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의 순간들을 무엇으로 살았는가 (백이운 시조집)

고요의 순간들을 무엇으로 살았는가 (백이운 시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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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고요 속에 도약을 꿈꾸다
자유시가 주를 이루는 현대 시 상황에서 시조는 고요해 보입니다. 고요의 순간이 숨죽임이라면 시조는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죽은 장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요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움츠려 있는 상태일 리 없습니다. 고요 속의 외침처럼 무언가 꿈틀대는 형상은 보이지 않는 것을 담는 문학의 본질입니다. 얼어붙은 땅을 비집고 봄싹이 트는 일은 고요의 순간을 견딘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백이운 시조집 『고요의 순간들을 무엇으로 살았는가』는 시조 세계의 진면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조는 정형률에 갇혀 오래도록 우리 뇌리에 형식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뼈대만 살아 있다면 거친 표현일지 모르지만 내용이 전하는 뜻을 다양하게 맛본 적이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조는 형식을 거둬 내고 도약한 지 오래입니다. 가람이 시조의 혁신을 주창한 이후 눈에 띄게 다른 형식과 내용으로 우리 곁에 꿈틀대고 있습니다. 이 살아 있는 생물로서 시조가 왜 이리 멀게만 느껴졌을까요. 교육 탓도 있겠고, 전통을 무시하는 세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오래도록 우리가 고요의 순간들을 지내지 못했기에 그렇지 않을까요.
백이운은 1977년 『시문학』에서 추천 완료되어 등단한 이후 한국시조작품상, 이호우시조문학상, 유심작품상을 수상했으며 『슬픔의 한복판』, 『왕십리』, 『그리운 히말라야』, 『꽃들은 하고 있네』, 『무명차를 마시다』, 『어찌됐든 파라다이스』, 『달에도 시인이 살겠지』 등 일곱 권의 시조집을 출간한 바 있습니다. 특히 계간 『시조세계』 발행인으로서 한국시조시인협회 부이사장으로서 시조 세계의 한복판에서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 자리는 어느 한 켠으로 휩쓸리지 않는 중심입니다. 이번 시조집은 그러한 구심력을 바탕으로 원심력을 향해 가는 여정입니다. 20세기 영시英詩에서 중시조中始祖쯤 되는 시인이 있는데 혁신을 일궈낸 홉킨스입니다. 그가 구사한 리듬 변형을 특별히 ‘스프렁 리듬sprung rhythm’이라 부릅니다. 이 어휘 뜻이 ‘도약’이니 영시는 홉킨스의 도약률로 한번 날아오르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그처럼 누군가 “고요의 순간들을 무엇으로 살았는가” 묻는다면 시인은 대답할 것입니다. 고요 속에 도약을 꿈꾸었다고.
저자

백이운

1977년'시문학'추천완료로문단데뷔.제8회한국시조문학상수상('90).제4회한국시조작품상수상('94).제9회이호우시조문학상수상('99).한국시조시인협회부회장

목차

너의손금속에는13
열정백수의노래14
하늘이내려다보시면15
서른이미생未生이다17
집보다더좋은것19
청춘은아름답다20
성탄절저녁탱고를듣네21
서른의예수예순의붓다22
붉은화첩‐꿈인듯만산홍엽23
길24
양들의침묵25
물26
달팽이에관한기억27
울음28
별을향해기도하다29
혼자차마시기30
늦가을날저녁밥상31
자비의길32
대화법33
지복至福34
시시한시35
차례
구름의달36
시간의혀37
경계38
벚꽃세상39
달아닌달‐표지그림40
생일41
반하거나홀리거나‐강호과객42
반하거나홀리거나‐마음이하는일43
반하거나홀리거나‐예의에대하여44
반하거나홀리거나‐어느하루45
반하거나홀리거나‐당의정이필요한사람들46
반하거나홀리거나‐연緣47
반하거나홀리거나‐일48
반하거나홀리거나‐도심산중49
반하거나홀리거나‐혼잣말50
반하거나홀리거나‐눈금51
반하거나홀리거나‐칭찬52
반하거나홀리거나‐계산법53
코54
도깨비세상55
각축에억측56
꽃이된항아리57
봄은늘춘래불사춘58
꽃피는계절59
비몽사몽사월60
달이아름다울때61
화양연화花樣年華62
화신化身63
초야草野64
돌계단에떨어지는낙엽65
스마트폰66
문자안부67
청도씨없는감68
중추절을축하함69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70
숨고르기71
화살의행방72
오연헌梧硯軒하룻밤73
청개구리무설법문74
야옹선사75
꽃한송이76
숫자놀이77
복사꽃세상78
공중누각79
중심축이기우네80
지하철세정류장81
꽃을사랑한다고어찌말하랴82
환골탈태83
찻잔하나도허투루할수없는내력84
어디에도있는반려85
무배추보다못한시86
마음챙김87
까마귀떼가우는오후88
무채색이키운시간89
묵언의실체90
내안에91
인생칠십허영청虛影廳92
칼93
허당94
못,95
아직도,생선대가리96
덧칠,너란덫질97
산의행방98
달아래웃고있네99
코끼리와성자100
절규도사치스러워101
빙렬氷裂102
바다거북은바다를사랑한다103
붉은시104
월병이야기105
까마귀문답106
까마귀물고온서신107
말,말,말108
꽃다발‐노산문학상시상식에서109
젊은도공봄밤같은110
동피랑벽화에숨은시인111
검은호랑이해의행복수업112
빵과꽃113
차벗들의나이114
내기억의서랍115
향기로운할喝116
시인의산방117
작약118
벗어날수없네119
무릎,꿇다120
삼배,하다121
거리두기122
금줄123
향기의빛깔124
햇빛맑은날의꿈125
마음도늙어간다126
붉은줄127
그날의안부128
시한줄129
해괴解塊130
결기131
고양이꿈속의봄밤132
기다림에대하여133
까마귀의날들134
재유화병135
혓바늘136
죽비보다무서운것137
여백139
해설고요의건축술과시인의사라짐(이민호)146

