게되는데(「소설이라는예술」과「삶이알아서그안에숨결을불어넣어:『한여인의초상』뉴욕판서문」),이두편의글들은왜헨리제임스가‘작가의작가’로불리는지를선명히드러내준다.
평론가신형철은이책의추천사에서다음과같이적었다.“왜어떤소설만이예술이며다른것은아닌지를분별하는것이불가능하거나권위적인일이라고믿는동시대인들이적지않다.”지금으로부터140여년전,헨리제임스는이처럼다소무리해보이는주제,즉소설중에예술인것과아닌것을가르고자‘소설의예술성’이라는주제에천착했다.그가살았던19세기말은자본주의가급격히융성해진시기였고그에발맞춰출판을비롯한예술분야또한활황기에접어들었다.이같은전환기에예술의본연을다시금짚었다는점에서,특히소설이라는장르의역할과가능성에주목했다는점에서제임스는근현대문학의주요이정표를세운이라고할수있다.
다만제임스를‘19세기사실주의의대가’이자‘20세기모더니즘소설의초석을놓은작가’라고쓸때우리는이같은호칭들이조금은혼란스러운명명아닐까고개를갸우뚱한다.흔히들사실주의와모더니즘이서로어울리지않는사조라고보기때문인데,이는제임스가살았던당대의문예사조가어떻게변화했는지를들여다보면쉽게이해될것이다.
19세기중반사실주의사조가등장하면서‘소설은삶의재현’이라는주장이힘을얻었다(제임스가사실주의의대표주자로꼽힌것도이때다).다만제임스가이해하는‘재현’은‘현실에얼마나가까운가’를강조하는19세기의경향과는다른면모가있었다.“제임스는‘현실성’보다는‘현실의분위기’라는표현을쓰고,‘환영’(illusion)이라는단어를즐겨사용한다.적절한번역어를찾기힘든‘환영’이라는단어는한마디로현실로착각할만한것을뜻하는데,거울을들이댄듯현실과똑닮아서가아니라그자체로살아존재하는듯한생동감을지닌다는점에서그렇다.그래서제임스에게는실제로있을법한일인가아닌가라는통상적인기준이중요하지않고,사실성의기준에서상대적으로자유로운로맨스와사실적인소설의구분이무의미한것이다.”(13~14면)
제임스의이같은생각은소설이현실그자체의재현이아니라그현실을소재로삼는소설가의의식의산물이라는생각으로귀결된다.결국핵심적인것은작가자신의인식과상상력이다.여기서우리는제임스가“객관적현실의반영에서주관적인상으로소설의강조점이옮겨가는전반적변화의시작점”(14면)에서있었음을알수있다.
「삶이알아서그안에숨결을불어넣어」는그의대표작『한여인의초상』의뉴욕판서문으로,제임스는이소설의주인공으로젊은여성을택한것이당대사회에적지않은충격을주리라는것을미리짐작하고있었다.작가스스로근대이후여성의역할이커진것을날카롭게포착해내긴했지만책으로써낼때의압박감은만만치않았다.
“어떤논리적심화과정을통해서이보잘것없는‘인성’,총명하지만주제넘은젊은여성의그저가냘픈그림자에게‘주제’로서의고상한속성을부여할수있을까?그리고그것을손상할어떤얄팍함을피해야그주제가최상의모습으로나타날수있을까?총명하든총명하지않든,수백만의주제넘은젊은여성들이매일매일각자의운명에맞서는데,그최대치에서무엇이될수있는가능성이그들의운명에열려있기에우리가그것을두고소동을벌여야한단말인가?”(159~60면)
그때제임스에게떠오른것은다름아니라‘의식으로서의소설’로,당시그가혼잣말처럼중얼거린말은다음과같았다.“젊은여성의의식을핵심주제로삼는다면,내가원하는만큼흥미롭고멋진어려움이생기겠지.중심은무슨일이있어도그것이어야해.”(164면)갈수록현실을포착해내기어려워지는상황에서제임스가택한것은‘보는행위’였다.제임스는「소설이라는예술」에서소설과미술이가까운관계라고강조하는데,이는소설이미술과마찬가지로예술의한장르이고또한이미지와장면으로구성된다고보았기때문이다.그이미지와장면이소설가의머릿속에서완성된다는점에서‘의식으로서의소설’은새롭게그의의를획득한다.어떤문학이예술이며아닌가를논할때에헨리제임스의「소설이라는예술」이주요한기준점으로언급되는이유가여기에있다.신형철평론가가잘짚어준것처럼“제임스에따르면소설에선(플롯이아니라)인물이먼저이고,(도덕이아니라)진실이중요하다.인간의내면으로미끄러지듯들어가,인생의진실쪽으로부서지듯나오는소설”,그것이곧예술이다.
