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 여기 있어요

수평선 여기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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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명훈의 소설집 「수평선 여기 있어요」에 실린 단편소설들은 사회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틈새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네팔의 살아있는 여신 쿠마리가 소재로 쓰인 작품에서는 오후 3시 10분 전의 시간이 상징적으로 특화된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막노동의 한 특수 분야인 도비 현장에서 전직 비정규직 철학 강사의 시선이 번득인다. 서민적이고 일상적인 김밥집이 색다른 시공으로 차원 이동되는가 하면, 다른 곳에선 환경 위기를 배경으로 순수함과 생존논리 사이의 처절한 고뇌가 이어진다. 8편의 소설은 저마다 다른 시공에서 펼쳐지지만 전체가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는 힘이 느껴진다.
저자

이명훈

1961년청주출생.서울대불문과졸업.
“이명훈은굴곡깊은체험으로삶의다양한풍경을겪어왔다.문학이라는통과의례를그는오래도록치르고있으며,어쩌면고통가득한그여정은끝나지않을지도모른다.그는매일문학으로죽고,매일문학으로살기때문이다.”

2000년〈현대시〉에시를발표하며,시인으로데뷔.
2003년〈문학사상〉장편소설문학상을수상하며,소설가로데뷔.
2004년장편소설「꼭두의사랑」(문학사상사)발간.
2018년단상집「수저를떨어뜨려봐」(들녘)발간.
2023년소설집「수평선여기있어요」(북마크)발간.

목차

1.먹물잡부의눈길7
2.십분남았다43
3.절대로67
4.빨간농장101
5.그놈의스토리137
6.만년설171
7.24시간김밥집195
8.모독교환사회221
해설251

출판사 서평

저자의말

저물녘의육거리시장좌판에하나라도팔려고쭈그려앉은할매들,입동지나첫서리찬기운묻혀집에들어가면반겨맞을할배는있을까.산책을하다보니가을볕에시들어가며씨앗하나라도꽃만들어보려는들꽃식물들이문득내고향청주육거리시장의할매이미지로다가왔다.
소설쓰기는고통과인내가필요한지난한작업이다.사회와세계에대한부단한질문도중요하지만인간존재,특히사회적약자나그늘에사는존재들에대한존중과애정,그들을위한치열한논구도필요하다.이번에내놓는소설집은미흡함이있을지라도사회와세계의미세한그늘들을바닥에서보려노력한것들이다.세계화라는거짓환상속에일그러지고상처받는존재들,자칫간과되는부조리및출구탐색을위해나름의치열함으로임했다고감히말해본다.

책속에서

건물이해체될수록잠자리가늘어나는것에선야릇한기분이들었다.마치건물이해체되어야할철학의그무엇처럼여겨지기도했다.(…)나는바닥을내려보다가해머를거머쥐었다.단단한콘크리트를내리치다보니지독한뭔가와대결하는기분이었다.손에들린해머가니체의망치같았다.콘크리트바닥은어떤바탕,오류의기원,뒤집어진위상이었다.노동과자본의뒤틀린관계,문제투성이의현대사회를산출한잘못된설계도면이었다.(먹물잡부의눈길에서)

자기기만이라는말로처리되어버리기엔끔찍이도혹독한삶,아예처음부터기회를얻지못해더러운게임의룰속에던져진사람들,자기기만이길인그들에게그길을모독할수는없는것이다.그길엔관념따위론파악할수없는진한얼룩의결이있다.(만년설에서)

부스에앉아좀이쑤시는사이그두개의세계가충돌을해대고있었다.오후3시면그중하나의세계의상징인객장이문을닫고,붉은빛의성스런나라에선신의문이열린다.오후3시는내심장을말려버린시간이기도하고,죽어가는그심장을낯선경외의손길이치유해준시간이기도하다.오후3시는무수한사람들의운명이어이없이엇갈리는시간이다.오후3시정각에나는차가운슬픔의도시에서탈출하듯떠나뜨끈뜨끈한피의문앞에서있었다.(십분남았다에서)

소설가라는녀석이창의성이그렇게없나?아니모방하거나저잣거리에서주워들어포장을기막히게하는게소설일까?대체소설이뭐지?소설가가곁에있어도아직까지물어본적이없네.어떤이야기들은생명체처럼계속살아움직이고왜어떤이야기들은사장되어버릴까?(…)어떤이야기는사람을타락시킨다고낙인이찍힘에도결국은진실된철학이라고여겨질까?(…)내가슴에왜이리이야기들이웅성웅성하는걸까?내겐철학보다이야기꾼의끼가더강한것일까?철학을하고싶었던꿈이좌절되자그습지에서이야기가발아하기시작한것일까?대체이야기가뭐지?난말없는아이였는데내안의낯선이야기들은어디서,어떻게,왜생겨나계속생성되어번지는걸까?(…)이야기란도대체뭐지?(그놈의스토리에서)

“너의만년설이뭐니?”
상준은취기를핑계로불쑥물었다.
“아빠.만년설은없대.이제거의다녹았대.”
“그렇지.거의다녹았지.거의다.그거말고너의만년설.너만의.”
“아빠.배고파.”
상준은아직덜녹은만년설에뜨거운불덩이라도퍼붓고싶어졌다.보험의화마라도되어야할것같았다.칭얼거리는딸을왼팔로안으며주머니에서스마트폰을꺼냈다.남은두명중한명에게전화를걸었다.통화음만길게이어질뿐받지않았다.(만년설에서)

섬뜩했다.방망이로얻어맞은것같았다.혁기형의말은충분히인정되고도남는다.내가수없이미안하다는문자를날렸고무기력해진가슴엔미안함,자책말고도수없는상념들이떠돌았다.그럼에내가백프로잘못했다는말은도저히인정되지않았다.아니백프로라는말자체를감당할수없었다.백프로라는말에깃들인완고한경직과난공불락의절벽을견딜수없었다.수상한음모와거대한협잡의내음을견딜수없었다.진실이아님에도절대화된허구,그럼에도무조건따르는허연눈동자들의맹목이끔찍했다.그러나그말에대해따지고들면혁기형은훈계조로나올것이뻔했다.(절대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