출판사 서평

『고요의순간들을무엇으로살았는가』는무엇을담았는가?

고요의순간은거룩한순간

이시집은숨쉬고있는생명에끊임없이눈길을주고있습니다.달팽이,베짱이,쓰르라미,개미,매미,바퀴벌레,너구리,청개구리,원숭이,고양이,까마귀,벌,거미,코끼리,바다거북등미생을고요히바라보고있습니다.시인의아바타로서이환유적치환속묵언의실체는거룩하기그지없습니다.십이월어느날구도자의탄생이그랬던것처럼시인은언어적상징질서를거부하고마침내몽상가의상상력속으로우리를이끌고있습니다.그시공간은아직은절망과탄식으로점철돼있습니다.치유와사랑의손길을갈구하고있습니다.
보이지않는곳에서마침내절대자가현현,기적과구원을이루었듯이이시집은눈먼존재들이부활하는거룩한순간을담고있습니다.잡담으로일관하고있는일상을떠나가장내밀한공간에자신을가두고사라지는시인의모습은릴케가두이노성으로일탈을감행했을때처럼의미심장합니다.고요속에서들었던천사의소리는‘비가悲歌’였습니다.고요의순간들은거룩해지기위해슬픔의시공간을거쳐가고있습니다.이시집은슬픈몸,사람,사물,일상,깨달음이서로관계를맺으며풀었다놓았다를반복합니다.
고요하고거룩함은어떤경계로도구분지을수없기에백이십삼편이일체를이루고있습니다.별무리를이루며회전하는성좌처럼거대한합창이되어이시공간에참여하는사람들은누구나온몸이진동하는경이로운체험을하게됩니다.별들은이혼돈속에서,어울림의전율속에서탄생했습니다.이시집은바로그거룩한탄생직전의고요속에있습니다.


[시집해설에서]