흑백으로가를수없는,거미줄처럼얽힌복잡한삶을대면하는법
이책에서제임스의발길을따라프랑스,이탈리아,영국을걷다보면그가유럽곳곳을관찰하면서‘미국의기준’을언급하는것을심심찮게볼수있다.다른한편,그는미국태생이고한동안미국에서지내기도했지만거의대부분의삶동안유럽에거주하면서미국사회를냉철하게평가했다.한마디로그에게중요한것은‘신세계미국과구세계유럽의교류와충돌’이었다.
근대사회의변화에무척민감했던제임스도미국의극적인변화앞에서는상당한충격을느낀다.뉴욕에마침새로지어진수많은고층빌딩을보며그전과확연히달라진미학적면모를깨닫고,기존의삶영역과는달리만들어진미국의공간들이본래유럽인들이구축해놓은‘사적인삶’이라는전통을송두리째뒤흔든다고보았다.이와동시에미국인들의자유분방한모습을보면서는‘꼭두각시인형’같다고비평하는데,이는근대의주체들이자본주의사회의부품으로전락했음에도자기스스로를‘자유롭고독립적인존재’로보는모순을꼬집는말이기도하다.
제임스는평생전업작가로살면서,독자들이자신의작품속으로함께걸어들어와각인물이특정한장면에서중요한면모를읽어내고깨닫는과정을함께경험하기를,더나아가각인물앞에놓인여러상황까지읽어내기를소망했다.이처럼소설을통해사고를훈련하다보면독자스스로자신의실제삶을새롭게인식할수있다고보았다.제임스에게소설의몫이란바로이같은인식의변화를촉구하는것이었다.이책을엮고옮긴정소영번역가도제임스와같은희망을품는다.“제임스에게도덕의식은선악이나옳고그름의잣대가아니라‘흔들려깨워진지성’이었던것이다.소설에서위로나공감을구하려는독자에게제임스소설이제공할것은많지않겠지만,흑백으로가를수없는,거미줄처럼얽힌복잡한삶을대면하는법을알고싶은독자라면제임스에게서읽어낼것들이여전히많으리라믿고싶다.”(15면)
추천사
엘리엇은자신의비평이시창작과정의부산물이어서그한계가분명하다며이를‘작업실비평(workshopcriticism)’이라부른적이있지만,소설쪽에서긍정적의미의작업실비평을떠올려보면제임스의「소설이라는예술」이나「『한여인의초상』뉴욕판서문」만큼영향력있는글도드물다는생각이다.너무늦은번역이지만(덕분에적임자를만나원문의섬세함이보존됐다),이제라도나와서반갑다.소설도예술이라는당연한사실을증명하기위한이토록정교한수고가당시에만필요했다면다행이겠으나그렇지않기때문이다.왜어떤소설만이예술이며다른것은아닌지를분별하는것이불가능하거나권위적인일이라고믿는동시대인들이적지않다.제임스에따르면소설에선(플롯이아니라)인물이먼저이고,(도덕이아니라)진실이중요하다.인간의내면으로미끄러지듯들어가,인생의진실쪽으로부서지듯나오는소설.나는이기준을,인류가지켜야할불씨처럼,백수십년전의제임스에게서건네받는다.
-신형철(평론가)
헨리제임스같은작가는전형적인골칫거리다.안읽고넘어가기엔고전이고읽기엔시간과노력이든다.백년전에죽은상류층백인남성소설가의작품을고전이라는이유만으로다시읽어야할이유가있을까.이런고민을해결하는가장좋은방법은산문을읽는것이다.그런데산문을읽기시작하면깨닫게된다.소설이그어떤예술보다진지한예술이라는사실을.최소한헨리제임스는그렇게믿었다.삶의총체성을담아낼수있는유일한장르가소설이라믿었고자신의믿음을전하기위해필사적이었다.그러니우리는소설앞에서진지해야한다.소설앞에서진지하다는것은곧삶을진지하게대한다는의미이므로,간혹우스꽝스럽게보이는이진지함이실은혼란스럽기그지없는삶에서중심을잡을유일한방법이므로.그렇게헨리제임스의산문을읽는것은우리가삶을대하는가장진지한방법중하나가된다.
