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인사이드 아웃

일본군 위안부 인사이드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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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주익종

서울대에서일제하한국경제사연구로경제학박사학위를받았다.하버드대방문학자와대한민국역사박물관학예연구실장을거쳐현재이승만학당이사로서한국근현대사연구와교육업무를하고있다.
학술지『경제사학』등에게재한다수의학술논문외에,교과서포럼의『대안교과서한국근현대사』편찬(2008년)에참여했으며,『대군의척후-일제하의경성방직과김성수·김연수』(푸른역사,2008)와『고도성장시대를열다』(공저,해남,2017),『반일종족주의』(공저,미래사,2019),『반일종족주의와의투쟁』(공저,미래사,2020),『수출지향공업화』(해남,2023)등의저서가있다.

목차

책머리에
프롤로그:허물어지는거짓의바벨탑

제1부일본군위안소는어떻게설치되었나
01일본군위안소의설치
02위안부수는?

제2부그녀들은어떻게일본군위안부가되었나
03위안부강제연행설의형성과득세
04위안부계약론의전개
05위안부계약의증거
06정대협증언록으로본‘위안부되기’
07조선내작부와창기가되는경로
08객관적자료로본‘위안부되기’

제3부위안소에서의생활은어떠하였나
09업주-위안부간계약조건
10위안소영업과위안부의일,소득
11그래서성노예였던가?
12일본군패주전장의위안부
13위안부학살이라는거짓말

에필로그:더이상한일간에일본군위안부문제는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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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지성과이성의말살언저리의한국
자유민주주의는개인의근본적자유에입각해있다.사상의자유,표현의자유,학문의자유는그핵심이다.1933년나치가‘반(反)독일정신’서적을불태웠을때이개인의근본적자유는함께불살라졌다.이후독일은광기의파시즘체제로이행하였다.21세기한국도이개인의근본적자유를보장하지않는다.한국인이일본군위안부에관해‘강제연행된성노예’이외의의견을내려면목을걸어야한다.직장을잃거나벌금형을받거나징역을살아야한다.
2013년강제연행성노예설의획일성을비판한책을낸세종대박유하교수는위안부명예훼손혐의로2심에서유죄판결을받았다가6년만인2023년10월대법원에서가까스로무죄취지판결을받았다.2017년대학강의중에위안부가위안부일임을알고서자발적으로갔다고발언한순천대의한교수는파면되고징역6개월의실형까지살았다.역시강의에서위안부가매춘의일종이라고설명한전연세대류석춘교수는징역1년형이구형되었으며,역시강의에서위안부는생계를위해자발적으로나선사람들이라는취지의발언을한경희대최정식교수는학교측의징계를앞두고있다.
나와상관없으니괜찮은가?1933년나치가반독일정신책을불태울때도많은사람들이별관계가없었다.하지만일본군위안부에관해특정의견이아닌,다른의견을내면처벌받는21세기한국은1933년의독일과같이지성과이성의말살언저리에있다.

일본군위안부에관한당시의지식은온당한가
당신이보통의한국인이라면아마도일본군위안부에관해다음의지식을갖고있을것이다.

거리에서,마을우물가에서혹은집에서일본관헌에붙잡힌조선인소녀가일본침략전장에끌려가위안부가된다.이런소녀는수십만명에달한다.위안소에서조선인소녀는일본군의성노리개로서혹사당할뿐아니라학대와폭행을당한다.끝내그소녀는고국고향에돌아오지못하고일본군패전때학살당한다.운좋게살아돌아온소녀는훗날할머니가되어서야위안부실태를고발하여일본을규탄한다.하지만일본은아직도진정한사과와배상을거부한다.

이는전형적인위안부이야기,서사(敍事)다.2016년개봉된영화<귀향>에서도일본군인이소녀를위안부로끌어간것으로나왔다.
러나일본군인이딸을저렇게강제로끌어갈때그부모는,형제는무엇을했던가.저항하면총으로쏴죽이고칼로찔렀기때문에저항할수없었나.딸이나누이동생의강제연행을막으려다죽거나다친위안부가족에관한이야기는왜없나.수십만의조선인위안부가위안소에서하루에도수십회씩일본군인에게강간당했다면,일본군은전투는안하고매일같이위안소를드나들었다는것인가.그리고그많은위안부가전장에서버려지고학살당해서돌아오지못했다면,해방후에라도수십만의피해가정이문제를제기했을터인데,그런일은왜없었던가.20여년에걸친한일회담에서한국측은일본측에왜이문제를제기하지않았던가.일본군위안부에관해알고있는사람들이많았을해방~1980년대에는이문제가제기되지않았다가,그런사람들이대부분죽어서없어진1990년대에와서야이문제가크게불거진것은무엇때문인가.
위의강제연행성노예서사로는이런당연한질문에답할수없음이분명하다.위안부에관한당신의지식은온당하지않다.당신은지어낸이야기에사로잡혀있다.