고요의건축술과시인의사라짐

1.‘보이지않는것’을건축함

라이너마리아릴케의시창작원천은고독이었다.필생역작『두이노의비가』를쓸무렵천사의목소리가들렸다.시인이어둠속에있을때였다.외부와차단된깊은내밀함속에서궁핍한시대의존재론적물음을거듭하고있을때신비한내면에서생명의소리가흘러나왔다.그럼으로써시인은보이지않는것을보게되었고삶과죽음의거룩한발자취에서드러나는소리를인간에게되돌려주어야한다는시인된소명을되새기게되었다.
그처럼백이운은고요한순간들을거듭살고있다.이시집은그때마다들리는존재의소리를듣고부름에응답했던고백록이다.그러므로이시집은그자신뿐만이아니라그의시역정을같이했던사람들에게중요한계기moment를마련한다.‘불가능성의가능성’이다.앙리르페브르가발굴한이아이러니는여기저기살아숨쉬는순간의역설이다.지금우리가맞닥뜨
린한계와무지몽매한특권의폭력저편에서홀로더불어살수있다는가능성의현실적장치이기도하다.개체로서주체,즉구체적세계속에서살아움직이면서서로관계맺는인간형상을세우는일이다.
삶의가능성을꿈꾸는일은공간적이다.몽상가시인에게는시적건축술이라할수있다.이시집에서공간과시인의상호관계를온전히드러내는방식을들여다보면언어적상징질서에서벗어나려는시인의상상력과만날수있다.그런점에서백이운은주체와외부를구분하지않고공간을건축하듯시를쓴다.칸트가비판철학을기획하면서‘인간이성은자연본성상
건축술적’이라고언명했듯이,앙리르페브르가이이성의장벽을넘어시적공간을해방시키려했듯이,백이운은파편화된일상속에흩뿌려져있는것들을모두하나로집결시키고있다.이비체계적이고유동적인공간에시인은홀로존재하지않는다.그의실존은끊임없이이어지는관계의연속이다.사물과타자와시인이오갔던흔적이이시집으로묶였다.이때비로소시인은사라지고진정시적몽상의세계가펼쳐진다.
하이데거는1951년다름슈타트강연『건축함거주함사유함』에서건축함이근원적으로거주함을의미한다고말한다.나아가본질적으로‘인간존재의근본특성을사유’하게된다고.쉼표로도나누지않은건축함거주함사유함의총체성은백이운의시적공간에서가능성의시학을열어놓는다.

2.‘보살핌’속에거주함

시를짓는것은인간거주와마찬가지로주변세계를돌보고가꾸는것이다.이내재된창조성으로비로소시인은공간에깃들어살게된다.그러므로시는그저만들어진것이아니다.구조화된건축물과같은형식에얽매이지않고어떻게거주할것인가를사유한다.나아가시적공간을건축하는가운데인간존재의근본적인물음을던진다.하이데거는특별히‘거주함’의근본적특성을망각과은폐로점철된인간현존재의‘보살핌’에가져다놓는다.그럴때시적공간은단지형식적공간이아니라시인이의미를부여하는장소가된다.
백이운의시를하이데거의‘거주함’의네가지‘보살핌’으로살펴보면세계를수호하는것이며간직하는일이다.보살핌은땅을구원하는가운데,하늘을받아들이는가운데,신적인것들을기다리는가운데,죽을자들을인도하는가운데인간삶에생기를불어넣는다.

매미만한바퀴벌레벌렁나자빠져죽어있다
살아서는올려다볼꿈도못꾼푸른하늘
한번도눈맞추지못한그런연緣도있는거다.
-「반하거나홀리거나-연緣」전문

일상은제몸을채우고도넘치는욕망과거주하고있다.바퀴벌레로환치된욕망은오래된미래처럼시원에서기원하여현재를뚫고느닷없이눈앞에드러난다.욕망의주검앞에시인은보이지않는것을중첩시켜본다.시인이거주하는공간은‘푸른하늘’아래구현된땅이다.대지는지배자가소유하는것처럼보인다.그러나‘올려다볼꿈도못꾼’사소한것들의공간이기도하다.당당히하늘을우러르는자들은그러한소수자들을‘바퀴벌레’처럼취급하고배제하며차별한다.시인은그은폐된공간을푸른하늘아래헤집어놓았다.망각된실체의적나라함이시인의마음을흔들고있다.‘인연’앞에,스치지않았을관계앞에고개를숙이는것이다.인연의보살핌으로이땅은다시구원받지않을까.

메아리없는기도였다탄식할일아니네
거기산이있을줄알았던때문이니
그산이야반도주한건지원래없던것인지.
-「산의행방」전문

하늘은탄식이전에,인식이전에,판단이전에존재했다.그래서기도는메아리없었으며산은거기에없기도했다.산의행방을묻는것은보이는것으로보이지않는것을찾으려는언어도단이기도하다.고요함속에서시인은밤을타도피할수밖에없는존재들을생각한다.그존재성에대해물음을던진다.내밀함속에서본래존재했던순수본질에대해의심할여
지없이존재하고있다는확신이야말로보살핌의정점이다.칸트가『순수이성비판』을통해설파했듯이보이지않는것,즉본래있는것을없다고부정할수는있지만보이지않는것을없다고표현할길은없다.야반도주했던시공간속에우리모두거주하고있다.그래서보이지않는하늘로손흔들어다시오라맞이하는것이다.