-정지돈(소설가)
책속에서
발자크의인물됨을알아보려면그것을거의전적으로작품속에서찾아야한다고방금말했지만,사실그의작품에는특이하도록개인적인면모가드러나지않는다.정신에대해말해주는것은엄청나게많지만삶에대해서암시하는바는별로없다.그보다덜전기적인작가는상상하기힘들정도다.그것이그의천재성의어마어마한범위,무엇과도비길수없이생생한상상력을증명하는것은분명하다.아는것만큼이나스스로창조한것도그에게실제적이었고,말하자면그의경험에는상상의경험이수천겹덮여있다.실제인물은되찾을수없을만큼예술가속으로모습을감췄다.
---p.31~32
예술은우리가맘편히쉴수있는삶의한구석이다.우리가그곳을찾는이유를정당화하기위해요구되는것은재현적충동이생기리라는사실뿐이다.다른차원의충동들은여러조건이달리고방해받는다.이웃의충동과일치하는만큼만지닐수있을뿐이다.이웃의편의와안녕,이웃의확신과편견,이웃의법칙과규칙에일치하는만큼만.예술은그모든것에서벗어나는일이다.환히빛나는예술의기준이떠다니는곳이라면사과하거나타협할필요가없다.
---p.138
이소설을구상하게된싹을확인해보려지금돌이켜보니,확실히‘플롯’이라는장치나,이야기꾼을위해자체의논리에따라즉각움직이기시작해행진이나달리기나잰걸음으로걷기시작하는특정한‘상황’에서시작된건아니었다.그게아니라오롯이단하나의인물,매력적인특정한젊은여성이라는인물과면모에서시작해서,배경은물론이고‘주제’의통상적요소들은전부나중에덧붙여야했다.되풀이하자면,내상상속에서작품의모티브를변호하는마음이자라났던전과정에이렇게기억을투사해보니그것역시최고상태의젊은여성만큼이나흥미롭다.잠재된확장의힘,씨앗을깨고솟아나야할이필요성,마음속에서굴려보던구상이가능한한크게자라나겠다며내보인결심,빛과공기속으로쑥쑥자라흐드러지게꽃을피우겠다는그아름다운결심,그런것들이야말로이야기꾼의예술이지니는매력이다.
---p.148~149
전반적으로는상상력에게한없이말을거는장소가상상력이원하는특정한것을그순간에주지않는건어찌된일일까?아름다운그곳에서거듭그런의구심이떠올랐던기억이난다.사실을말하자면,그곳은상상력이간청하면내어주기야하겠지만그저너무많이내어준다.다시말해당장의특정한상황에서쓸수있는이상으로많이내어준다는것이다.
---p.149
한마디로소설의집에는창문이하나만이아니라수백만개다.차라리셀수없이많은창문을낼수있다고도하겠다.거대한건물전면의창문은모두각자상상력의필요에따라,각자의지의힘으로생겨난것이고앞으로도계속생길것이다.모양도크기도제각각이지만인간삶의장면위로다함께자리를잡은구멍들이라,그들이전해주는이야기에서겉으로보이는것보다훨씬더큰동질성을기대할법도하다.기껏해야창문이긴하다.드나들수없는벽에서로연관도없이높이자리잡은구멍일뿐이라,경첩달린문처럼그것을열고삶으로곧장들어갈수는없다.하지만각창문마다두눈을지닌,최소한쌍안경을가진인물이서있고,눈이나쌍안경이관찰을위한독특한도구가되어그것을이용하는사람들에게자신만의독특한인상을확실히보장한다는점이이창문들의특성이다.
---p.156
인간세상은어마어마하게넓고현실의형태는무수하다.확실하게단언할수있는것이라고는고작어떤소설의꽃에서는현실의향기가나고다른소설은그렇지않다는것뿐이다.꽃다발을어떻게구성해야하는지미리알려주는것은그와는전혀다른문제다.경험으로써야한다는말도마찬가지로훌륭하지만요령부득이다.소설가로성공하려는사람이그런단언을마주하면우롱당하는마음이들것이다.어떤종류의경험을말하는것이며,그경험은어디에서시작하고어디에서끝나는가?경험이란결코한정되지않고결코완결될수도없다.그것은광대무변한감수성이고,의식의방에걸린아주가느다란명주실로짠거대한거미줄로,부유하는입자를빠짐없이잡아낸다.
---p.190~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