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브러햄링컨외
1809년2월12월켄터키주(州)출생.가난한농민의아들로태어나학교교육은거의받지못했지만,독학하여변호사가되었고,1834~1841년일리노이주의회의원으로선출되었다.1847년연방하원의원으로당선되었으나,하원의원직은1기로끝나고변호사생활로돌아갔다.1850년대를통하여노예문제가전국적인문제로크게고조되자정계로복귀하기로결심하고,1856년노예반대를표방하여결성된미국공화당에입당했다.1858년일리노이주(州)선출의상원의원선거에입후보하여재선을노리는민주당의S.A.더글러스와치열한논전을전개함으로써전국적으로유명해졌다.선거결과에서는패하였으나,7회에걸친공개토론으로그의명성은전국적으로알려지게되고,1860년대통령선거에서는공화당의대통령후보로지명받았다.이선거에서는민주당쪽에서노예제유지의브리켄리지와인민주권의더글러스의두명의후보로분열되었기때문에링컨이당선되었다.그러나그의당선과함께남부각주는잇달아합중국을이탈하여남부연합국을결성하였다.1861년3월4일대통령에취임하자링컨은"나의최고의목적은연방을유지하여이를구제하는것이지,노예제도의문제는아니다"라고주장하였으나,4월섬터요새에대한남군의공격으로마침내동족상잔(同族相殘)의남북전쟁이시작되었다.전황은처음에는북군에게불리하였으나,1862년9월남군이수세로몰린때를노려노예제폐지를예고하고외국의남부연합국승인을저지함으로써,북부와해외여론을자기편으로유도하여전황을일거에유리하게전개하는데성공하였다.1863년11월게티즈버그국립묘지설립기념식연설에서유명한"국민에의한,국민을위한국민의정부는지상에서영원히사라지지않을것이다"라는불멸의말을남겼다.전쟁중인1864년의대통령선거에서는,재선전망이불투명하였으나,U.S.그랜트가총사령관으로임명된후승리가계속된것이그에게유리하게작용해서재선에성공하였다.전쟁이종막에가까워짐에따라관대한조치를베풀어남부의조기연방복귀를바랐으나,남군항복2일후인4월14일워싱턴의포드극장에서연극관람중남부인배우J.부스에게피격,이튿날아침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