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았다 (6·25전쟁 귀환 국군포로 9인이 들려주는 이야기)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았다 (6·25전쟁 귀환 국군포로 9인이 들려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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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아들을 품에 안고 있으면, 누군가의 귀한 아들인 국군포로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2013년 귀환 국군포로를 만났다. 국군포로를 취재하면서 이들의 증언집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이판과 팔라우에 살았던 위안부를 비롯해 사할린 억류자들을 취재한다지만, 피해자 대부분이 사망한 상황에서는 할 일이 없다’며 절망하던 나는 희망을 찾고 있었다. (중략) 아들을 품에 안고 있으면, 누군가의 귀한 아들인 국군포로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중략) 논문 계획안을 작성하려고 2016년 서울은 물론, 경기도 이천과 안산에 사는 귀환 국군포로들을 찾아가 인터뷰했다. (중략) 2020년 2월 20일부터 9월 25일까지 8개월 동안 귀환 국군포로 7명, 국군포로 자녀 2명, 국군포로 아내 1명, 국군포로 관련 시민단체 활동가 2명을 만나 가까스로 논문을 썼다. (중략) 나는 귀환 국군포로 11명을 만났는데 그중 9명에 대한 이야기만 책에 실었다.(8~10쪽)

현재 우리는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의 정확한 수조차 모르는 실정이다
내가 만난 귀환 국군포로들은 5만~10만 명으로 추산하는데, 다른 그룹들은 또 다르게 예측하고 있다. 1953년 8월 7일 유엔군사령부가 발표한 〈휴전에 관한 특별보고서〉에는 국군포로와 실종자가 8만 2,318명으로 기록돼 있다. 우리 정부는 1997년 10월, 4만 1,971명에 달하는 〈6ㆍ25참전 행불자(실종자) 명부〉를 작성했는데, 이 인원에 미귀환 국군포로가 포함됐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북한은 1950년 12월 30일 평양방송을 통해 국군 및 유엔군 포로가 6만 5,000명이라고 밝혔다. 그중 1만 3,469명이 송환됐으니 미귀환 국군포로는 5만 1,000여 명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은 〈항미원조전사〉를 통해 중공군이 개입한 후 생긴 포로가 4만 6,523명이며 그중 국군포로는 3만 7,815명이라고 집계했다.(12쪽)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해 얼굴도 공개하지 않는 어르신들과 한 약속은 외면하기 어려웠다.
나는 어르신들을 10년 동안 느릿느릿 인터뷰하면서 늘 이렇게 말씀드렸다. “저에게 해주신 말씀을 잘 정리해 사람들에게 알리겠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르신들과 한 약속을 지키고 싶어졌다. 가족의 안위를 걱정해 이름도, 얼굴도 공개하지 않는 어르신들과 한 약속은 외면하기 어려웠다. 도리어 그 약속을 어기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르신들이 고통 속에서 살아간 동료들 때문에 나에게 이 일을 증언한다’는 사실을 확인했기에 그 마음을 저버릴 수 없었던 것 같다. (11, 12쪽)

기자 10명이 일주일이면 해낼 일을 기자 1명이 10년에 걸쳐 띄엄띄엄 했다
내가 게으름을 피우는 사이 6ㆍ25전쟁 귀환 국군포로 생존자는 2023년 5월 현재 13명으로 줄어들었다. 애초에 나는 국군포로의 손을 잡고 그분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어르신들이 나를 세상으로 이끌어주셨다는 걸 알게 됐다. 그분들에 대한 책을 쓰고 싶었던 기자가 꿈을 실현하려다 병이 나 백수가 됐는데, 그 꿈을 이루며 깊은바다 돌고래 출판사 사장이 됐기 때문이다. 기자 10명이 일주일이면 해낼 일을 10년에 걸쳐 띄엄띄엄 했을 뿐인데 이런 말을 해서 쑥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사실이다.(14쪽)

진보주의자도, 보수주의자도 아닌 한 인간으로서 전쟁 피해자들의 삶을 듣고 기록했다
나는 폭로하기 위해 귀환 국군포로들을 만난 것이 아니다. 실상을 고발하는 기사는 넘쳐난다. 보수주의자로서 국가를 위해 헌신한 영웅을 알리고 싶어서 취재한 것도 아니다. 진보주의자도, 보수주의자도 아닌 한 인간으로서 전쟁 피해자들의 삶을 듣고 기록했을 뿐이다.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길 바라면서 말이다. (13, 14쪽)
저자

이혜민

경기도여주에서돼지농장을하는부부의둘째딸로1982년삼일절에태어났다.이화학당의자랑인유관순열사를동경하며이화여자대학교에들어가정치외교학을공부했다.2007년동아일보사에입사해〈신동아〉,〈주간동아〉에서마이너리티를취재했다.2012년일제징용피해자유해발굴현장인사할린,위안부흔적이남은사이판과팔라우를찾아갔다.‘가해자에게사과받지못하는현실’보다‘피해실태조사가미흡한현실’이더안타까웠다.
2013년,6·25전쟁귀환국군포로들에게마음이갔다.이들에대한이야기를연재기사로싣지못해논문으로담아내자싶었다.이듬해육아휴직을받아고려대학교일반대학원사회학과(석사과정)에들어갔다.복직해논문작성을미루는사이전두환전대통령을인터뷰했다.전전대통령에게5·18에대한책임을물은뒤책무라는단어의무게를알게됐다.영화〈군함도〉를계기로군함도를취재했다.군함도피해자6명은만날수있겠다싶었다.단행본《기록되지않은기억군함도》(2018)책날개에‘귀환국군포로40여명을취재하기위해고군분투한다’고적은것은제비가‘시간’을물어다주길바랐기때문이다.책곳곳에‘전쟁의참혹함을기록하는데인생을걸겠다’는포부를적어놨지만,건강이나빠져2019년회사를떠났다.
그토록갖고싶었던기자직함을잃은대신시간을얻었다.코로나사태가한창인2020년민폐인줄알면서도귀환국군포로들의인터뷰를진행해논문〈한국전쟁귀환국군포로구술사연구〉(2021)를작성했다.지금은두아이를키우며포부를안고나아가고있다.

목차

프롤로그아들을품에안고있으면,누군가의아들인국군포로들이어른거렸다
1장내무성건설대출신탄광노동자
01故한재복…20“비전향장기수보낼때국군포로와교환이라도했어야지,맞교환이라도”
02국군포로A…40“남한정부가인민군포로를석방해우리가못왔습니다”
03국군포로B…62“북한땅에서청춘을다보낸게너무억울합니다.인생이라고말할수도없어요”
04유영복…84“(국군포로)하나도안데려왔지.끝내국가가그걸못하더라고”
2장내무성건설대출신목공·공장노동자
05이대봉…108“자식이아버지를원망해.내가항상마음에가책을받는단말이오.”
06최기호…126“(군대를)안갈수있는기회가두번있었단말이야.내솔직히양심껏온거야”
3장교화소출신노동자
07김성태…148“교화소에있는13년동안이한번안닦은거같네”
4장인민군출신농업노동자
08故국군포로C…168“자다일어나서도아들생각에…그걸계속후회하지”
09국군포로D…188“아들이북한에있어서못만나요.그게가장슬프지”
부록…208
6ㆍ25전쟁귀환국군포로관련연표
참고문헌…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