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법조인들아‘가인과효봉을추억하라!’
“법관法官은털끝만큼도의심받을행동을해서는안된다.무엇보다불의와부조리에저항하지않는판사는영혼이구속될것이다.사법부의판결은자유로운영혼이오직양심에따라내리는판결이어야국민이승복한다”
예나지금이나법조인은한결같이“가인김병로(1887~1964년)는한국법100년역사에서크고위대하며압도적인영향을주신분”이라고말한다.지금도‘가인선생이말씀하시기를~~’이라고말문을여는법률가가있다고한다.가인의업적대부분이법률과관련한것이다.그는시대가아파하는것을발견하고그것을해결하려는진정한법法철학자였다.가인의인생과업적을좇는것은법률가로서너무도당연하다.
가인은대한민국법률의초석을닦은법조계의큰어른이다.일제강점기에는‘사상변호사’로활약했다.안창호선생과여운형,박헌영등좌우익가리지않고독립운동가를변론했다.선생의아호‘가인街人’은나라를되찾기전에는방황하는‘거리의사람’이라는뜻이라고한다.
‘법法은그사회의어둠과정의를밝히는등불이요,저울’이라고외친몽테스키외의내면을깊이탐사라도한듯,가인의가르침에는자기삶과사상이빚어낸결곡한마음자리의지형을엿보게하는것같아옷깃을여미게된다.법관으로서그의삶은향기로웠다.
법관가인의삶에는사생활이아예없었다.공사구분이지극히엄격했다.이를테면선생의가족중에대법원장관용차를타본사람이없다.손자김종인(정치인)이군면제를받을수있었지만,현역으로복무했다.수많은이나라법조인군軍미필자를부끄럽게하는대목이자가인의참모습이묻어난다.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법관은일반직장인의자세와다른더높은사명감,신성한법률가로서의자각과깊은성찰이있어야한다.이는전체법률의소비자인온국민에게경원시하는일반법지식의전수자가아닌,올바른혜안과지혜를수양시키는더높은인격과도덕성이요구되기때문이다.
법률가로서가인의업적은무엇보다우리의기본법률을만들었다는데큰의미가있다.단지형법,형사소송법,민법등의초안을잡은것이아니다.가인이모든조항을굉장히꼼꼼하게썼다.선생이몸소민법1조부터1,000조까지모두그의손끝으로빚어낸‘명품名品’이다.부산피란생활중병에걸려왼쪽다리를절단한불편한몸이었다.
가인이평소입버릇처럼되뇐것은“판사는가난해야해,판결문은추운방에서손을혹혹불어가며써야진짜판결문이나오는거야…”그런가인은당시기름을때는대법원장공관에서도톱밥과연탄으로혹독한겨울을나며언행일치를몸소실천한분으로누구보다청렴결백한생활로주변사람들에게존경받았다.
특히1950년대박봉에시달리다항의하는판사에게가인은“나도죽을먹으면서살고있소.조금만더참고국민과같이고생해봅시다”라고일축한적도있었다.그는또“집무실에놔둔잉크가얼었습니다”라고하소연하는직원에게는“하지만영하5도까지내려가기전에는난방이안돼요.나라찾은지얼마안되니우리가청렴과검소로국가산업을일으켜야만합니다”라고훈시한그시린일화逸話는지금도회자된다.
1953년어느날이승만대통령이대법원장가인을만났다.현역대위를권총으로살해한민의원서민호에게1심법원이정당방위라며무죄를선고한뒤였다.대통령은대뜸‘어떻게그게무죄냐’라고목소리를높였다.가인은‘판사가내린판결은대법원장인나도뭐라못한다.유죄라면상소하라’라고맞받았다.
그리고같은해후배대법원장에게이런가르침을남겼다.“법관은세상사람들로부터의심을받아서는안된다.만약의심받게된다면그것만으로도법관으로선최대의명예손상이될것이다”
이렇게법조인의지조와덕목을계율戒律처럼지켜온선생은1957년“사법종사자들은부정을범하는것보다굶어죽는것이오히려영광”이라는말을남기고조용히퇴장한다.하지만가인은우리법조역사에서영원한스승이다.
‘엿장수판사’효봉스님을아는가!
대한불교조계종소속금강산신계사는법조인불자에게각별한사찰寺刹이다.조계종초대종정인효봉스님(1888~1966년)은이절에서출가했다.당시효봉의나이는38세,상당한늦깎이였다.아픈사연이있다.
효봉의고향은평안남도양덕군쌍용면이다.어려서부터신동소리를들었다.5~6세때에는사서삼경을줄줄이암송했다고한다.평안감사가개최한과거시험에서당당히장원급제했으니가히그의총명함을읽을수있다.