위안부이야기는실은지어낸것
1992년8월이용수는친구엄마가친구와함께좋은곳에일하러가라고제안하자부모모르게새벽에집을나선후빨간원피스와가죽구두에혹해서모집인을따라갔다고증언하였다.이는정대협의첫증언집에,그리고무엇보다도KBSTV출연영상에담겼다.하지만훗날이용수는일본관헌에의해강제로끌려갔다고자신의증언을바꾸었다.특히2007년2월16일미의회청문회에서이용수는“군인하고그여자아이하고들어와서어깨를이렇게둘러싸고한손으로입을막고군인은뒤에서등에뭔가를콱찌르면서그냥끌려갔습니다.밤에”라고증언하였다.
실상위안부이야기의대부분은이런증언으로구성되었다.사람의말은언제든바뀔수있으며기억조차도시간에따라변형된다.증언과같은구술자료는사실검증을거쳐야하지만,증언을채록안위안부운동가들은아무런사료비판없이“피해자의증언이진실”이라고강변하였다.
일본의이른바인권변호사토츠카에쓰로는1992년2월유엔인권위원회에서위안부제도를성노예제로규정하였다.일본군위안부문제가막제기되었을뿐,아직관련자료도발굴되지않아아무도그실태를몰랐던때였다.위안부운동가들은그후계속하여성노예론을주장한바,이것은미리내린결론에관련자료를짜맞춘것에불과하였다.

위안부의가짜이야기가아닌진짜이야기는?
전장에서위안소를설치한것은일본군이지만일본군은업자를선정하였고업자가여성을모집하였다.업자는가난한가정,결손가정의호주,친권자에게전차금을주고여성과동의서,호적등본,인감증명등관련서류를넘겨받았으며여성의거주지경찰서에서신분증명서를발급받아야했다.이서류없이는업주와여성은중국이나동남아전장의위안소로갈수없었다.업주와여성측간에위안부계약이있었다.
위안부를모집하는방식은국내에서작부와창기를모집하는방식과같았다.모집인이농촌의가난한가정을찾아가좋은일자리가있으며보수도미리주겠다고감언이설로꾀면워낙가난한빈농가부모가솔깃해서딸을내놓았다.모집인은그딸을데리고도회지에와서소개업자를통해공창이나요릿집에넘겼다.때로는그딸을2~3년간기생수업을시킨후기생으로만들기도했다.
위안부운동가들은위안부로수십만명이,그것도식민지조선에서가장많이동원되었다고하나,이는전혀사실이아니다.일본군이전투는안하고매일같이위안소를들락거린다면위안부수십만명이필요했을것이다.위안부는전장의일본군수150명당1명이라는일정비율로동원되었던바,교체된위안부까지포함하여1937-1945년간총3만5천여명에달하였고그중조선인은20%인7천여명이었다.
위안부의나이는모두17세이상이었다.조선인위안부는일본인위안부보다는젊었으나모두법적연령(만17세)이상이었다.
위안소에서위안부는위안행위를제공한대가로업주에게서나누어받은수입으로채무(출발전받은전차금)를갚고때로는저축도하였다.가난한집안출신으로위안부가되었으나,좌절하지않고새길을찾기위해위안소에서열심히일하고저축한여성의이야기도많이있다.
위안부폭행과학대이야기도있으나,일본군과위안소업주모두위안부를잘관리할이유가충분하였다.위안부를폭행하고학대하는일은일본군과업주모두에게큰손해가나는일이었다.위안부학살의증거는없다.30여년의조사연구에도불구하고위안부학살사실은발견되지않았다.
대개의위안부는계약기간이끝난후귀환하였다.때로는상당한돈을모아서돌아왔다.그러나교통편을제공받지못해서혹은너무늦게위안부가된까닭에일본의항복까지귀국하지못한경우도있었다.일본군패주전장의위안부는연합군의폭격에희생되기도했으며극심한고통을겪었다.