어디로튈지모르는너구리와청개구리
말안듣는원숭이와눈먼개미떼
내안에이런것들이주인행세식객노릇.
-「내안에」전문

너구리와청개구리,원숭이와개미는신적존재의변신이라말할수있는가.시인이이들을제몸에받아들이고더불어거주함은일종의영접은아닐까.분명말할수있는것은이존재들은인간세人間世에있지않다.장자가말했던처세가이들에게인간답지않기때문이다.인간이만든틀속에거주할수없는존재이기에신적존재의환유라할수있다.‘어디로튈지모르는’행위의무제한성과‘말안듣는’경지는언어의상징질서밖존재의품성이다.궁극적으로‘눈먼’맹목이인간의용의주도를넘어존재하는신들의격이아닐까.시인은이신적존재들을식구로보살피고있다.

꽃피고잎지는게기적이라는말씀

시간을재촉하지않는품성그대로

나무들몸을낮추고쉴채비를마쳤다.

사라져가는모든것들의늠름한뒤태

하늘로부터받은허허로운충만에도

대지는비장함대신너그러움을택하고.

고개숙인결실들에합장하는어깨너머

세상에서가장낮은길이열리고

귀먹고눈먼바람이선하게앞장선다.
-「길」전문

꽃과나무와바람마저도사라져가는모든것들이다.죽을자들을인도하는길이낮게열렸다.시인은죽음에앞서가그들을이끌고있다.결국죽을자들은인간이기때문이다.이고요의순간에시인은어떻게죽음안에거주할수있을까응시하고있다.‘허허로운충만’으로표현된죽음의역설은죽음을죽음으로서흔쾌히맞이할수있는능력을요구한다.훌륭한죽음
이존재하도록자신을이끄는가운데시인은거주하고있다.하이데거가말하는네개의틀속에거주하는보살핌의뜻은백이운의시에서새롭다.구원과수용과기다림과인도함이하나로겹쳐져백이운의시를건축하는시학으로자리하고있다.궁극적으로백이운에게시를쓴다는것은그행위에멈추는것이아니라아예시적공간에거주함을뜻한다.이불이不異의공간속에서시인의사라짐을사유하게된다.

3.‘몸’을사유함

백이운시에담긴시적공간은보살핌으로거주하는가운데‘몸’에결집된다.이때몸은물리적으로구획된빈공간을채우는구성물이아니다.몸자체가하나의공간을이루며망각된기억을되살리며은폐된의미를복구하는장소로기능한다.이때몸은선회의계기이자가능성으로열린개별적주체이다.백이운시에서관성적으로밀려가던주체의행로는멈춰서어느곳으로든방향전환을도모한다.그처럼몸은결단의집적체로서시적공간에서재생한다.

바위가막아서면그바위돌아흐르고

큰물이덮쳐오면그등에얹혀서간다

흐름이멈춘뒤에야큰칼을벗는운명.

흐르는물이라고뼈없는것은아니다

흐름을그쳤다고물아닌것은아니다

누구나큰칼을벗을즘엔물이한번뒤집히리.
-「물」전문

물은일반적으로흐르는존재로서공간화되어있다.가뭇없이사라지는무의미한공간성으로여겨졌다.그런데물이바위와큰물과결집될때또다른계기를만난다.‘돌아흐르’기도하고‘얹혀서’흐르기도한다.이선회와중첩은거주함의양상으로백이운의시를변환의장소로공간화한다.물의환유적치환은몸을상기시킨다.시인은‘큰칼’이라고하는금줄과같은경계적운명을물의선회에겹쳐놓는다.시인은고요속에멈춘듯하다.하지만그거주함속에서운명을바꿀계기를마련하고있다.이뒤집힘의장소성이야말로그의시몸속에새겨진시성詩性이라할수있다.그것은궁극적으로보이지않는것을보는가능성에열려있다.탈골의상상력이다.

차를머금어빛나는찻잔의몸만큼

찻상유리면속에빛나는잔그림자

내면이저쯤은돼야,탄복하는되풀이.

혼자차마시기는사라짐의되풀이

기억속에각인된달의지문을지우며

누군가쓸고닦은길달팽이가기어가듯.
-「혼자차마시기」전문

차를머금은찻잔이건,시인의몸이건빙렬로갈라져있다.그러므로고요속에서차를마시며몸을사유한다는것은사라짐을몽상하는일이다.이몸들을스쳐갔을기억과상처를지우는일이다.이런모든일은내밀한깊이에거주함으로가능하다.홀로있다는것은고독한일이다.그러나그때비로소천사의소리를들을수있다.그러므로고요에거주함은상징적
언어로가득찬시의몸에잔금을내고타자와다리를놓는보살핌이다.이모두시인이사라짐으로이루어졌다.
-이민호(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