효봉은일본와세다대학으로유학하러갔다.그곳에서법학을공부했다.졸업이후곧바로법관이되려면당시일본고등고시에합격해야했다.효봉은1913년일본에서고등고시를통과해조선인으로서는처음으로판사가되었다.일제강점기에조선인을위해일하겠다는생각에곧바로대한해협을건너조선으로돌아온다.그는돌아와판사로서10년간서울과평양,함흥등요직에서봉직했다.
법복을입은지10년,1923년평양복심법원(현재고등법원)판사시절어느날조선인에게사형선고를내려야하는청천벽력같은사건이일어난다.법의원칙대로선고를내린효봉은인간적고뇌에빠진다.‘과연사람이사람의생명을끊는판결을할수있단말인가?’뇌리를맴도는자문자답으로괴로워하던효봉은마침내법복을벗는다.
“이세상은내가살곳이아니다.내가갈길은따로있다”
비로소세속의‘이찬형’은판사직함(1913~1923년)과아내와자식을뒤로한채홀연히집을나선다.그리고입고있던양복을팔아그돈으로허름한옷과엿판을산다.엿판을목에걸고엿장수로팔도강산을돌아다닌다.전국을떠돌며엿장수로3년간자신의잘못을참회한끝에마침내효봉은머리를깎으려고금강산신계사로향한다.
그때도목에는엿판을걸고있었다.신계사에서효봉은‘엿장수중’으로불린다.자신의정체도숨긴채그냥엿을팔다출가한중이었을뿐이다.나중에법원에서함께근무했던일본인판사가관광차금강산에왔다가신계사에들러효봉을알아보면서그의정체가비로소절간에알려진다.그때부터절집에서는‘엿장수중’에서‘판사중’으로별명이바뀐다.
한번내린사형판결로고귀한한생명을죽였다는것에대해속죄贖罪하며효봉은일생을처절한구도자로서몸부림쳤다.그는늦깎이로출가했다.하지만구도심은남달랐다.좌선할때한번앉으면꿈쩍도하지않았다.엉덩이가짓물러터져방석이젖는일이잦았다.그래서또하나더해진별명이‘절구통수좌’였다.
1930년효봉은금강산법기암무문관토굴에서일일일식一日一食,장좌불와長坐不臥로가행정진加行精進했다.토굴에들어간지1년6개월만에효봉은‘나는누구인가?’에대한구도를이루었다.당시효봉의나이44세였다.이후6년뒤인1937년지천명의나이에금강산과작별을고한다.
그의발길이머문곳은전남순천의송광사였다.효봉의전설같은일화는헤아릴수없이많다.효봉은추상같은이승만대통령에게도굴하지않은일화가있다.초燭심지가타서내려앉기전에는새초를갈아끼우지못하게했다.수행자는가난하게사는게곧부자살림이라고말했다.
또한번은수행에힘쓰느라‘울력(여러사람이힘을합해일함)’을소홀히한성철스님이송광사에서공부하기위해방부房付를들일때일갈했다.“책보따리만메고다니면안된다.울력도함께해야지”효봉은구도에도철저했지만,자신에게는더욱엄격했다.
효봉은1966년10월15일새벽3시예불을올릴즈음에제자들에게말했다.“나오늘갈란다”그날오전10시,효봉이늘손바닥에굴리던호두알소리가멈춘다.그때가법납法臘40세였다.제자법정은스승의열반을‘장엄한낙조’라고애도했다.입적하는날까지효봉은한번내린사형판결을참회하는구도자로서일생을마감했다.
가인과효봉은법관으로서의‘소명召命’을실천한분이다.삶의행위에서잘나타나있다.제대로된법조인이라면두분을추억할때열등감과질투심을느낄줄알아야한다.그리고나는어떤꿈을가지고법을공부했으며,무슨이상을실천하려고이자리에섰는가를항상자신에게물어야한다.법에대한자신의소명은없고죽어라고법전만달달외워서과분한자리를차지하고앉으면그는법전의노예로살게된다.
법률에는강한힘이있다.죄를범한인간은반드시법에따라그죗값을치러야하기때문이다.따라서법을공부하는사람은먼저자신이단단하고야무져야한다.그렇지않으면법전의무게를견딜수없다.법전에쉽게굴복당한법관은법을악용하는비굴한삶을살게된다.법관은이중차대한무게를이겨내기위해자기만의철학이있어야한다.높은차원의시선으로법전을읽고자기만의법전을쓰는일을시작할때비로소법을부리는주인이될수있다.
내가이사회에펼칠꿈과소명은무엇인가?법관은항상이러한자기질문이있어야한다.그냥그법전만외운법률가는내가펼칠꿈이무엇인가,내가가져야할사명이무엇인가를발견하지못하고인생을막살게된다.결국권력을빙자하여돈과명예를좇는천박한부나비인생으로삶을마감하게된다.그동안부패한법조인들이살아온모습이이를잘보여주고있다.올바른법관으로서‘소명’을가진사람은대한민국헌법이위임한법률을모든사람에게‘정의롭고공정하고평등하게’사용해야한다.