저자는어떻게일본군위안부제의진짜이야기를밝혔나?
지난30여년간위안부운동을뒷받침하기위해수많은연구가나왔다.관련자료도발굴되었다.그자료를있는그대로읽고해석하면그진실에다다를수있다.왜곡된시각,강제연행성노예론의시각으로자료를보니편향되고왜곡된,엉터리해석이나온다.신분증명서가있어야중국에갈수있었는데,일본인여성은그랬지만조선인여성은아무서류없이도중국에갈수있었다고보는것자체가잘못된것이다.중일전쟁발발후조선에서중국에가는입국자는목적과도착지,남녀,지위등에따라모두카운트되었다.저자는위안부운동그룹이발굴한자료를읽고,그들이내놓은연구를인용해서이책을썼다.

위안부가짜이야기가횡행하게된이유는?
현재의위안부이야기는1990·2000년대에창작되어한국인의뇌리는물론,세계인의머릿속에주입된것이다.일본군이조선여성을강제로끌고가성노리개로삼았다가버림받았다는이야기에한국인은격분하였다.위안부강제연행성노예설은한국인사이에널리퍼졌고,일본의사죄와책임자처벌,법적배상의목소리가거세졌다.
그주창자인한국의정대협(현정의연)과일본의좌익연구자들은그가공의스토리를무기로삼아일본정부에사죄와배상을요구하였다.도의적책임을인정한일본정부가여러차례사과하고위로금을지급하였으나,위안부운동가들은그것을거부하였다.그때문에한일관계는파탄상태에이르렀다.이는날조편집한역사로반일정치투쟁을이끈전형적인역사정치였으며,이위안부운동가들은정치집단으로서중국문화혁명의홍위병에비견할만한역사홍위병이었다.

위안부피해를부정하는가?
많은여성이본인의사에반하여위안부가되었다고할수있다.그러나그보다더많은수의국내작부,창기도본인의사에반해서만들어졌다.위안부피해를이야기하면서작부·창기피해는이야기하지않는것은온당하지않다.작부·창기피해의가해자는누구인가.공창제를만든일본정부인가.아니다.모든걸일본정부탓이라할수는없다.작부,·창기를만든것은극도의가난,빈곤이다.마찬가지로위안부피해를낳은것도극도의가난,빈곤이다.
실은“본인의사에반해서”는피해의판단기준이될수없다.여성을위안소업주에게넘겨준것은그가족,호주·친권자였다.이는당시흔히행해진합법적계약이요거래였다.일본군-업주-여성의호주·친권자가위안부동원의책임자이므로,그책임을추궁한다면세주체모두에게각각의책임을물어야한다.이미사망한업주와여성의호주·친권자의책임을물을수없다고그것을모두일본정부에추궁할일은아니다.
위안소제의가장큰문제는패전시일본군이위안소에대해아무런대책을마련하지않았던점이다.일본군은패주전장에서도새로위안소를설치하였고,패전의피해는위안부에게도떨어졌다.

일본군위안부문제의전망은?
위안부운동은위안부제의사실,진실에입각하지않았기때문에이제동력을상실하였다.일본정부가위안부문제로또다시사과하거나위자료를지급할일은없다.이미한일위안부합의가있었으므로한일간에다시외교교섭을할일이없다.그리고한국정부는지난30년동안전위안부에게생활보조금과위로금을충분히지급하였다.당시조센삐로불리고천대받았던전위안부들도일본군에의해전시에동원된피해자로서인식되어그명예도상당회복되었다.이제는더이상한일간에위안부문제란없다.

한국지식사회는반성해야
한국인은지난30여년간왜진실에입각하지않은운동에그토록휘둘렸던가를스스로물어야한다.왜위안부의실상이이토록왜곡되고위안부문제가이토록오래계속되었던가를성찰해야한다.한국의지식사회는,특히역사학자들은지난30여년간일본군위안부에관해거짓이난무하고국가사회적으로혼란이일어나는것을강건너불구경하듯한,아니그반일효과를즐긴과오를진지하게반성해야한다.아우슈비츠수용소박물관에는미국의철학자이자작가조지산타야나의“과거를기억못하는이들은그과거를반복하기마련이다”라는경구가있다.우리가일본군위안부문제를제대로복기하지않으면,우리는거짓에휘둘리는역사를다시살게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