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아흔 살의 할머니가 증손주들에게 전하는
우리의 역사, 나의 이야기
어린 시절,
나는 살아 있는 역사, 죽은 역사는 물론
지나간 시대의 삶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사람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삶의 방식들,
어떤 삶, 어떤 시대, 어떤 사회가 옳고 그른 것인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기억하는 우리 어른이 전해야 할 이야기!!
우리의 역사, 나의 이야기
어린 시절,
나는 살아 있는 역사, 죽은 역사는 물론
지나간 시대의 삶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사람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삶의 방식들,
어떤 삶, 어떤 시대, 어떤 사회가 옳고 그른 것인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기억하는 우리 어른이 전해야 할 이야기!!
1904년 2월에 시작하여 1905년 9월에 종전 협상으로 끝난 ‘러일전쟁’ 이야기를 초등학교 때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시절 가장 많이 부르던 노래 역시 이 전쟁 노래였다. 일본의 승리로 끝난 전쟁이었으나 일본이 치른 재정과 인명의 손실은 실로 막대하였기에 전후 40여 년이 지난 우리 세대까지 이 전쟁 이야기는 회자 되었다.
이 전쟁은 한반도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일본 대 러시아의 무력 충돌이었으니 한반도 주인인 우리가 어찌 무심하게 넘길 수 있으랴. 그러나 나는 어느 선생님에게서도 그런 역사를 배운 적이 없다. 오로지 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기억할 뿐이다. 할머니 이야기의 힘이다.
일본이 미국을 향해 선전포고도 없이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억지스러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일본은 초등학생인 우리까지를 들들 볶았다. 어느 날 새벽, 우리는 주먹밥 하나, 눈깔사탕 몇 개만 가지고 교문을 나섰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였다. 대구에서 아주 먼 어느 절까지 걸어갔다가 학교로 돌아오니 서산에 해가 기울었다. 우리는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하루를 걸었다. 태평양 전쟁) 때 일본인들이 강요한 닌꾸단렌(忍苦鍛鍊)의 일면이다.
대구비행장 건설을 위해 그 질기고 뿌리 깊은 골프장의 잔디를 캐내는 작업을 종일토록 했다. 보리가 자랄 때는 보리밭을 밟았다. 모내기 철에는 거머리가 들러붙는 논에서 모심기를 거들었다. 또 높은 산에 올라가 송진을 톱으로 캐는 노동도 했다. 비행기 연료로 기름을 짠다는 것이었다. 우리 손으로 켜가는 송진 양이 얼마 된다고. 여름에는 매일 잡초 1kg을 교정 퇴비장에 묻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동네 잡초가 동이 났다.
이렇게 혹독한 단련을 받은 탓에 우리 세대는 저력과 내공이 쌓였다. 그래서 웬만한 고생은 참아낼 수 있었다. 해방과 6.25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된 조국을 세워 일으킬 저력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뒤돌아보면, 어린아이들은 아무리 고된 일들도 고생인 줄 모르고 치르게 된다. 자고 나면 힘이 솟으니까.
이웃에 사셨던 춘원 이광수 선생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님
이 겨레와 이 나라를 사랑하신 그 충정이
바다와 같이 깊었습니다.
하늘이 내리신 님의 글재주를 뉘라서 감히
견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님은 시대의 죄를 홀로 짊어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떠나셨습니다.
떠나신 님을 위해 효자동 담장 위의 능소화도
붉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본문 중에서
이 전쟁은 한반도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일본 대 러시아의 무력 충돌이었으니 한반도 주인인 우리가 어찌 무심하게 넘길 수 있으랴. 그러나 나는 어느 선생님에게서도 그런 역사를 배운 적이 없다. 오로지 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기억할 뿐이다. 할머니 이야기의 힘이다.
일본이 미국을 향해 선전포고도 없이 포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억지스러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일본은 초등학생인 우리까지를 들들 볶았다. 어느 날 새벽, 우리는 주먹밥 하나, 눈깔사탕 몇 개만 가지고 교문을 나섰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였다. 대구에서 아주 먼 어느 절까지 걸어갔다가 학교로 돌아오니 서산에 해가 기울었다. 우리는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하루를 걸었다. 태평양 전쟁) 때 일본인들이 강요한 닌꾸단렌(忍苦鍛鍊)의 일면이다.
대구비행장 건설을 위해 그 질기고 뿌리 깊은 골프장의 잔디를 캐내는 작업을 종일토록 했다. 보리가 자랄 때는 보리밭을 밟았다. 모내기 철에는 거머리가 들러붙는 논에서 모심기를 거들었다. 또 높은 산에 올라가 송진을 톱으로 캐는 노동도 했다. 비행기 연료로 기름을 짠다는 것이었다. 우리 손으로 켜가는 송진 양이 얼마 된다고. 여름에는 매일 잡초 1kg을 교정 퇴비장에 묻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동네 잡초가 동이 났다.
이렇게 혹독한 단련을 받은 탓에 우리 세대는 저력과 내공이 쌓였다. 그래서 웬만한 고생은 참아낼 수 있었다. 해방과 6.25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된 조국을 세워 일으킬 저력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뒤돌아보면, 어린아이들은 아무리 고된 일들도 고생인 줄 모르고 치르게 된다. 자고 나면 힘이 솟으니까.
이웃에 사셨던 춘원 이광수 선생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님
이 겨레와 이 나라를 사랑하신 그 충정이
바다와 같이 깊었습니다.
하늘이 내리신 님의 글재주를 뉘라서 감히
견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님은 시대의 죄를 홀로 짊어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떠나셨습니다.
떠나신 님을 위해 효자동 담장 위의 능소화도
붉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본문 중에서
시대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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